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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혜왕 강간 쉴드치는 '기황후' 제작진
게시물ID : history_1140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탱구왔서현
추천 : 9
조회수 : 4102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08/29 18:44:49
MBC '기황후', 역사왜곡? 시대 상황이 만든 단편적 시각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3/08/29/20130829000691.html?OutUrl=naver


(전략)


# 충혜왕은 주색에만 빠져 산 인물?


충혜왕 역시 흔히 알려져 왜곡된 이미지는 주색에만 빠져 사는 왕이었다. 하지만 서울대 이강한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그는 왕권강화(금령11조 포함)에 노력, 만성적인 왕실재정의 결핍을 해결하고 재정을 확보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원나라는 해금정책(해상무역 봉쇄)과 강남상인의 고려 출입을 금지시킴으로 고려의 경제를 악화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충혜왕은 육로를 개척하고 회골인(위구루인)과의 무역을 활성화시켜 고려의 경제가 다시 활기를 찾도록 만들었다.?

두 번째로 논란이 된 충혜왕의 경화공주 강간 사건 역시 당시 배경 상황에서 보면 의심의 여지가 있다.

당시 고려가 관례적으로 고려왕과 원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태자가 왕이 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충혜왕은 고려인 어머니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경화공주 세력과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마침 경화공주 음행사건이 나자 조적은 심양왕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난을 일으키는데 이 과정이 불분명하다. 조적의 난 진행과정에서도 기다렸다는 듯 신속한 군사행동이 이뤄진 것으로 봤을 때 음모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그 근거로 고려사에는 "충혜왕 후4년(1343) 계미년 9월 경인일. 밤에 악소배 봉골(鳳骨) 등 세 명이 왕을 사칭하고 주부(注簿) 공보(孔甫)의 집에 들어가 그 처를 간음하자 행성(行省)에서 그들을 체포해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충혜왕을 사칭하고 다니며 간음했던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충혜왕의 폐위 원인은 폭정과 음행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충혜왕이 펼친 왕권강화정책이 원에 반하는 정책(반원정책)이었기에 제거의 필요성을 느꼈던 원의 입장에 의해 폐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기황후와 충혜왕의 역사 왜곡 논란은 당시 역사적 상황에 의해 묘사된 단편적인 역사기록에만 의존한 상황에서 드러나고 있다. 역사 기록 역시 어느 한쪽이나 유리한 쪽의 입장이 대변될 수 있기에 단정적으로 왜곡이라고 규정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게다가 왜곡된 부분에 대한 다른 역사적 기록도 있는 상황에서 드라마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무조건적으로 보내는 것 역시 단편적인 시각의 하나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복잡한 상황에 놓인 '기황후'가 부정적인 인식에서 앞으로 드라마를 통해 어떻게 역사의 진실을 들춰낼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추측과 의심할 꺼리가 있다면, 역사서의 사료 따윈 개나 줘버려.

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

강간王 충혜의 사료에 기록된 강간 일지 (실제로는 더 많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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