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어느 날 35세의 남성 송백권은 자신의 집 마당에 있는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온 9살 여자 어린이를 방 안으로 유인했다. 피가 철철 흐를 정도로 성폭행한 송백권은 “오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 말하면 너도 죽고 네 부모와 오빠도 다 죽는다”라고 위협했다. 소녀는 아랫배와 온몸이 너무 아프고 충격에 휩싸여 고통스러웠지만, 행여 부모님과 오빠에게 해가 갈까 봐 말없이 꾹 참았다.
하지만 청소년기에 이르러 그날의 치욕과 상처가 되살아났다. 불면증, 우울증, 대인기피증 등 각종 증상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견디다 못해 경찰을 찾은 소녀는 오히려 더 큰 충격에 빠져야 했다. “이미 고소기한과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가족의 강권으로 선을 보고 결혼했다가 잠자리를 거부한 탓에 이혼을 반복하며 상처는 더 깊어가기만 했다. 결국 가족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가해자 송백권이 운영하는 가게를 찾아가고 또 찾아갔다. 계속 분노의 절규를 쏟아내자 송백권이 애매모호한 인정을 하며 “다 지난 일인데, 난 기억에도 없고, 상처를 입었다면 미안하다. 앞으로가 더 중요한 것 아닌가?”라며 돈을 주고 합의해 무마하려 했다. 가족은 일단 병부터 고치자며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하지만, ‘치료가 가능한 병’이 아니었다. 밤마다 9살 때 겪은 충격과 공포가 채권추심원처럼 찾아왔다. 다시 송백권을 찾았다. “돈은 다 받아먹고 또 왜 난리야? 돈을 더 달라는 거냐?”며 오히려 고함을 질렀다. 소녀 모르게 가족 중 누군가가 40만원을 받고 ‘합의’를 해주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소녀는 불면의 밤을 지내며 도저히 하루하루를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1991년 1월30일, 칼 두 자루를 든 채 송백권을 찾아 살해했다. 현장에서 경찰에 체포된 소녀는 “나는 사람이 아닌 짐승을 죽였다”고 주장했다.
그해 8월14일,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폭로하고 자세한 증언을 하는 공개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후 피해자들의 폭로와 증언이 이어지면서 국제사회의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8월14일은 ‘제1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독일 참가자의 제안에 의해 ‘세계 위안부의 날’로 정해졌다. 이제 생존 위안부 피해자는 46분밖에 남지 않았다. 그동안 가해자인 일본 정부와 언론은 지속적으로 가해 사실을 부인하거나 ‘자발적인 성매매’라며 피해를 부정하고 피해자들을 모욕하는 망언들을 쏟아냈다.
그런데, 2015년 12월28일 대한민국 정부는 “10억엔의 치유사업지원기금 지급, 외교장관이 대신 읽은 총리의 사과”를 받은 대가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합의를 해주었다. 같은 시간, 일본을 대표하는 왕실이나 총리는 이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자신의 일정을 소화했고, 총리의 부인은 군 위안부 징집 가해자들의 위패가 포함된 야스쿠니신사에서 공개적이며 공식적인 참배 행사를 가졌다. 총리의 사과문을 대신 읽었던 일본 외무상은 돌아서자마자 “일본 정부가 잃은 것은 10억엔뿐”, “법적 책임은 이미 1965년 협정으로 모두 끝났다는 것을 재확인하며, 다만 도의적 책임을 진다는 것이고, 이번 협정으로 책임 문제에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종지부를 찍은 것”, “이제 소녀상이 이전되는 것으로 안다”는 ‘한일협정의 의미’에 대한 해석을 잇따라 내놨다. 반면, 한국 정부는 “처음으로 정부의 공식 사과를 받아냈다. 이제 한·일 관계 정상화로 막대한 안보, 경제적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라며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다.
이 모든 논란의 당사자인 ‘위안부 피해자들’은 분노하고 있다. 마치, 1991년 송백권을 칼로 찌른 ‘소녀’처럼. 2015년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40만원’을 받고 소녀의 성폭행 피해 문제 책임에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종지부’를 찍은 가족 같은 모습이다. 대한민국 정부, 이래도 되는가? 소녀상은 손끝 하나 건드리지 말라.
<표창원 | 범죄과학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