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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한국은 서양 제국주의가 지배한 다른 식민지와 달리 농업 식민지로 고착되지 않고 1920년대 이후 공업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하는 특징을 보였다. 그것은 한국과 일본이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워 두 시장이 밀접히 통합된 가운데 일본의 과잉자본이 한국으로 건너와 공업에 투자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지배정책도 점차 공업화를 추진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근대경제의 논리를 이해하고 공장과 기업을 경영할 수 있는 한국인이 다수 생겨난 것도 공업화의 주요 조건이었다. 공업화양상은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하여 달랐다. 전쟁 이전에는 주로 대일 수출과 관련된 정미업, 제사업(製絲業) 등과 면방직업, 제당업, 고무공업 등의 소비재 공업이 발달하였다. 1920년대 말에는 북부지방의 장전강과 부전강에 있는 대규모 수력자원을 기반으로 일본에서 이동해온 비료생산의 화학공업이 발달하였다.
중일전쟁 후에는 국가정책에 따라 석탄액화(인조석유), 화약, 경금속, 제철공업, 기계공업 등의 중화학공업이 발달하였다. 일제가 건설한 중화학공업은 철광석, 석탄, 수력자원이 풍부한 북부지방, 특히 함남과 함북에 집중되었다. 공업화에 따라 산업구조가 점차 고도화되었다. 1910~1940년 총생산에서 1차산업인 농림어업의 비중이 71%에서 43%로 감소한 대신, 2차산업인 광공업의 비중이 8%에서 29%로, 3차 서비스산업의 비중이 21%에서 28%로 증가하였다. 전체적으로 식민지 한국의 연평균 총생산은 연평균 인구성장률 1.3%를 능가하는 3.6%의 성장률을 보였다. 식민지의 경제발전은 일본인과 일본 자본이 주도하였지만, 한국인과 한국인 자본이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인 상인과 기업가 중에는 경제환경의 변화에 잘 대응한 자들도 많았다. 한국인 공장의 수는 1910년대 초에 100개도 안 되었으나 1920년대 말에는 2,000개를 넘었고, 1930년대 말에는 다시4,000개를 넘었다. 전체 공장에서 한국인 공장의 비율은 1910년 초에 25%도 안 되던 것이 1930년대 말에는 60%를 넘었다.
한국인 공장은 대체로 종업원 50명 미만의 영세한 규모였다. 법인으로 등록된 회사자본 가운데 한국인 자본비중은 10% 정도에 불과하였다. 일본인 공장과 기업은 그 규모가 월등하였다. 그러나 불리한 여건에도 한국인 상공업자들은 공장을 건설하고 시장을 개척하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경성방직과 화신은 면방직업과 백화점 부문에서 일본인 기업과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평양 일대에서는 한국인 자본이 주도하는 양말․메리야스 공업과 고무신․신발 공업이 발달하였다.
교과서포럼, 『한국 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