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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18 글 댓글 보고: 역사에서 보편 윤리에 따른 판단은..
게시물ID : history_1145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울리비
추천 : 1
조회수 : 513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3/09/01 21:07:49
http://todayhumor.com/?history_11418 11418번 <모든 역사는 왜곡된 역사이다.>에서 랑랄라 님과 한솥매니아 님의 댓글 논의를 보고 궁금해져서 쓴 글입니다. 그 글에 댓글을 달아서 그 두 분께 여쭤볼까 생각도 했는데, 그 게시물에서 논의는 끝난 지 오래고 다른 분들의 고견도 들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따로 글을 썼어요.
제가 역사학과는 거의 인연이 없었고, 철학 관련 전공에 윤리학이 주된 관심 분야라 가치판단, 도덕판단을 잘 내리는 습관이 들어서, 역사학에 대해 크게 오해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두렵네요 ㅎㅎ
 
정말 역사학에서 보편 윤리에 따른 판단이란 별 의미가 없는 걸까요? 그럼 보편 윤리의 관점에서 보는 '역사의 발전 방향' 같은 것도 설정할 수 없는 것일까요?
꼭 마르크스주의 역사발전론 같은 게 아니더라도, 랑랄라 님께서 말씀하신 '인간존중' '인간자유에 대한 옹호' '민주주의에 대한 신망' 등 말이죠.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존엄하다'는 대전제를 깔고 인간의 생존, 자유 같은 보편적 인권이 확대되는 과정을 역사 발전의 과정으로 보는 것도 불가능한 걸까요?
예를 들어, 우리나라가 1945년 8월 15일에 독립한 것을 우리는 굉장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역사적 사건으로 생각하죠. 그건 단지 민족이 독립했다는 의의를 넘어, 민족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인정하는 '압제로부터의 해방, 자유의 회복' 때문이잖아요. 설령 역사를 인과적 과정을 파악하는 실증적인 것으로만 보더라도, 우리가 광복을 중요한 사건으로 생각하는 건 그 광복이 자유의 회복이기에 가치 있다는 가치판단 때문이지 않습니까. 다른 예로는 뭘 시도해보기도 전에 밀고당해서 실패한 '만적의 난'을 최초의 노비반란으로 중요하게 다룬다든지요.
 
