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6일, 김재규는 박정희를 죽이는 데는 성공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가지 못 합니다. 김계원을 통해 진상을 알게 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바로 김재규 일당을 붙잡았고, 10.26 사건에 대한 합동수사본부가 만들어집니다. 원래라면 이걸 맡아야 됐을 중앙정보부장이 저지른 일이었습니다. 중정에 맡길 수 없었죠. 따라서 제 2의 중정이라 할 수 있는 보안사령부가 수사를 맡게 됩니다. 보안사령관(전두환)은 11월 6일 중간 결과를 발표하면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죠.
높으신 분들이야 다들 알았겠지만, 대중에게는 참 낯선 사람이었죠. 하지만 그의 영향력과 야심은 너무도 컸고, 그에게는 아주 강력한 동지들이 있었습니다. 하나회였죠.
그 시작은 정규 육사 1기 생도들의 오성회였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등 5명이 장군의 꿈을 가지고 각기 별 이름을 지어 만든 것이었죠. 이 때 그들은 박정희의 비호와 서로간의 친목질 하에 군 곳곳에 침투해 있던 상황이었죠. 특히 전두환은 박정희의 신임은 물론 참모총장 정승화와 국방장관 노재현에게도 인정받은 이였습니다. 그 차지철을 견제할 이로 말이죠.
... 그를 보안사령관에 임명한 게 저 둘의 생각인데 만약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참 궁금해집니다.
이건 그에게 많은 권력을 가게 했습니다. 중앙정보부가 반란을 일으켰고-_-; 청와대 경호실이 무너졌으니까요. 그는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와 참모총장 정승화에게 권력을 위임받았고, 이를 통해 힘을 휘둘렀죠. 그의 합동수사본부는 계엄사령부 앞에서 정보를 쥐었고, 자기들의 손을 거친 다음 계엄사령부 등 윗선에 올립니다. 말이 윗선이지 그가 모든 걸 쥐고 있었던 것이죠. 선배고 뭐고 끌고가서 고문하는 거야 워낙에 유명한 거고 지금 나오는 박근혜 6억원도 이 때 나옵니다. 거기다 각 행정부처의 국장들을 불러 회의를 엽니다. 행정부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었죠.
+) 후의 청문회에서 그는 5.16 때의 선례를 근거로 삼습니다.
한편으로 전두환은 정승화에 계속 러브콜을 날립니다. 5.16 때 장도영을 전면에 내세웠던 것처럼, 정승화를 내세우려는 생각이었죠. 아예 하나회 명예회장으로 추대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정승화는 이를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었죠.
오히려 정승화는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의 힘을 빼려 합니다. 전두환부터 동해경비사령부로 보내고 다른 이들 역시 요직에서 빼려고 했죠. 아직 전두환이 할 일이 남아있긴 했습니다. 아직 김재규의 재판이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그 일도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김재규의 최후진술이 12월 13일이었죠. 뜬금없이 왔던 기회가 사라지는 것은 물론 그 후폭풍을 걱정해야 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회는 너무나도 깊숙히 침투해 있었고, 이 모든 걸 알 수 있었죠.
한편 최규하는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이 된 후 8일에 긴급조치 9호를 폐지, 윤보선부터 김영삼, 김대중 등 정치인 687명을 복권합니다. 하지만 그는 전선거 후개헌으로 천천히 헌법을 개정 후 선거를 실시해 민간에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했죠. 그 기한은 1년이었습니다. 야당 신민당부터 재야 인사들은 당연히 바로 민주화를 요구했구요. 이 과정에서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시험해 보기 위해 한 것이 YMCA 위장결혼식 사건입니다. 이는 동시에 전두환의 신군부가 민주화 세력이 어떤지 시험해 보는 계기가 되었죠.
