1. 혁명전야
"젊은 국왕 루이 16세가 랭스에서 축성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충성스런 도시 파리에 성대하게 입성한 것은 대관식으로부터 1년 후인 1775년이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을 출발한 국왕의 행렬은 생자크 거리를 거쳐 생트주느비에브 교회로 향했다. 끔찍한 날씨였다. 행렬은 루이르그랑 콜레주 앞에 멈춰섰다. 퍼붓는 비를 맞으며 땅바닥에 그대로 무릎을 꿇은 열일곱 살의 젊은이가 축사를 낭독했다. 아마도 그는 이 영예를 위해 지명된, 이 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이었을 것이다. 또한 아마도 교사들이 아이디어를 제공했거나 아니면 그들이 세심하게 검토했을 그의 연설은 관습적이고 진부한 내용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들보다 네 살 어린 이 학생의 글을 건성으로 들었을 것이다. 비가 그들을 침울하게 만들었다. 왕과 왕비는 학생 대표의 축사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고, 왕실 마차는 진흙 속에 무릎을 꿇은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1758~1794)를 남겨둔 채 다시 길을 재촉했다. … 구체제의 정점에 있는 인물들과의 최초이자 유일한 이 만남은 이 젊은이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 품기 시작한 관념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줄 만한 것은 아니었다." ─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中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 구체제)이란 무엇이었는가
프랑스 혁명에 대해 논하기에 앞서, 먼저 프랑스 혁명이 뒤엎은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얘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역사학적 용어로 앙시앵 레짐이라고 하는 이 체제는, 쉽게 말해 프랑스 절대군주제가 과거의 봉건제와 타협하고 뒤섞이며 만들어진 해괴한 결과물이었습니다.
여러분이 태양왕 루이 14세의 말, "짐은 곧 국가다"를 통해 친숙하실 절대군주제는 중세 유럽의 지방분권적 정치체제가 왕을 중심으로 중앙집중화되면서 나타난 모습입니다. 과거 자신의 영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귀족들은 왕의 신하로서만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상비군과 국세라는 힘을 토대로 왕은 행정·입법·사법의 전 영역에 대한 최고 결정권을 휘두르게 됩니다. 왕권신수설에 의해 정당화된 그의 권력은 왕을 신의 지상 대행자로 만들었고, 왕의 말은 곧 법(Lex Rex)이라는 원칙이 법학에 있어서도 핵심 개념이 됩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 두고 싶은 점은, 이러한 절대군주제가 보기보다 '절대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절대군주제는 고대의 전제정(tyranny)과도 다르고 동양의 황제나 기타 국가수반의 지위와도 다릅니다. '왕의 말은 곧 법' '짐은 곧 국가' 이 말들을 뒤집어 보면 결국 유럽에 있어 통치의 핵심은 '법'과 '국가'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왕의 명령은 법 위에 있었으나 동시에 왕은 법 없이 통치할 수 없었습니다. 왕이 곧 국가이긴 했으나 동시에 국가는 왕의 사유물이 아니었습니다(만약 그랬다면 "국가는 짐의 것"이라고 했겠죠). 절대군주제는 법과 국가, 즉 다시 말해 왕을 둘러싼 관료들에 의해 지탱되는 구조였으며, 이들의 유능함과 충성이 사라지는 순간 군주는 허수아비로 전락하기 딱 좋은 형태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과거의 지위를 잃은 귀족들 역시 시한폭탄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기 영지에 대한 자치권은 잃었으나 여전히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법적으로 그 우월함이 보장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지에서의 권리를 잃자 왕의 권력에 기생하기 위해 앞다투어 수도로 몰려들었고, 궁정을 중심으로 이권을 둘러싼 음모와 암투를 벌였습니다. 