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03870 표절전문가 배성인 학단협 운영위원장 분석... "오류까지 베껴" 문제가 된 '김성수의 광복 직전 동향' 글의 분량은 모두 14줄
다음은 장 연구원이 교학사 교과서에 실린 김성수 관련 서술 전문(위 내용)에 번호를 붙여 위키백과 서술(아래 내용)을 비교한 것임
①1940년 8월 일제가 동아일보를 강제 폐간시키자, 사주인 김성수는 고향으로 돌아가 광복 때까지 은거하였다. ①1940년 8월 10일 일제가 동아일보를 강제 폐간시키자, 김성수는 고향으로 돌아가 1945년 8·15 광복 때까지 칩거, 은거하였다. ②일제로부터 창씨개명을 강요당하였으나 거절하였고, ②일제로부터 창씨개명을 강요당하였으나 거절하였다. ③일제가 주는 작위도 거절하였다. ③일제가 주는 작위 역시 거절하였다. ④그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보고 일본이 패망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④없음. ⑤이승만이 하는 '미국의 소리' 단파 방송을 송진우, 장택상 등과 함께 비밀리에 청취하기도 하였다. ⑤ 이승만이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에 출연하자, 송진우, 여운형, 안재홍, 장택상, 윤치영 등과 함께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비밀리에 청취하기도 했다. ⑥학생들의 창씨개명 거부와 학도병 징집 거부가 이어지자, 보성 전문학교장인 그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대로 행동하라며 창씨개명 거부와 징집 회피 및 거부를 방관하였다. ⑥학생들의 창씨개명 거부와 학도병 징집 거부가 이어졌다. 그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대로 행동하라며 이들의 창씨 거부와 학도병 징집 회피, 징집 거부를 방관하였다. ⑦ 그러나 1943년 총독부 기관지라고 할 수 있는 매일신보 사설란에 김성수 명의로 징병에 찬성하는 '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기풍 조장하라'는 글이 실렸다. 물론 이 글은 매일신보의 김병규 기자가 명의를 도용하여 쓴 것이라고 하는데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⑦ 1943년 8월 5일자 매일신보 사설란에 인촌 김성수 명의로 게재된 글. 그러나 이는 매일신보 기자 김병규가 벌인 명의도용 등 관련해 진위여부를 놓고 논란의 여지가 있다.(사진 설명) ⑧김성수는 1942년 이후 요시찰 인물 2등급으로 분류되어 감시와 내사를 당했고, ⑧1942년 이후 그는 요시찰인물 2급으로 분류되어 감시와 내사를 당했다. ⑨보성 전문학교는 1944년 4월 '경성 척식 경제 전문학교'로 격하 당하였다. ⑨1944년 4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강제로 격하 당하였으나, 1945년 9월 광복을 맞아 보성전문학교로 교명을 환원하였다. ⑩그리고 1944년 7월에는 강압에 의해 일본 총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한다. ⑩1944년 7월 22일 일본 총리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⑪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여 항복하고 아베 총독이 치안권 이양을 송진우에게 제시하였으나, 송진우는 거부 의사를 알려왔고 김성수도 이에 동의하였다고 한다. ⑪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여 항복하고 총독부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치안권 이양을 송진우에게 제시하였으나, 송진우는 거부의사를 알려왔고 김성수도 이에 동의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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