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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대 주요 통계
게시물ID : history_2497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요들의유머
추천 : 5
조회수 : 1201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6/01/16 18:19:14
통계를 보면 결국 일제시대의 조선사람은 인간이 아니라
농사짓는 가축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쌀 : 년도 ( 생산량 ) (할당량 ) ( 공출량) 수탈비욜 단위 천섬

1940 ( 21, 527) ( 자료 없음) ( 9,208 ) 42.8%
1941 ( 24,886) ( 자료 없음 ) ( 11255) 45.2
1942 15,687 9,119 8,750) 55.8
1943 18,719 11,957 3,067 63.9
1944 16,051 10,541 9,634 60.0 (남긴 것이 아니라 가져간 것입니다.)


보리
1940 8,565 2,674 1,699
1941 7,306 2,853 1,329
1942 6,323 1,638 1,593
1943 8,142 3,221 3,067

박경식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 靑木서점 1973 p 193


조선쌀의 생산 수출 소비량

연도 생산 일본수출 1인당조선인 소비량일본인 단위 섬
1920 12708 1750 0.63 1.12
1921 14882 3080 0.67 1.15
1922 14324 3316 0.63 1.1
1923 15014 3624 0.65 1.15
1924 15174 4722 0.6 1.12
1925 13219 4619 0.52 1.13
1926 14773 5249 0.53 1.13
1927 15300 6136 0.52 1.09
1928 17298 7405 0.54 1.13
1929 13511 5,609 0.45 1.11
1930 13511 54256 0.45 1.08

자료 : 조선미곡요람


농가 구성비율

연도 지주 자작 자소작 소작
1916 2.5 20.1 40.6 36.8
1917 2.8 19.6 40.2 37.4
1918 3.4 19.6 39.3 37.7
1919 3.4 19.7 39.3 37.6
1920 3.3 19.5 37.4 39.8
1921 3.6 19.6 36.6 40.2
1922 3.7 19.7 35.8 41.6
1923 3.7 19.5 35.2 41.6
1924 3.8 19.5 34.5 42.2
1925 3.8 19.9 33.2 43.1
1926 3.8 19.1 32.5 43.4
1927 3.7 18.3 31.4 45.6
1928 3.7 18.3 32.0 44.9
1929 3.8 18.0 31.4 46.5
1930 3.6 17.6 31.0 46.5
1931 3.6 17.0 29.6 48.4
1932 3.5 16.3 25.4 52.7

조선총독부 농림국 조선소작년보 (화전민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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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vaa.go.kr/center/sub05/center05.asp

8.2.1. 허울좋은 자력갱생

1930년대의 우리 민족은 80%가 농촌거주자요 농민이었다. 그리고 그 80%가 소작이 아니면 자소작이었다. 토지를 잃고 식량마저 빼앗긴 농민들의 갈 곳은 만주가 아니면 일본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1910년대의 소위 토지조사사업으로 땅을 빼앗겼고 이어 1920년대의 소위 산미증식계획으로 쌀을 빼앗겼던 것이다. 일제측의 통계에 따르면 한 해에 생산된 쌀의 50%를 일본으로 이출移出(수탈을 그들은 이출이란 말로 호도하였다)하여 한국농민들은 제 손으로 생산한 쌀을 자기가 먹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보릿고개(춘궁기)만 오면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런 농민들을 향해 조선총독(육군대장) 우가키宇垣一成는 '자력갱생운동自力更生運動'을 벌였다. 이 운동은 조선총독을 두 차례나 거쳐간 해군대장 사이토齋藤實의 작품이었다. 그는 1932년 일본내각수상으로 영전하면서 '중대한 시국에 즈음하여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을 발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한국농민들에게 자력으로 갱생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사이토 자신도 잘 알고 있었듯이 한국농민들은 이미 타력으로도 갱생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었다.

당시의 한국 농민들의 연평균 쌀 생산량(1932~36년간)은 1천 7백만 2천섬이었는데 그 중에서 51%에 해당하는 8백 75만 7천 섬을 일본으로 가져 갔으니 무엇을 먹고 살란 말인가.

"수확기에 소작료 내고 빌려 먹은 식량 갚고 그리고 장리쌀 이자 내고 나면 남는 것은 쌀을 푸던 쪽박밖에 없다."(『조선년감』1940년)

이런 비참한 실정이고 보니 보릿고개에 절량농가絶糧農家가 총호수의 48.3%인 1백 25만 3천 호에 달했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흰 쌀밥 먹기란 꿈만 같은 일이었고 1년에 한두 번 쌀밥 떠놓고 제사 지내기도 어렵게 되었다.

문자 그대로 식민지 한국은 쌀을 기아 수출하고 있었다. 그 덕에 일본인들은 1년에 한 사람이 1.014섬의 쌀을 먹고 있었으나 한국인은 그 절반도 안되는 0.411섬을 먹고 나머지는 보리와 강냉이로 배를 채워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일본인들은 조선미라 하여 쌀까지 멸시하면서도 그 쌀밥을 즐겨 먹고 있었다. 이런 기아선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농민들은 나라를 등지고 낯선 만주로, 일본으로 떠났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혹독한 민족차별정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8.2.6. 근로보국대

일제는 1930년대에 줄곧 한국 쌀을 연간 1천만 섬에 가까운 양을 일본으로 수탈해 갔었는데 이 무렵의 연간 쌀 생산량이 1천 8백만 석 정도(지금은 3천 4백만 섬에 이른다)였다. 1천 8백만 석에서 1천만 석을 가져가고 8백만 석을 남겨준다는 사상 유례없는 식량강탈이 자행되었으니 천인이 공노할 강도행위였다.