절대군주제 하에서 왕은 귀족들의 권리를 보장해야 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래야만 이들의 음모가 서로를 겨냥하고 왕을 겨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재정이 튼튼하고 관료들이 유능할 때는 이권을 미끼로 한 이러한 이간책이 그럭저럭 잘 통하긴 했습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점은 이 귀족들이 봉건제의 지배구조(쌍무적 계약관계에 기초한 자기 영지에서의 절대적 권력과 왕에 대한 군사적 봉사)에서는 벗어나왔지만, 여전히 봉건제의 경제구조(농노가 영주 직영지에서 일정 시간 일하여 영주의 몫을 수확하고, 자기 땅에서 나온 수확량의 일정분을 소작료로 납부)에서는 벗어나오지 않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어찌보면 이 부분이 프랑스 혁명에 대한 전통주의적 해석과 수정주의적 해석을 역사학적으로 가르는 결정적인 포인트입니다. 당대 프랑스가 이미 근대에 접어드는 단계였는가, 아니면 여전히 중세의 사슬에 매여 있었는가 하는 점이죠. 수정주의자들은 이 당시 귀족들 역시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을 바탕으로 각종 사업이나 투기에 뛰어드는 등, 부르주아들과 별다를 것 없는 경제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프랑스 혁명을 단순한 정치사적 사건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이는 화폐를 가지고 농업 이외의 산업(상공업, 은행업 등)에 종사하는 것만으로 근대 자본주의의 카테고리에 넣을 수 있는지, 아니면 명백한 이중적 자유(신분으로부터의 자유와 굶어죽을 자유)를 가진 노동예비군이 사회에 풀려 나와야만 하는지를 둘러싼 논쟁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만약 전자만의 기준을 갖고 앙시앵 레짐을 자본주의라 칭한다면, 고대 아테네도 자본주의 사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중 구조는 프랑스 국가의 구성에 있어서도 드러납니다. 프랑스는 과거 자연국경 내에 존재하는 소규모 공국들과 제후국들을 통합한지 오래였지만, 비교적 최근에 통합된 지역들은 여전히 분리주의적 성향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국가의 주권에 의해 통치되는 것과 영주의 소유권에 의해 통치되는 것이 혼재되어, 반은 프랑스에 반은 신성로마제국에 속하는 촌락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선 사실상 외국과의 국경선이라는 개념도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으며, 누구도 왕의 권한이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에서 끝나는지 확실히 알지 못했습니다. 일부 자유시(市)들은 수백 년 전의 투항조약서를 꺼내어 프랑스 왕이 자신들의 도시 성벽 안에서 일개 귀족일 뿐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습니다. 명목상으로 프랑스는 루이 16세가 다스리는 하나의 왕국이었지만, 실질적으로 프랑스 신민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결국 중요한 점은 역사에는 언제나 복수의 범주에 속하는 특징들이 불균등하게 결합되어 나타나는 국면이 존재하며, 앙시앵 레짐 역시 그러한 시기였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더이상 창을 들고 말에 탄 채 토지를 지키는 무장 특권집단을 필요로 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오랫동안 지켜오던 토지는 계속 지켜져야 한다는 관성이 남아 있던 시기. 세상은 더이상 땅에 붙박힌 채 하루하루의 농사 이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노예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노예여 왔던 자들은 여전히 노예여도 이상할 것 없다는 관념이 남아 있던 시기. 세상은 이미 전통과 신분이 아닌 다른 곳에서 새로운 종류의 특권을 확보해 가는 자들을 낳고 있는데, 전통과 신분의 특권 자체는 그대로 법조문에 박혀 있던 시기. 바로 그것이 앙시앵 레짐입니다.
─혁명전야의 각 계급들
앙시앵 레짐이 그 마지막 숨을 쉬던 루이 16세의 치세 당시, 이 체제에서 서로 다른 법적 지위를 갖고 살아가던 사람들의 실상은 어땠을까요? 이 점에 대해 보다 자세히 살펴봅시다.
