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래 저 '전태일 평전'에서 발췌
데모라는 것은 ‘보여준다’, ‘과시한다’를 뜻하는 영어 ‘데몬스트레이션(demonstration)’의 준말이다. 이것은 우리말로는 시위라고 번역하는데, 이 시위라는 말이 오히려 데모의 본 뜻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즉, 위세·위력을 보여줌으로써 겁을 준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떨게 한다. 그리함으로 이쪽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도록 강박한다는 것이 데모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데모라는 것은 진정이니 호소니 청원이니 건의니 하는 따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엉터리 비폭력주의자들이 무엇이라고 말하건 간에 데모란 상대편의 양심이나 자비심이나 동정심을 구걸하는 행위가 아니라, 이쪽 편의 실력(그것이 선거에서 투표권이든, 적나라한 폭력이든, 사회여론에 대한 영향력이든 간에)을 배경으로 한 상대편에 대한 압력인 것이다. “제발 이렇게 해주십시오” 하는 것이 데모가 아니라, “이런데로 네가 말을 안 듣고 배기겠느냐?” 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데모이다.
그러므로 ‘데모’란 상대편에 대한 대항하는 자의 당당한 선전포고이며, 요구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끊임없이, 갈수록 더욱 격렬하게, 위협적인 도전을 감행하겠다는 경고이다.
왜 억압자들은 그들이 말하듯 ‘일부 극소수’에 불과한 수백 명의 학생들 혹은 수십 명의 노동자들이 맨손으로 하는 데모를 그렇듯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것을 까닭이 있다. 한 개의 조약돌이 잔잔한 수면에 수백, 수천 개의 파문을 아로새기듯, 한 개비의 성냥이 산더미 같이 쌓인 화약고를 모두 폭파시키듯 데모에 나서는 이들 ‘일부 극소수’는 수십만, 수백만의 고통받아온 가슴에 부한한 격동을 일으킨다.
억압자에 대한 오랜 굴종을 벗어던지고 1 대 1의 당당한 선전포고를 알리는 데모 행렬의 진군의 북소리는 일상생활의 비굴에 잠겨 있던 모든 민중의 피를 끓게 한다. 그들의 북소리는 일상생활의 비굴에 잠겨 있던 모든 민중의 피를 끓게 한다. 그들의 북소리는 착취와 억압이 심하면 심할수록, 강요된 민중의 침묵이 오래되고 굳은 것이면 굳은 것일수록 더욱 크게 울려온다. 그리하여 억압자의 깊은 죄의식으로 신경과민이 된 귀에는, 그것은 자신의 종말을 알라는 불길한 ‘조종’ 소리로 들려온다. 억압자가 수백 명의 평화적인 시위 행렬을 탄압하기 위해 광분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의 요구조건을 수락하는 양보를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역사상의 모든 억압자들의 ‘양보’, 민권의 ‘평화적’인 승리란 본질적으로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출처 | 조영래 저 '전태일 평전' p.275-27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