어느 쪽이든간에 얼어붙었던 한국에 봄이 오고 있었습니다. 민주화 세력은 물론 이른바 "유신 잔당"들 역시 민주화에 공감했고, 다만 일단 나라 안정이 된 다음에 하자는 쪽이었습니다. (북한은 물론 신군부 견제라는 부분도 있는만큼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죠. 뭐 실제 본심은 어땠는지 몰라도요. -_-a) 이로써 이제 막 날개를 달았던 신군부의 입지는 좁아져 갔습니다. 아니, 좁아지기 전에 일을 벌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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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명분이었습니다. 5.16 때와는 상황이 너무도 달라져 있었습니다. 박정희가 상대했던 정치인들은 국민들에게도 구태 정치인들로 여겨지던 이들이었지만, 신군부가 상대했던 정치인들은 박정희의 대항마로 떠오른 민주화 세력이었습니다. 국민들의 반응 역시 크게 달랐죠. 박정희식의 전략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방식에 20년간 시달린 국민들이었으니까요.
때문에 신군부의 쿠데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로 기록될만큼 눈치를 봤고, 그럼에도 더 과격했습니다.
시작은 군부 장악이었습니다. 나름대로 머리를 짜내 명분을 만들었죠. 계엄사령관 정승화가 김재규 암살에 협조했다는, 내란방조죄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상관이었기에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내야 했죠.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반발할 이들을 막기 위해 군대를 움직여야 했습니다. 어차피 하나회는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전두환이 쫓겨날 경우 하나회 자체도 큰 피해를 입을 것이었습니다. 운명공동체고, 협조는 참 쉬웠죠. 특히 그 중에는 이래저래 큰 활약을 하게 되는 공수여단장들이 있었습니다.
+) 이 과정에서 하나회 초창기 멤버이자 노태우의 처남인 김복동이 반대한 건 참 신기합니다. 파벌군인이긴 했어도 그나마 올바른 군인이었던 것 같아요.
문제는 이들에 맞서는, 정승화가 하나회에 대응해 앉힌 인물들이었습니다.
특히 그 유명한 수도경비사령관 故 장태완 소장이 있었죠.이들을 묶어놓기 위해 전두환은 12일 오후 6시에 연회를 준비합니다. 이른바 "작전명 생일집 잔치"였습니다.12월 12일 18:30, 장태완 등이 연회장에서 전두환을 기다리는 동안 보안사령부에는 쿠데타의 주범들이 모입니다. 바로 그 때 전두환은 최규하를 만나 정승화 조사의 재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20분 후, 참모총장 공관 정문은 반란군에 점령당했고, 곧 약간의 총격전 끝에 정승화 연행, 아니 납치는 성공합니다. 그 상황에서 생존자들이 급히 지원을 요청, 허삼수 등은 정승화를 납치한 채 도주했고 그들이 끌고 온 헌병대는 공관을 지키던 해병대 헌병들과 대치했죠. 거기다 정승화의 부인이 급히 육본 및 한미연합부사령관 유병헌에게 연락합니다. 이 소식은 바로 미 대사관 및 미 8군 사령부에 알려졌죠.
이를 들은 육군참모차장 윤성민 중장은 20시경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고 급히 장태완 등을 귀대시킵니다. 장태완은 이 소식을 듣고 돌아가는 길에 5분대기조 출동을 명령했죠. 진돗개를 발령한 것에서 보듯 전면전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공비든 반란군이든 알 수 없는 세력이 참모총장을 납치한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죠.
이렇게 소규모 쿠데타는 스케일이 커져 갔습니다.
그들에게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이 사실이 윗선은 물론 미군에게도 알려졌다는 것, 상황 파악이 끝나고 병력이 동원되면 그들의 운명은 바람 앞의 갈대였습니다.
둘째는 명분이 막혀버렸다는 것, 최규하는 여기서 상당한 근성을 보여줍니다. 노재현 국방장관을 보고 난 후에 결정하겠다고 나선 것이었죠. 어느 쪽을 향해서든 참 원칙주의적인 면을 보여줍니다. 헌데 이 노재현은... 식구들 데리고 도망가 있었죠 -_-; 잘 한 건지; 윤성민이 그를 찾아 육본으로 데려간 게 20:30...