왕은 무능하고 비웃음받는 존재였습니다. 절대군주제의 이론과 정반대로, 실제 왕 루이 16세는 프랑스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 품위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래도 없는 뚱뚱한 사내의 유일한 낙은 밥 먹을 때와 사냥 나갈 때, 그리고 자물쇠 만드는 공방에 앉아 하릴없이 구경할 때 뿐이었습니다. 각료들은 회의 한가운데서 꾸벅꾸벅 졸기 일쑤인 왕에 대해 존경심을 코딱지만큼도 보이지 않았으며, 궁정 대기실에서 왕을 비판하거나 왕의 면전에서 급료 삭감에 대해 따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도시민들은 선술집에서 왕의 초상이 새겨진 돈을 잔돈으로 바꾸면서 "이 주정뱅이를 바꿔 주시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실제로 프랑스 혁명의 초기 단계에선, 왕이 과거처럼 말 위에 똑바로 앉아 칼을 휘두르며 군대를 이끌었다면 분명 달라졌을 시점이 몇 번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란 신묘하게도 한계에 다다른 체제로부터 결코 우연으로라도 우수한 지도자를 내주지 않습니다.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평판은 엉망이었습니다. 물론 이는 그녀가 프랑스의 오랜 적국인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점에 많은 부분 기인하지만, 그녀가 분명 당시 프랑스의 상황에 비추어 사치스러웠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녀의 사치는 절대군주제 전반의 기준으로 볼 때는 적은 편이었으나, 오히려 이는 당시 프랑스 재정이 그 이상의 사치를 도저히 허용할 수 없었다는 쪽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게다가 그녀는 활동적이고 여러 사교적 장에서 전면에 나서길 좋아했기 때문에, 성기능 장애를 의심받던 루이 16세의 처지와 종합되어 각종 음란한 추문들을 낳는 데 일조하기도 합니다. 한 예로, 협잡꾼이었던 라모트 백작부인이 루앙 추기경에게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비싼 목걸이를 사준다면 그녀와 하룻밤을 하게 해 주겠다는 사기를 칩니다. 그리고 루앙 추기경은 목걸이 대금을 치르고 왕비라고 그가 생각한 여성과 밀회를 하죠. 그러나 보석상에게 가야 했을 대금이 백작부인의 손에 들어가면서 보석상이 고소를 하고 이 사건이 백일하에 밝혀집니다. 루이 16세는 자신과 아내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당사자들을 고소하지만, 파리 고등법원은 라모트 백작부인에게 유죄, 루앙 추기경에게는 무죄를 선고합니다. 이는 왕비가 목걸이를 받고 하룻밤을 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것과 다름 없었죠.
궁정 주변에 모인 대귀족들은 그야말로 돈 먹는 기계, 밑 빠진 독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신분만을 통해서 법적으로 보장되는 수입으로 국가 예산의 4분의 1을 먹어 치웠습니다. 이들 가문의 차남 이하에게는 빠짐없이 전국 각지의 대수도원들이 주어졌습니다. 이들 가문이 프랑스 전체에서 차지하고 있는 영지는 혁명 이후 매각되었을 때 약 30억 리브르(1 리브르 = 약 14500원, 루이 15세 당시 금 시세 기준)로 정산되었습니다. 이렇게 돈을 많이 처먹으면서도 이들은 경제 관념이라곤 손톱만큼도 없어서, 로랑 공작 비롱은 21살의 나이에 10만 에뀌(1 에뀌 = 6 리브르)를 탕진하고 200만 에뀌의 빚을 졌습니다. 이러한 정신나간 소비는 대체로 궁정 생활에 딸려오는 사치─도박, 금실 의복, 마차, 사냥, 연회, 정부(情婦)에 대한 선물 등에 들어갔고, 이들의 빚도 결국은 국가 예산에 대한 부담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뻔뻔하게 야심에 가득차 있어서, 언젠가 왕으로부터 무소불위의 권력을 빼앗아 영국의 귀족들처럼 국정의 중심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법복귀족들─주요 관직에 오름으로써 작위를 얻은 신흥 귀족들은 대귀족들보다는 유능했지만, 그 유능함과 직책을 무기로 삼아 이내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흐름의 선봉에 서 있는 것은 바로 고등법원 판사들이었는데, 이들은 직위를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었고 수많은 소송 당사자들에게 수임료를 받아 거대한 재산을 축적했으며, 가장 중요하게는 왕의 칙령을 포함한 모든 국가의 행정명령이 이들의 장부에 기재되지 않는 한 효력을 발휘할 수 없는 막대한 권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출신이 비천하다는 이유로 궁정에 출입할 수 없었고 항시 대귀족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였는데, 루이 15세 시기부터 이미 이 갈등은 앞서 언급한 등재권을 통해 궁정의 사치를 규탄하고 대귀족들을 소환하여 신문함으로써 모욕하는 식의 보복을 낳고 있었죠. 