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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연재하며 시간강사의 불합리한 처우와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해주시던 선생님이 결국 대학교 강단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더 이상 ‘지방대 시간강사’ 일 수 없는 <지방시> 페이지는 창설 이래에 유래 없는 ‘좋아요’ 세례를 받습니다. 비록 학교를 떠나는 이유가 더 넓은 배움의 터를 찾아 나서기 위함이었다고 말씀하셨지만 익명의 글이 알려진 이상- 그선생님께서 계속 남아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면 언젠가 ‘괘씸죄’로 방출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픔’을 파는 세상입니다. 이렇게 힘들었다, 저래서 힘들다. 세상이 어렵고 대한민국이 어렵다는 글들이 매체에 범람합니다. ‘흙수저의 겨울나는 방법’ 같은 글이 씁슬한 유머가 되어 jpg 픽셀이 깨지도록 공유되는 세상. 우리는 그의 아픔에 ‘좋아요’를 눌렀습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때가 벌써 수년 전입니다. 그때 분명, 사람들은 아픈 청춘을 보낸 끝에 언제가 다가올 장밋빛 미래를 믿었다. 그러나 아픔이 절대 미래에 대한 약속을 주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은 뒤. 갈갈이 찢겨져가는 미래의 청사진 앞에서 우리는 현재의 아픔을 어떻게 대할지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저 아플 뿐입니다.
올해의 유행어라 하면 단연 ‘헬조선’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헬(지옥)과 조선은 동의어이므로 동어반복이라는 혹자의 이의제기에도 불구하고 ‘헬조선’이라는 단어는 끊임없이 뭇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립니다. 기약없는 아픔. 벗어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이곳은 지옥이나 다름없다는 뜻일 겁니다.
우리가 아파온 역사는 짧지 않습니다. 아니 언제 이 한반도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로 민생이 아프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요.
그럼에도 아픔의 역사는 진보합니다. 스스로 아픈 줄도 모르고, 사는 게 그런가보다 순응하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파도 괜찮다고 오늘의 아픔이 가져다줄 미래는 찬란할 거라 위안하던 나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적어도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아픔이 어떤 보상도 가져다줄 수 없음을 인지합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너도 아프고 나도 아프다. 우리 모두가 아프다’ 라는 상호위안으로, ‘헬조선에서는 금은수저 아니면 노답’ 이라는 자괴로, ‘킹찍탈’ 이라는 말도 안되는 유머코드로 넘겨버릴 때마다 순간의 해학과 공감이 있을지언정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현실로 돌아오면 삶은 끊임없이 우리를 조여올 것입니다.
“우리는 벌을 받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드라마화된 웹툰의 주인공이 한 말입니다. 지옥을 택해 들어간 것은 죄일지 몰라도 지옥 속에서 태어난 것은 죄가 아닙니다. "우리가 받고 있는 벌은 합당한가. 누가 무슨 권한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어오는가." 우리세대의 아픔을 말하는 화두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아프면 환자지 아픈 게 왜 청춘이냐’는, 모 인기 작가에 대한 화풀이로 끝낼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그 잘잘못을 따져 물어야 합니다.
아픔은 함께하면 반이 될 수는 있어도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노를 함께한다면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과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까지 청춘은 아프기만 할 것인가. 그들은 왜 분노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