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여느때와 다름없이 당번일을 하던 날이었다. 책의 대출&반납을 한창 해주고 있을 무렵,
친하진 않으나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친구 두 명이 빌릴 책과 대출증을 들고 카운터로 다가왔다. 내가 바코드를 찍는 도중
눈 돌릴 데가 없었는지 내 옆에 놓인 잡지로 눈이 간 두 명 중 한 명이,
잡지 1면에 크게 실린 "더빙판을 좋아하세요?" 라는 글귀를 소리내어서 읽었고 바로 그 옆에
외고에서 전학 온, 뭔가 착하긴 착한데 평소 행동거지가 살짝 재수없이 보여서 주변 애들의 미움을 잘 사곤 했던
애가 정색을 하며
"아니 더빙판 안 좋아해. 그런 걸 왜 들어? 원어로 듣는 게 제맛이지."
라고 말했다.
더빙판을 들으면, 우리나라 성우님들의 (하악하악) 보배로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평소 더빙판을 좋아하던 내겐
그것은 상당히 짜증나는 말이었다. 물론 원어로 듣는 것도 좋고 나도 그거 즐기는데, 더빙판도 나름의 맛이 있잖은가!
그 애는 외고에서 전학을 와서 급식실에서까지 영어책을 들고 밥을 먹으면서 공부를 하는가 하면, (인문계를 가장한 반실업계 학교인 우리학교 정서와는 도저히 맞지 않는 행동이었으므로 주변 애들은 꼴깝 턴다며 자주 욕을 하곤 했다. 나는 그렇게 신경은 안썼는데 적어도 밥을 먹을 땐 제발 한 가지만 해줬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다ㅎㅎ..) 자기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다가도 친구의 영어 발음이 오리지날 한국 발음이면 그것이 듣기 거북하다면서 친구의 영어 발음을 지적하며 마치 버터를 혀에 바른 듯한 자신의 발음을 몸소 보여주는 애였다. 그 애는 영어를 참 잘했고, 틈만 나면 일상 생활의 모든 것을 영어 혹은 외국 문물과 엮으려는 경향이 강했다. 그런 면이 너무 심해지면 가끔 우리나라 것을 까내리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 애의 그런 점은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뭐 발음 좋은 건 겁나 부럽다..! 영어 잘해서 부럽다..!!ㅠㅠㅜ 너의 그 엄청난 영어 실력은... 원어판을 들어서였니?!
나는 빌린 책을 건네주며
"그래^^ 원어판 많이 듣고 우리나라말 다 까먹어라ㅎㅎ"
라고 말할 뻔! 한 것을 꾹 참았다.
원어? 얼마든지 들어라! 나는 상관 않겠다!
대신 가만히 있는 멀쩡한 더빙을 까내리는 건 용서치 않겠다!
우리 성우님들도 먹고 살아야 될 거 아니냐고! 가뜩이나 이 불경기에!!ㅜ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