왕이 각 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도록 내려보낸 지사들도 이와 마찬가지 상태가 되어, 이미 관료 조직은 왕의 수족이 아니라 귀족으로서의 일체감을 중심으로 독립해 가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지방에 남아 자신의 영지를 관리하는 시골의 소귀족들 역시 원한에 차 있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절대군주제가 그들로부터 명예와 권력을 빼앗아 갔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더 악랄하게 아직 가지고 있는 것, 즉 토지 소유권과 징세권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고 발악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귀족에 대한 선망과 질투로 가득찬 그들은 격차를 메꾸기 위해 중세 시대 때보다 더 악착같이 농민들을 쥐어짰습니다. 그들은 법에 정통한 변호사들을 선임하여 장원 저택 창고 한 구석에 먼지로 쌓여 방치되어 있는 수백 년 전의 법문서들을 발굴해 냈고, 지금 식으로 말하면 이미 사문화되었다 봐야 할 각종 조항들을 통해 쥐어짤 몫을 점점 늘려 갔습니다. 과거 가지고 있던 권력의 몇 안 되는 흔적 중 하나인 장원 재판소에서 농민들은 관습적으로 인정되어 오던 공유지 사용 권한, 이삭 줍기 권한, 구휼의 권한 등을 하나하나 빼앗겼습니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의 비참함을 목도한 변호사들은 나중에 혁명의 선봉에 서는 경우가 많이 생기는데, 가장 유명한 사례로 장원법 전문가였고 이후 최초의 공산주의자가 된 프랑수아 바뵈프(1760~1797)가 있습니다.
이러한 귀족들 밑에 새로이 떠오르는 계급, 부르주아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 이전의 한 세기 동안 눈부시게 발달한 상공업과, 이 상공업이 요구하는 각종 전문직을 중심으로 새로운 부와 가치를 창출하는 자신만만한 집단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무역량은 유럽 2위였고, 리옹에서 6만 5천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던 견직공업은 경쟁할 만한 대상조차 없었습니다. 상공업과 함께 은행업도 크게 발전하여 다양한 주식회사와 보험회사들을 낳았고, 증권거래소에선 각종 선물거래와 공채모집이 진행되었습니다. 혁명 직전 프랑스의 재무대신이었던 네케르는 프랑스가 유럽에서 통용되는 현금의 절반 가까이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몰라보게 발전하며 세상의 부를 끌어모으고 있던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의 능력에 걸맞는 지위를 갖지 못했고, 이것은 둘 사이의 격차가 커지면 커질수록, 다시 말해 부르주아들의 능력이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점점 더 거슬리는 것이 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귀족들은 이 불만에 찬 부르주아들을 험하게 다룸으로써 불만을 원한으로 바꾸고 있었습니다. 제헌의회 의원이었던 바르나브는 그의 어머니가 극장에서 앉아 있던 자리를 귀족에게 빼앗겼을 때 혁명가가 되었습니다. 맨 위에 썼던 로베스피에르의 일화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다리의 맨 밑바닥에, 인류 사회에서 단 한 번도 위로 올라가 본 적이 없는 짐승들, 노동자와 농민들이 존재했습니다. 물론 이 시기 근대적 의미의 노동자 계급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으며, 대체로 자기 가게를 가질 희망을 품은 소규모 수공업의 직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자기 고용주의 뜻에 따라 동원되기 일쑤였고, 동업조합 간의 사소한 언쟁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자신들의 임금이 물가와 같은 비율로 오르지 않는다는 점에 심심찮게 불만을 표출하곤 했습니다. 농민들의 처지는 그야말로 비참했는데, 중요한 것은 이들이 분명 과거보다 '가난해진' 것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당시 프랑스의 농업 생산량은 큰 폭으로 증가했으며, 감자를 비롯한 신대륙의 작물이 수입되면서 구황 역시 쉬워졌습니다(물론 당시 프랑스 농민들은 아직 감자 먹기를 꺼려했습니다). 고생하고 절약하면 땅 한 뙈기 정도는 자기 소유로 살 정도는 되었고, 고기와 설탕도 축제나 병 났을 때는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농촌귀족들의 수탈이 점점 더 가속화되면서 이들은 그 동안 당연한 것처럼 사용해 왔던 온갖 것에 돈을 내야 했고, 날이 갈수록 더 많은 것들을 빼앗기는 처지를 비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그들의 곁에는 사제와 지방 변호사들이 있었는데, 수도원장 따위가 될 가망성이 없는 평민 출신 사제들은 자신들의 가슴 속에 있는 뜨거운 분노를 담아 농민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못 가진 자들에게 있음을 설교했고, 지방 변호사들은 법정에서 농민들을 위한 집단 소송에 나서 주기도 했습니다. 이후 혁명의 전개 과정에서 농민들은 주로 이들과 함께 행동하게 됩니다.