1939년의 대흉작으로 이 해 쌀 생산이 1천 8백만 석에서 1천 4백만 석으로 4백만 석이나 감수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쌀 배급제도와 공출(供出)제도를 창안해 내어 강압적으로 쌀을 수탈하여 5백만 석을 일본으로 가져가는데 성공하였다.

모든 쌀의 자유판매를 금지하고 조선인 1인당 연간 6두를 배급하고 일본인에게는 1석 1두를 배급했다. 쌀은 우리나라 쌀인데 배급은 일본인들이 거의 배나 더 받아 먹고 한국인은 한 달에 겨우 5승을 주었으니 이러고서도 내선일체란 말인가 하는 원성이 일어났다.
 
한 달에 닷 되(5승升)라고 하면 하루에 1.6홉, 한끼에 반 홉밖에 안된다. 이런 배급량을 가지고서는 배를 채울 수 없으니까 만주산 콩깻묵을 수입해다가 먹으라고 했다. 이제 사람이 아니라 돼지가 된 것이다. 1943년에 가면 쌀 뿐만 아니라 보리·고사리까지 공출 대상이 되어 보리밥 조차 제대로 못 먹는 신세가 되었다. 일제는 교활하게도 공출미의 대가로 받는 돈에서 10%를 떼어 국방헌금인 헌납이니 하는 명목을 붙여 강제저축을 시켰다.

1939년은 또한 한국의 인력을 동원하여 국내는 물론 일본 만주, 그리고 멀리 남양으로까지 강제 송출하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이른바 근로보국대勤勞報國隊라는 이름으로 무고한 한국인을 강제동원하기 시작한 것은 1938년 6월이었는데 이때 발표된 시행령에 따르면 12세 이상 40세까지의 모든 남자를 끌고 간다는 것이었다. 먼저 학생들을 동원하고 이어 1939년에 이르러서는 전 국민에게 적용되어 만주로, 일본으로 강제 동원되었다. 이해 7월, 1백 30명의 근로보국대가 만주 연길延吉에서 집단노동을 강요당한 것을 비롯하여 수 많은 청년들이 고향을 버리고 이국땅으로 끌려간다.

두 달 후인 9월에는 보국청년대報國靑年隊라는 이름으로 일본 나라奈良·자하滋賀·미에三重 등 농촌에 끌려가 중국으로 출정하여 남자가 없는 일본농가에 머슴으로 들어가 40일간 강제 일손돕기운동을 벌이게 하였다. 또 이해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의 농가 50호가 이름도 생소한 남태평양의 파라오 군도로 끌려갔다. 소작농으로 팔려간 것이다.

일제는 이때 인구 2천 4백만의 조선으로부터 3백만 내지 4백만의 노무동원을 강행하려 하고 있었다. 만일 일본이 이같은 숫자의 노동임금을 계산해서 배생해야 한다고 할 때 그 이자까지를 합하면 일본 국고금을 털어도 모자랄 것이다.
 
 


8.2.7. 국방헌금의 강징

일본군은 당시 삼류급 군대에 지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변변한 전차 한 대, 전투기 한 대 없는 순전히 38식 소총을 든 보병부대가 전부인 그런 원시적인 군대였다. 이런 군대를 가지고서는 해외파병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인데 우연히 영국과 미국 두 나라의 지원을 받아 청일·러일 전쟁에 이긴 경험이 일본 군부를 미치게 만들었다. 덮어 놓고 '하면 된다'는 망상으로 인하여 뻔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자기 분수에 넘는 침략만행을 하게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일본군이 이미 중일전쟁의 초전에서 이길 수 없다는 예감이 물자부족에서 드러났다. 인력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물자가 어림도 없이 부족했던 것이며 보병들이 진흙탕에서 얽히고 설키며 싸우는 소모전에서는 전쟁물자가 한없이 필요하였다. 이 물자부족을 엉뚱한 식민지 한국에서 메우려 들어 가뜩이나 먹을 것도 없는 한국 농촌에서 먹고 마시는 그릇까지 빼앗아 갔으니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제 더 이상 가져갈 것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들은 먼저 국방헌금을 강요하였다. 이때 수탈품목은 부녀자들의 금비녀와 은비녀 그리고 금가락지등 귀금속들이었다. 만일 거리에서 금가락지를 끼고 다니는 여자가 발견되면 비국민非國民이라는 욕설을 퍼부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손가락을 잘라 버리라는 위협을 가했다.
금비녀나 금가락지가 없는 집에서는 폐품수집운동에 적극 호응해야만 했다. 이 폐품수집운동은 요즘의 쓰레기 줄이기 운동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써 축음기 바늘에서 세면대야·식칼·구두주걱 등 쇠붙이는 물론 지우개 같은 고무제품, 그리고 심지어는 누더기와 잡초까지 바치게 했다.

일본군에는 이때 기계화부대란 것이 없었고 모두가 무기와 탄약, 그리고 대포를 말이 끄는 수레에 실었다. 차 찌꺼기와 잡초를 헌납하도록 한 것은 이런 원시적인 견인마에 먹이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는 부엌의 놋그릇을 모조리 빼앗아갔다. 가뜩이나 쌀은 공출로 빼앗기고 만주산 콩깼묵을 받아 먹는 처지였는데 밥그릇까지 빼앗겨 바가지에 밥을 먹게 되었으니 처량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우리 나라 놋그릇은 임진왜란때 빼앗긴 도자기 대신에 만들어 써온 것이다. 그런데 그나마도 다시 왜놈들에게 빼앗기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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