한솥매니아 님께서 5. 18 폭동론의 논거가 되는 국가와 민족의 가치, 침묵하는 다수의 가치, 제도적 안정성의 가치 등도 보편 윤리라고 말씀하시고, 보편 윤리의 관점에서 봐도 해석이 갈린다고 하셨습니다. 이건 한 사건에 여러 측면이 있기에 해석이 갈린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제도적 안정성이라는 기준에서 본다면, 현재 권력을 잡은 정권에 대항해 비합법적인 무장 투쟁이 벌어졌기에 아무튼 제도적 안정성을 뒤흔들고, 제도적 안정성이 흔들리면 국민의 안전과 행복과 권리가 위태로워지기에, 5. 18을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죠. 이건 5. 18이라는 사건에서 비합법적인 무장 투쟁이라는 과정 측면을 본 것입니다.
반면에 이런 5. 18 옹호론도 있을 수 있죠. 비합법적인 무장 투쟁이 기본적으로 제도적 안정성을 흔드는 것이기에 무분별하게 허용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제도적 안정성이란 국민의 안전과 행복과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고, 전두환 정권은 비민주적 쿠데타로 집권했기에 그에 저항해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한 것이라면, 비합법적 무장 투쟁이라도 본래 제도가 목표로 해야 했던 국민의 안전과 행복과 권리를 되찾아 제대로 보장하기 위한 '저항권'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건 5. 18을 당시 정권의 성격과 투쟁의 목적이라는 측면에서 본 것입니다.
이런 해석 차이는 비합법적 무장 투쟁은 그 자체로는 위험하고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 정부가 정당하지 않을 때 국민에게 저항할 권리가 있다는 것, 이 두 명제에 양측이 보편 윤리의 관점에서 동의하면서도 생길 수 있는 차이죠. 비합법적 무장 투쟁이라는 과정 자체를 중점적으로 보아서 저항권이 그 정도까지는 인정될 수 없다는 부정론과, 투쟁의 목적을 중점적으로 봐서 그 정도의 저항권까지도 인정돼야 한다는 긍정론으로요. 이건 종합적으로 봐서 어느 측면에 더 중점을 둘 건가 문제지, 각 측면에서는 보편 윤리적 관점의 정답이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프랑스 대혁명에서 1794년 7월 27일(혁명력 2년 테르미도르 9일)에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하던 자코뱅파가 실각한 사건, 테르미도르 반동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공포정치가 대내외적 위기 상황에서 불가피했다든가 하는 쉴드도 있지만, 아무튼 그 자체로 보았을 때 폭력적이고 자유를 억압했다는 것에는 이의가 별로 없죠? 그래서 테르미도르 반동이 적어도 정부의 공식적 테러를 끝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왕당파가 자코뱅파를 공격하는 백색 테러가 파리나 지방에서 일어났고, 탈리앙, 프레롱, 바라스 등 정부 유력 인사들이 그들을 지원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정부의 공식적 공포정치는 없었어요.)
그런데 보통선거를 규정하는 등 정치적 자유의 평등을 폭넓게 보장하고 사회경제적 생활 보장도 규정한 1793년 자코뱅 헌법이 폐기되고, 재산에 따른 제한선거를 규정하고 저항권, 국민주권, 무죄추정의 원칙, 표현의 자유, 공공 부조권 등 사회경제적 생활 보장 등 혁명의 주요 성취물이 사라진 1795년 헌법이 제정되었습니다.(출처는 최갑수 교수 강좌) 이 때문에 파리 하층 민중들이 93년 헌법을 지키라며 두 차례 봉기했지만 진압당했죠. 하층민의 정치 참여 역시 전보다 더 제한되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테르미도르 9일의 사건이 반혁명, 반동으로 불리는 것이죠.
공포정치의 공식적 폭력이 끝났다는 면에서는 보편적 인권이 향상된 것이지만, 정부의 방향성이 인권을 제한적으로 천명하는 방향으로 갔다는 면에서는 보편적 인권이 퇴보한 것이지요. 이 중 어느 쪽을 더 부각시키느냐에 따라 테르미도르 쿠데타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겠지만, 보편 윤리의 관점에서 두 측면 각각에 대한 평가는 일관되게 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11418번 <모든 역사는 왜곡된 역사이다.>에서 한솥매니아 님께서 헤겔의 <역사철학강의> 서론을 실증주의를 드러내는 문장으로 인용하셨죠. "그러나 경험과 역사가 가르쳐 주는 것은, 각 인민과 정부는 역사에서 무엇을 배운다든가, 역사에서 끌어내지는 교훈에 따라 행동한다든가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각 시대는 제각기 특유한 경우를 가져 제각기 극히 개체적인 상태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각 상태에 있어서, 각 상태 그 자체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해서만 결정될 수 있는 것이다. 세계의 여러 가지 사건의 혼란에 있어서는 일반적 원칙도, 유사한 여러 관계에 대한 회상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퇴색한 과거의 회상 따위는 현재의 생활 태도와 자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힘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문장에 대해 한솥매니아 님께서 이런 설명을 덧붙이셨어요. '과거의 사건과 사료 그 자체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현재적 의미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논리적 필연성에 따라 구성된 이론, 합리적 구성물입니다. 이 이론은 역사적 소재들을 그 재료로 삼기는 해도 역사 그 자체와는 구분되는, 역사의 구성물들을 추상화하여 재구성한 결과물입니다.'
 
헤겔이 실증주의자가 아니라 관념론자라고 한솥매니아 님께서도 이미 말씀하셨으니 알고 계실지 모르지만, 역사가 어떻게 발전해야 한다는 규범적 주장을 하지 말고 역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헤겔의 주장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편향적 사고 즉 극단적 공동체주의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헤겔은 공동체주의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축으로, 도덕 판단의 기준은 오직 국가에만 있을뿐 다른 보편적 기준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헤겔은 주로 칸트를 비판하면서 자기 철학을 정립했죠. 칸트는 개개인이 자기 양심에 비추어서 보편적으로 적용되어도 되겠다고 이성적으로 판단 내리는 것이 도덕 판단이라고 생각했어요. 헤겔은 칸트의 윤리학은 개인 내면에 갇혀 있어서 정말 옳은지 보장할 수 없다면서, 개인 밖의 공동체가 도덕 판단의 기준이 돼야 하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국가가 도덕 판단의 최고 기준이라고 말했죠.
 