─계몽사상의 확산
18세기에 볼테르, 달랑베르, 디드로 등을 통해 프랑스를 시끄럽게 만든 계몽사상은 세기말에 들어 전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행했던 계몽사상이 어떤 내용을 갖고 어떤 경로를 통해 확산되었는지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계몽사상의 핵심은 합리주의와 세속주의에 있습니다. 이 사상은 과거 신의 계시에 의해 정당화되던 각종 권위와 미신을 부정했으며, 오직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만 세상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를 위해 계몽사상가들은 자연과학부터 정치학에 이르는 넓은 범위의 논변을 펼쳤으며, 그 과정에서 왕과 교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타파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왕의 권력은 신이 내려준 것이 아니라 인간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며(사회계약론),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 역시 성경이나 계시를 통해서가 아니라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들리는 얘기들이지만, 전국민의 90% 이상이 독실한 가톨릭교도이면서 수백 년 간 교회의 설교단과 장원의 논밭에서 계시와 신분의 절대성을 교육받던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일래야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였습니다. 이러한 사상이 집결된 정수가 바로 1751년부터 1772년까지, 무수한 탄압을 극복하며 작성된 <백과전서>입니다.
이에 더해 프랑스 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텍스트가 또 있습니다. 영국에서 나온 로크의 <정부론>, 미국에서 나온 토마스 페인의 <상식>과 미 의회의 <독립선언문>, 그리고 프랑스에서 나온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과 <사회계약론>입니다.
로크의 저술은 무엇보다도 당시 선진적인 의회 체제를 갖추고 있던 영국의 선례와 결합되어 프랑스에 강한 영향을 미쳤습니다(다만 이 시기의 영국 의회를 민주주의라고 부르기엔 부족함이 많습니다). 특히 인간의 근원적 소유권에서 출발하여 자유의 생득성을 논한 로크의 논리는 많은 부르주아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근대 최초로 왕 없는 공화정을 수립한 미국의 케이스 역시 예비 혁명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다"라는 독립선언문 첫 문장이 프랑스 혁명에 의해 태어난 1789년 헌법 전문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사실은 유명합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고유성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저술은 누가 뭐래도 루소의 것임이 분명합니다.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통해 인간이 왜 날 때부터 평등할 수밖에 없는지, 또한 인간에게 있어 전쟁상태라는 것이 왜 본성적인 것일 수 없는지에 대해 상세히 논합니다. 특히 그는 기존의 사회계약론자들을 비판하며 그들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 논하면서도 문명의 발명품(미래에 대한 예측과 그에 따른 공포, 물건을 축적한다는 행위)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짐승에 가까운 인간 상태에서 공포나 소유욕 같은 정념은 (동물이 실제로 그렇듯이) 존재할 수 없으며, 단지 눈앞에 보이는 대상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위협과 투쟁을 피하는 겁쟁이 동물이며, 자유롭게 풍족한 과일나무를 오고 가는 떠돌이 동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참고로, 최근의 인류 선조에 대한 연구는 이 주장을 많은 부분 뒷받침해 줍니다).
이에 근거해 그는 <사회계약론>에서 매우 급진적인 주장을 펼칩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문명화됨과 함께 자연상태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 동물의 자유를 버리고 시민적 자유를 획득하고자 합니다. 이 과정에서 각 개인은 자신이 이전에 가졌던 모든 동물적 자유를 포기하고, 그 권리를 하나로 모음으로써 주권(sovereignty)을 형성합니다. 시민적 자유는 바로 부자유의 자유로서, 모두가 합의한 똑같은 규범을 받아들임으로써 모두가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역설적인 개념입니다(이러한 역설적 자유 개념은 이후 칸트에게로 계승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형성된 주권이란 분할 불가능하며(그는 이점에서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인민에게만 속하는 것으로 결코 누군가에 의해 대리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올바른 국가는 인민의 집회(assembly)를 통해서만 운영될 수 있으며, 행정관은 이 집회의 명령에 따르는 수족에 불과해야 한다고 봅니다.
