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래 저 '전태일 평전'에서 발췌.
누가 바보이며 누가 바보가 아닌가? 우리 사회에서 ‘똑똑한 사람’이란 어던 사람을 뜻하는가? 남의 등을 밟고 올라서는 사람, 남의 피땀의 성과를 가로채는 라마, 남을 속이며 남한테는 절대로 속지 않는 사람,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남에게 손해를 끼치며 남으로부터는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는 사람, 그리하여 돈을 벌든지 권력을 잡든지 하여간에 ‘출세’를 해서 세상 사람들의 찬탄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명예롭게 ’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 사람들이다.
이런 ‘똑똑한 사람’ 말고 또 한 부류의 ‘약은 사람’, ‘현명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현실과 타협’할 줄 알고 ‘현실에 적응’할 줄 아는, 이른바 처ㅇ세에 능한 사람들이다. 강자에게 절대로 저항하지 아니하고, 어떤 부당한 취급을 당하더라도 고분고분 고개 숙이고 받아들이며, 반대로 약자 앞에서는 허리를 뻣뻣이 펴고 헛기침을 한다는 것이 그들의 처세 철학 제1조이다. 그들의 사전에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나 강한 자에 대한 저항이라는 마링 ㅇ벗다. 일제 35년의 억압과 지배의 현실, 해방 이후의 정치적 격동, 그리고 6·25의 혼란을 몸으로 겪으면서 살아남았던 기성세대는 이러한 비굴한 처세철학을 뼛속까지 익힌 ‘현명한 사람들’로 가득 메워져 있다. 세상의 부모들은 자기 자식에게 ‘잘난 사람’이 될 것까지는 기대할 수 없어도 최소한 이러한 ‘약은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고 그렇게 가르친다. 그분인가? 강자들이 판을 치는 모든 사회기구가 한결같이 새로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르치는 것은 ‘적응’, ‘타협’, ‘겸손’, ‘순종’, ‘온건’ 등등의 ‘미덕’이다.
적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 당연한 삶의 요결(要訣), 전혀 의심할 여지없는 공리처럼 되어 있다. 이럴 때부터 우리가 부모, 선배, 교사, 라디오, TV, 영화, 고명한 학자, 승려, 정치인 등등의 모든 권위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되풀이해 들어온, 이 그럴 듯한 추상적 명제를 한 꺼풀만 벗겨놓고 보면 그것은 어떠한 현실에건 저항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는, 쓸개를 빼놓고 살아야 한다는, 거세된 노예가 되기를 강요하는 실로 무서운 주문(呪文)인 것이다.
흔히들 아무개는 군대에 갔다오더니 ‘사람 다 되어서 왔다’고 하는 말들을 한다. 군대가 사람 만드는 곳이다. 군대에 갔다오면 사회에 적응할 줄 아는 인간이 된다고 하는, 우리가 수없이 듣는 이 말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철저한 상명하복(上命下服), “×로 밤송이 까라면 깠지 무슨 이유가 필요하냐?”는 식의 어떠한 불합리하고 비인간적인 명령이라도 아무 이의 없이 지켜져야만 하는 숨 막히는 계급사회, 인간적인 존엄이니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것은 한 방울도 찾아볼 수 없는 이 호령과 기합과 ‘빳다 방망이’의 세계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바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하고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를 뼛속 갚이 깨달아 겸손(?)해진 인간, 강자의 지배에 도전하거나 저항하거나 이의를 내세운다는 것이 ‘달걀로 바윗덩어리를 치는’ 것처럼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철저히 터득하여 온순해진 지각 있는(?) 인간, 그러한 인간이 군대로부터 만들어져 나온다는 것을 뜻한다. 바로 이것이 ‘적응 할 줄 아는 인간’의 정체이다.
사회는 이러한 인간을 여러 가지 그럴 듯한 표현을 써서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미화한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설교는 대표적인 예의 하나이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ㄴ사람”이란 물론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참된 인간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공헌하고 봉사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회사원의 경우는 사장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곧 그것이다. 노동자의 경우는 기업주가 필요로 하는 일 잘하고 말 잘 듣고 부지런한 사람이 바로 그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지배하고 명령하는 강자의 이익에 가장 잘 봉사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강자의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그것은 하나의 존엄하고 독립된 주체적 인간으로 모든 내면적 욕구와 의지와 희망의 충족을 포기하고 강자를 위한 나나의 도구·기능·노동력으로 전략해버린 인간상이며, 또 그 참혹한 전락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인간상이다. “권리보다는 의무를, 자유보다는 책임을” 숭상하라고 하는 요구는 바로 이러한 인간을 만들어 내기 위한 그들의 비장의 주문이다.
출처 | 조영래 저 '전태일 평전' p.153-1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