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재선 한달 후 목포에 와 연설 -> 절대 3선은 안하겠다고 함!!
이때 많은 시민들에게 지지를 받음
그리고 공화당 내에서도 박정희가 3선을 안할 것으로 판단
JP계와 반JP계로 나뉨
박정희의 3선개헌 불가 천명
하지만 재선을 성공한 직후 이미 김형욱을 중심으로 3선개헌을 준비함
중앙정보부와 공화당-반JP계는 김종필을 견제하기 시작
김종필 측근부터 김종필까지 조사를 하며 심지어 가택수사를 한다
(제5공화국 JP가 노태우에게 한 대사: 중앙정보부장출신인 내가 박정희대통령 후임이란
지목을 받자 가택 수사를 제일 많이 당했어, 조심히 살게)
결국 JP는 공화당 의장에서 물러나 부산대 총장으로 조용히 있게 됨
-> 이는 박정희가 공화당 내에서 JP계를 제거하여 자신의 3선 개헌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개헌을 추진하기 위함
1969.1.3 입법부장 이효상이 대구에서 3선개헌에 대해 시사(법은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
-> 국민의 반응을 살피고자 함
1969.1.6과 기자회견을 통해 또 개헌의 가능성에 대해 시사
1.7일 기자회견 통해 3선개헌 의지 확인
1.10일 기자회견에서 박정희는 3선 개헌에 대해 본인은 개헌하고 싶지 않으나 꼭 필요하다면 연말에 이를 연말에 해도 늦지 않는다고 함
이에 야당에서 3선개헌을 하려는 것 아니냐고 대책회의
이미 이전에 유진산은 가튼벅과 대화에서 가튼벅이 1971년에 있을 대선에 이야기를 하면서 3선개헌에 어떻게 생각하냐면서 해야되지 않겠냐고 함(이때 유진산은 미국 공화당에게 로비가 있었음을 알아챔-미국과의 로비는 후에 김형욱에 의해 알려진 사실)
유진산은 그래서 야당 모두 개헌반대 운동을 하자고 함
1969.2.4 양순직의 집에서 생일잔치 겸 김종필계 인사들이 모임
(이미 JP계는 버려진 상태, 또한 이들은 5.16쿠데타때 나라를 위해 하자고 모였던 군인들
-> 정권을 잡고 독재하려던 박정희에게 불만이 있던 세력)
3선 개헌이 될 시 탈당을 해서 개헌을 막자고 함
하지만 4.8항명파동으로 JP계 제명(69.4.15)
그리고 JP를 외국으로 보내버림
이렇게 박정희는 공화당 내에서 3선개헌 반대세력을 제거
그렇다면 당시 사회는?
3선개헌의 움직임이 보이자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를 시작
이에 정부가 김영삼의원 테러
그러자 더욱 강해지는 3선개헌 반대 시위
무력진압과, 대학교 조기 방학으로 이를 무마시키려 한다
다시 국회로 돌아와 상황은 어떤지 보자
국화에서는 임시국회를 열어 공화당은 3선개헌을 통과시키려 한다
이에 야당은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표결을 반대한다
하지만 9.14.02:27 제6차 본회의를 공화당끼리 본회의장이 아닌 다른곳에서 열어
날치기 3선개헌을 표결하고 날치기 통과 함 (122명의 국회의원이 6분만에 투표 끝)
3선 개헌 후 3선개헌을 위해 더러운 짓을 담당해 온 중앙정보부장김형욱, 그는 개헌 통과 한달 후 바로 중정부장에서 물러나게 된다
(당시 박정희가 3선 개헌을 위해 한 부정행위들을 김형욱과 대통령 비서실장 이후락 선에서 마무리 짓고 그 둘을 물러나게 한 듯)
이후 1973.4 미국 망명 1977.6월에 미국회에서 박정희에대해 폭로한 후....닭모이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