루소의 이러한 사상은 프랑스 혁명을 근대의 정치혁명 중에서도 매우 독특한 것으로 만듭니다. 이후에 등장하는 자코뱅, 국민공회, 공포정치, 각종 정치/경제정책 모두에서 그 흔적을 엿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결합은 근대 유럽의 강력한 전통─인민주의적 전통을 형성하는 시발점이 됩니다.
이상과 같은 계몽사상이 18세기 말 프랑스에 확산되는 것은 이미 사회의 주도권이 부르주아들에게 넘어갔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입니다. 법학, 의학, 과학 등 다양한 전문지식을 통해 자기 사업에 뛰어들어야만 했던 부르주아들은 프랑스 각지에 형성된 콜레주(일종의 중등학교)를 통해 르네상스식 인문주의 교육의 세례를 받게 됩니다. 이 인문주의 교육은 르네상스가 그러했듯이 고대 로마의 전통을 학생들에게 일깨우고, 각종 수사법과 미의식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교육을 받은 부르주아들이 경제적·사회적으로 크게 성장하면서 이윽고 문화적인 지배력마저 장악하게 됩니다. 혁명 직전의 프랑스에서 이미 신앙심 깊은 활동은 '촌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고, 귀족들의 살롱에서 볼테르와 루소가 '교양'의 상징이 됩니다. 귀족 출신의 고위 사제들조차도 <백과전서>에 심취합니다. 귀족의 성에서 귀족계급에 대한 가장 대담한 풍자를 담고 있는 <피가로의 결혼>이 상연되고, 마리 앙투아네트 자신이 이 연극의 상연금지를 해제시킵니다. 로베스피에르가 변호사 생활 중 명성을 얻게 한 최초의 사건은 피뢰침이 신성모독이므로 철거하라고 명령한 지사에 대한 소송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확산을 더 부채질한 것은 바로 대귀족 계급의 야망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귀족들은 궁정의 할일 없는 한량으로 사는 데 좀이 쑤셔 했고, 많은 이 계급의 젊은이들이 모험과 명예를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들의 구미를 확 당기게 했던 사건이 바로 미국 독립전쟁으로, 프랑스가 미국을 도와 참전하기로 결정했을 때 많은 대귀족 출신 군인들이 이에 호응합니다. 그리고 미국의 독립 지도자들과 교류하며 이 참전용사들은 자유사상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방식으로 받아들여, 귀국 후 그 전도사가 됩니다. 그 대표격인 인물이 바로 라파예트(1757~1834)로서, 프랑스 혁명 초기에 아직 준비가 덜 된 부르주아들을 이끈 것은 대체로 이 계급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벼운 마음으로 계몽사상을 받아들이던 이들은, 바로 그 계몽사상이 대담하게 공격하는 미신과 종교가 구체제의 주춧돌이라는 사실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계몽사상이 선포하는 이성의 칼끝이 단순히 '촌스러운' 미신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왕좌를 쓰러뜨리고 신분제를 쓰러뜨린 후 부(富)의 특권을 쓰러뜨리기까지 돌진할 것이라는 예측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다만 그 대담함과 무례함 속에서 위트와 세련됨을 발견하며 한껏 취해 있었을 뿐입니다. 과연 그것이 백일하에 드러났을 때 그들은 과거의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이처럼 시대의 사이에 끼어 자기모순으로 가득찬 앙시앵 레짐은 고통 속에 온몸을 뒤틀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분명 발전하고 있었지만 자꾸 그 발전은 발목을 붙잡혔고, 구시대의 유물들이 살아 움직이면서 자신들을 몰아낼 새 시대의 향기에 매료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혁명은 가장 비참하고 배고프며 불의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더 나아지고 있는 것 같고 더 나아질 수 있을 것 같은데 계속 앞을 가로막히는 사회에서 발생합니다. 발전과 퇴보, 희망과 절망, 구시대와 신시대가 혼란스럽게 뒤섞여 교차하는 한가운데에서 혁명은 곧 다가올 때를 기다렸고, 얼마 안 있어 그 때는 마치 도둑처럼 찾아오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