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말씀님께서 뜻모를 선문답만 하시기에, 참 더 이야기 하기 뭐해서 손털고 나왔습니다만 여전히 돌아가는 이야기를 보니 답답해보여 댓글과 크게 다르지 아니하나 몇글자 남겨봅니다.
1.
아주 기초적인 이야기인데,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을 삼은 국가입니다.
유교라는 것은 여러가지 세부 분류? 로 나뉘어지지만 그 이념을 간략히 설명해 보자면 수기치인 즉 내 안의 도덕성을 갈고 닦으며 사람을 다스리는 것을 골자로 합니다.
왜 보고를 올릴때 민심을 언급했는지를 문제 삼는 것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통치 이념을 부정하는 거랑 같은 말입니다.
이 기초적인 문제를 이해 못하시면 더 이야기를 진행할수가 없지요,
2.
왜구에 대한 전략의 기본은 육전입니다, 조선이나 명이나 아니 그 이전의 왕조들로부터 줄곧 그러한 방침을 고수해 온 까닭은, 본디 왜구는 기동성이 탁월한데다, 현재는 레이더와 통신 시설의 발달 등으로 해역의 감시가 매우 수월하나 고대의 해역 감시는 그러지 못하였기에 상륙한 왜구를 처리하는게 보통이고, 해전을 한다 할지라도 육지에서 격멸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따라서 조선이 왜구에 대한 대비책으로 수군에 대한 투자를 안했던 것을 문제시 삼는것은 매우 억지스러운 이야기라고 할수 있습니다.
3.
임진왜란 이전에 을묘왜변이라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명종..10년? 인가에 해남군을 시작으로 영암, 진도, 강진에 왜선 60여척을 타고 왜구가 침입하여 10여개의 진이 함락되고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불러온 대규모 사태였습니다.
이 한달 남짓한 소요 사태는 조선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이전 까지와는 전혀 다른 정말 정규군간의 교전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 습격이었고, 비록 조선군이 쇠락하였다고는 하나 저 왜구 따위에게 무려 10여개의 진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것을 상상을 할수도 없던 일이니 말입니다.
때문에 조선에서는 판옥선을 개발하고 비변사를 상설기관으로 세우는 등 군비 증강을 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에 따른 문제도 상당했습니다,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지역이 아닌 곳들의 백성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기도 어려웠기에 지방관이 문제점으로 거론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다만 주의해야할점은 이러한 대비가 국가 대 국가의 정규전을 상정한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구라는 것은 본디 도적과 같은 무리로서 그 기동성을 최대의 장기로 삼는 이들이었고, 임진년 이전에 단 한차례도 일본과 국가간의 전쟁을 치룬 적이 없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바라보는 준동 역시 이것의 이상을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조선의 주적은 왜구가 아니라 여진입니다, 즉 최전방은 북방이라는 소리인데, 그나마도 여진은 크게 문제가 될 이 들도 아니었지요,
4.
군정의 문란은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진관 체제라는 기존의 군사 체제를 유지할수 없게되어 제승방략체제라는 새로운 체제를 고안해야 했으니 말입니다, 이 말은 정병의 정족수를 도저히 채울수 없기에 기존의 진들을 유지하는 것 조차 불가능한 상황에 봉착했다는 말로서 정규군의 기능이 상당수 상실되었다는 말과 일치합니다.
더욱이 그 양은 둘째치고 향리 관노 역을 지지 않는 백성을 비릇한 공사천을 불문하고 남성을 끌어모은 잡색군의 문제점과 결부되어 심각한 수준의 질적 문제점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5.
정여립의 난과 기축 옥사로 이미 민심은 악화 일로 였으며 조정 역시 아수라 장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봐야 합니다,
비단 뭔가 사태가 왜구의 준동 이상으로 사태가 흐를 기미가 보이자 성곽의 정비와 군수 물자의 축적 그리고 인사 이동등 갖가지 대비책을 돌리고 있었으나, 기간이 너무나 짧았던 것은 둘째치고 김성일과 황윤길로 대표되는 통신사의 엇갈리는 보고는 조정에서는 주도권을 잡기위한 논쟁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는 것에서 볼수 있듯이 권력 다툼의 열기는 식을줄을 몰랐으며 지방관이 탄핵되는 것에서 볼수 있듯이 각지에서 민심은 끔찍할 정도로 들끓었습니다.
상기에서 볼수 있듯이 김성일이 오판을 한것은 잘못이나 임진왜란이라는 사태가 이 김성일이라는 인물 하나를 두고 문제를 삼을 이야기도 아니고 조선이 손을 놓고 있었다는 것도 틀린이야기입니다.
6.
사족이지만 이러한 군비 증강과 대비의 결과물은 다름 아닌 의병입니다, 대개의 군수물자를 비릇하여 구성 체제를 보자면 제승 방략의 그것에서 지휘관이 중앙의 지휘관이 아니라 지방의 식자층일따름으로 결코 군비 증강이 허투루 쓰이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즉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다, 라는 것은 틀렸다는 것을 말해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군정의 문란에 따른 폐해는 매우 극복하기 어려운 일이라고는 하나 도저히 커버를 칠수도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