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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국에 대한 신라의 공작과 암살기록
게시물ID : history_2460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aniel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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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99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12/20 20:2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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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위키 번역인데 이거 말고도 몇개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그냥 지나쳤던걸 여러가지 검색기법으로 두가지만 우선 찾아서 올려봅니다. 신라가 가만히 기다렸다가 막기만 했다는건 신라에 의해 멸망한 가야, 백제, 고구려를 본다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라서 이런일은 있을만 하다고 보여 올려봅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일본기록에 한반도로부터 도래하는 사람들과 성씨들이 엄청나게 많네요.. 삼국사기만 보면 오히려 왜인 1000명이 신라로 도래했다고 나오는데요.. 그리고 아래 기록을 보면 분명 규슈와 혼슈 사이에는 서로 이질적인 정치 집단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br /><br /><br />// 527년 (게이타이 21) 6월 3일, 왜국의 오우미(近江) 모야는 6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신라에 빼앗긴 남쪽 가라 달기탄을 회복하기 위해 임나를 향해 출발했다.(아마 백제를 도우러) 이 계획을 알고 신라는 축자 (큐슈 지방 북부)의 유력자였던 이와이에게 왜군의 방해를 명령했다. 이와이는 거병하고 히젠국과 부젠국을 제압하고, 왜국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해로를 봉쇄하고 오우미 모야군의 진군을 막아 교전했다. 왜국는 평정군의 파견에 대해 협의하고 게이타이 왜왕이 대반금촌 · 물부추록화 · 호세들 중에 장군의 인선을 자문 한 결과, 물부추록화 (物部麁鹿火)가 추대되어 동년 8월 1일 추록화(麁鹿火)가 장군에 임명되었다. 528년 11 월 11일, 이와이 군과 추록화의 왜군이 치쿠시 미이군(현 후쿠오카현 오고리시 · 미이군 부근)에서 교전하였고, 이 치열한 전투결과 이와이 군은 패배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이 때 이와이는 물부추록화에 참수되었다고 되어있지만, 「치쿠국 풍토기」에는 이와이가 부젠의 상선현으로 도망가서 그 산에서 죽은것이라고 기록되어있다. 같은 해 12월 이와이의 아들 축자군 갈자군은 연좌에서 벗어나고자 조옥(糟屋 현 후쿠오카현 가스야군 부근)의 둔창을 왜국에 헌상하고 죽음을 면제 받았다. "국조본기(国造本紀)에는 이와이와 신라의 관계를 시사하는 기술이있다." 

// 스이코 여왕 10년(602년), 다시 신라 정벌의 군사를 모았다. 같은 어미니의 동생 목황자를 장군으로 2만5천의 군사를 이끌게 하였지만 도해 준비 중에 목황자가 죽는다. (신라의 자객에게 암살되었다는 설이있다). 후임으로는 이복 동생 · 토우마 왕자가 임명되었지만 아내의 죽음을 이유로 수도로 돌아와 결국 원정은 중지되었다.
출처 위키백과(해외) 번역, 일본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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