그러나 결과적으로 정말 갇혀 있던 것은 헤겔이었습니다. 헤겔의 조국인 프로이센은 먼저 혁명이 일어난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보편적 인권이 미약했던 전제군주국가였습니다. 가부장적 가족이 확대되어 시민 사회에서의 길드적 직업단체들로, 그게 더 확대되어서 절대적 권력을 지닌 국가로 변한다고 보았죠. 지금 와서는 이런 모습의 가족, 시민 사회, 국가는 거의 사라졌어요. 그러나 헤겔은 그런 일시적 현실을 변치 않는 법칙으로 일반화했습니다.
보편적 인권 개념에 대해서도 부정했죠. 국가가 도덕 판단 기준의 최고 원천이니 국가 권력의 한계를 설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역사철학강의>에도 인권이라는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서,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을 언급해야 하니 괄호 안에 프랑스어 원제만 넣고 '자연권'이라며 얼버무렸어요. <법철학>에서는 영국, 미국, 프랑스 시민혁명의 이론적 토대가 된 사회계약론이 '파괴적' 성격을 띠고 있다며 특히 국왕을 처형한 프랑스 혁명을 매우 비판했습니다. 기존 국가의 정당성을 따져 물어 새로운 계약을 통해 국가를 새로 세울 수 있다는 사회계약론은, 국가의 신(神)적이고 절대적인 권위를 모독한다는 것이었지요. 국가는 인조물이 아니라 민족 안에서 수백 년 동안 자연스럽게 형성된 무의식의 산물이기에 이성이 독단적으로 판단내려 바꾸거나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민족 개념에서도 헤겔은 칸트에 비해 퇴행적이었어요. 민족을 가족이 확대된 '혈통 민족'으로 보고, 국가는 그런 자연적 민족의 직접적 현실태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헤겔 철학에서 개인은 국가에서 벗어나거나 다른 국가로 갈 자유가 없었고 국가가 허가해야 그럴 수 있었습니다. 이미 헤겔 당대에 미국과 프랑스는 국적 취득과 국적 이탈을 자유화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프랑스 혁명에서 naionalism이 발전했지만 nation은 동일한 법 제도 아래 사는 인민을 뜻하는 '국민'이었지 '혈통적 민족'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에서 영국인 토마스 페인이나 이탈리아인 필리포 부오나로티 같은 외국 출신 혁명가들도 활약했지요. 이런 헤겔의 민족 개념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혁명이 자기 국가로 번져오는 것을 막고 싶어서 혈통적 민족 개념을 이용해 보편적 인권 논리를 우리는 우리식 전통이 있다며 배격했던, 빈 체제의 정치적 낭만주의에 발맞춘 것이었습니다.
이 결과 헤겔 철학에서 혈통적 민족 국가는 독립 및 배타성을 유지하고 국가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외국에 대해 부정적, 배척적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전쟁 때문에 개인의 생명, 재산, 권리가 희생되는 것을 개인이 우연적인 개체에 갇힌 게 아니라 국가의 절대 권력에 투신함으로써 더 자유로워지는 거고 해석하죠. 또 국가는 항상 옳기 때문에 침략 전쟁이든 방어 전쟁이든 모든 전쟁을 긍정합니다. 심지어 옛 주거지에 남아 있던 순수한 게르만 민족과 로마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가 정복당한 민족들과 뒤섞인 혼혈 민족을 구분하며, 단절되지 않은 순수성을 유지한 게르만 민족을 찬양하고, 빈민 문제 해결을 위한 식민주의적 진출을 주장하며 '게르만 치세' 이론까지 말했습니다. 이걸 나치가 '게르만 제국' 이론에서 신나게 이용해먹는데, 분명 헤겔 철학 자체에 그렇게 이용할 여지가 있었습니다.
반면에 칸트는 자기가 아니라 백성들을 희생시키기에 전쟁에 거리낌이 없는 군주들을 비판하면서, 세계 평화를 위해서는 모든 국가들이 입헌공화국이 되어 국제법을 만들고 침략 전쟁을 금지하고, 개인들이 국가에 속한 것만이 아니라 세계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 UN이 설립되고 침략 전쟁으로 규정되면 규탄받는 모습은 칸트의 승리를 말해줍니다.
(이상의 헤겔 철학 분석의 출처는 책세상 『서양 근대 정치사상사』 중 황태연, '14. G. W. F. 헤겔―민족 국가의 정치철학')
 
헤겔 철학을 설명하면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어떤 사회를 보편 윤리에 따라 판단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냥 있는 그대로 사실만 보자는 중립적으로 보이는 주장이, 사실 현재의 질서를 긍정하는 편향성에서 나오는 주장일 수 있고, 그런 방향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역사학의 가치는 현재에 쓸모 있게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연구 그 자체에 의의가 있는 것일 겁니다. 하지만 역사학에서 어느 사건을 취사선택하고 어느 정도의 비중으로 다룰 건지의 문제에서라도 해석의 문제가 낄 수 밖에 없을 텐데, 그런 해석의 기준으로 보편 윤리가 낄 수는 정말 없는 것일까요? 한 사건의 종합적 평가에서 보편적인 해석을 내릴 수는 없더라도, 각각의 측면에 대해 보편 윤리적인 판단을 하는 것도 불가능할까요? 설령 보편 윤리의 입장에서 그런 부분적인 합의에도 이를 수 없다 해도, 보편 윤리의 관점에서 역사가 어떤 방향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할지 개략적인 방향성이라도 설정할 수 없는 걸까요? 만약 그런 방향성조차 설정할 수 없다면 민주주의나 인권을 후퇴시키는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역사학에서는 그걸 비판할 수 없게 되는 게 아닐까요?
 
제가 역사학에 너무 무지해서 역사학을 윤리학적 관점으로 평가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요. 제가 역사학의 독립성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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