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사 역사교과서 논란.. 반민특위 구속 친일 기업인 '민족자본가'로 미화해 기술
http://m.media.daum.net/m/media/society/newsview/20130902060509744?RIGHT_REPLY=R5 뉴라이트 성향 학자들이 주도한 교학사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축소·왜곡 기술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파장이 일고 있다. 일제강점기 친일인사들의 행적도 감추거나, 역사에 도움이 된 것처럼 합리화하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다. 5·16 군사쿠데타와 한일협정을 미화했다는 우편향 교과서의 논란(경향신문 8월31일자 1·8면 보도)이 '친일' 문제로까지 번지고 있는 것이다.
교학사 교과서는 위안부 문제는 기존 교과서들과 달리 짤막하게 서술했다. 기존 교과서와 역사학계에서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가 국가총동원령을 내리면서 전쟁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마음대로 동원했고 위안부들을 속이거나 강제로 전쟁터에 끌고 갔다는 것이 정설이다. 1942~1944년 사이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으로 일했던 조선인의 일기에서도 그 당시 이미 '4차 모집단'이 일하고 있었다고 서술한다. 위안부 모집이 그전부터 대규모로 이뤄져왔다는 뜻이다.
그러나 교학사 교과서는 1944년 여자정신근로령 발표 이후 위안부가 동원됐다는 식으로 혼동을 줄 수 있는 표현을 사용했다.
다른 교과서들에선 연도를 명시하지 않았더라도 할머니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면서 일제의 위안부 동원이 1944년 이전부터 조직적으로 이뤄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17세에 여공을 뽑는다는 말에 속아 중국 상하이 등에서 3년간 위안부 생활을 강요받다가 1940년 한 병사의 도움으로 간신히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김순덕 할머니 이야기가 소개된 것도 그런 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기록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과 실태에서도 일본군의 위안부 모집은 1930년대부터 전국에서 시작돼 태평양전쟁이 발화하면서 본격화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교학사 교과서의 검정 통과를 두고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시민단체들의 문제제기와 반발도 예상되고 있다.
다른 교과서들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수요시위 사진이나 일본 정부의 태도 등에 많게는 한 페이지를 할애하거나 관련한 학습과제를 제시했지만, 교학사 교과서는 분량·내용 모두 현저히 짧게 다뤘다.
이신철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교수는 "사실 일본의 고등학교 교과서 상당수에서 조선과 네덜란드, 필리핀 등의 위안부 피해까지 서술하고 있다"면서 "분량상으로도 일본 교과서가 오히려 교학사 교과서보다 훨씬 더 많이 다루고 있다"고 지적했다.
친일행적을 숨기는 듯한 서술도 도마에 오르고 있다.
교학사 교과서는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기업인 집단을 대한민국 자본주의 성장의 주역으로 그렸다. 그들의 친일행적은 감췄다.
가령 화신백화점이나 경성방직의 경우 철저하게 친일자본이고, 기업인들은 해방 이후 반민특위에 구속됐을 만큼 친일행위자로 지목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교학사 교과서는 이들 기업과 기업가들이 마치 민족자본으로서 일본자본과 경쟁했던 것처럼 쓰고 있다.
한국인들이 시간 사용의 합리화를 일제로부터 강요받았다는 대목도 나온다. 그 예로는 양력 사용과 함께 약속시간을 지킬 것,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것 등을 강요했다는 것을 들었다. 마치 한국인들이 시간을 비합리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전제로, 일본인들이 들어와서 근대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줬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어 논란이 된다. 이른바 일제강점기에 한국의 근대화가 촉진됐다는 '일제 근대화' 사관의 일면으로도 비칠 수 있다.
주진오 상명대 교수는 "이 교과서는 한국에서 허용할 수 있는 학문적 범위를 넘어섰다고 본다"면서 "아무리 학문적 자유가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역사교과서에서 식민지의 긍정적인 모습과 친일이 옹호되는 내용이 들어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민족사적 입장에서도 허용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