한편 상황을 파악한 윤성민은 헌병감 김진기를 시켜 전두환을 체포하게 합니다. 전두환이 최규하를 설득하던 바로 그 총리공관의 헌병들에게 말이죠. 하지만... 뭐가 도와주는 건지 몰라도 그 직전에 전두환은 떠나 버립니다. 그 역시 이학봉을 통해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노태우는 전두환을 보호하기 위해 총리공관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명목은 대통령 호위병력 교체였지만, 그 곳을 지키던 헌병대는 계엄사령관의 명령이 있어야 한다며 거부합니다. 이에 머리에 총을 들이대며 위협해서 제압했죠. 이렇게 최규하가 고립된 때가 20:40이었습니다.
그 직후 장태완은 수경사령부에 도착합니다. 곧 서울 내 경비단장을 소집했지만 30(장세동), 33(김진영)경비단에게는 응답이 없었죠. 이에 직접 총장공관에 가게 됩니다. 거기서는 이미 김진영이 손을 써 자기네 병력은 빼돌렸고 남은 병력들은 대체 어떤 상황인지 알지도 못 한 채 대치 중이었죠. 그는 여기서 낌새를 눈치채고 급히 사령부로 복귀합니다. 한편 특전사령관 정병주 역시 자기 휘하인 1, 3, 5 공수여단장이 없다는 걸 알게 되죠.
수경사로 돌아온 장태완, 그는 자기 휘하의 장세동과 김진영이 30경비단에 있다는 것, 그리고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죠.
동시에 특전사령관 정병주에 대해서도 회유공작을 시도했지만 역시 실패, 반란군은 최악의 상황에 놓이게 됐죠. 결국 그들은 1공수여단을 육본과 국방부로 출동시킵니다.
이에 맞서 장태완은 휘하 병력으로 주요도로를 막고 지원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이건영 3군사령관은 국방장관의 명령이 있어야 한다며 거부, 대신 반란군 휘하의 병력은 확실히 잡아두겠다고 다짐했죠. 한편 정병주는 9공수여단을 보낼 준비를 했구요.
이대로 간다면 부족하긴 해도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 전두환을 비롯한 반란군 수뇌부는 단체로 최규하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최규하는 끝까지 버텼죠. 이에 노태우는 자기 인생 최대의 결심을 하게 되니...
9사단 29, 30연대를 서울로 출동시킨 것이었습니다. 휴전선을 맡은 전방부대 동원, 백마부대 최악의 흑역사죠. 이어 노태우는 3, 5 공수여단장에게 부대복귀 명령을 내립니다. 정병주의 명령을 최대한 막으려 한 것이었죠. 정병주는 이들을 최대한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합니다.
그 때, 노재현 국방장관은 미 8군의 벙커로 이동했는데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않고 그냥 갑니다. 어느 정도 세부 명령을 내렸다면 상황이 달라졌겠지만, 이런 게 없었죠.
그나마 육본에서는 1공수여단에 원대복귀 명령을 내렸고, 성공합니다. 이에 전두환은 박희도를 보내 직접 장악하게 합니다. 정병주 역시 이순길을 보내 장악을 시도했지만... 박희도는 이순길이 총을 들고 협박했음에도 거부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두환은 9공수여단의 서울 진입을 막기 위해 신사협정을 제안했죠. 각자 병력의 출동을 중지하고 증원을 금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윤성민은 이를 받아들였죠. 북한과 대치하는 가운데 아군끼리 피를 더 흘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만... 이게 최악의 패착이 되었습니다.
장태완은 근처의 26사단 및 수기사의 증원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부됩니다. 그리고 위의 3군사령관 역시 휘하 부대를 잘 지킨다고 해 놓고 9사단의 출동을 막지 못 했죠. 그런 가운데 전두환은 공수여단의 최세창, 박희도, 장기오에게 정병주의 납치 명령을 내렸고, 성공합니다. 9공수여단은 신사협정에 따라 원대복귀, 반란군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었습니다.
육본과 국방부가 접수되고, 수경사령관 장태완은 말 그대로 전차를 타고 마지막 저항을 하려 했지만 부하들의 만류로 결국 포기합니다. 그의 직할 전차대에서 이미 그를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하나회는 너무도 많았고, 곳곳에 침투해 있었습니다. 그의 수경사에서도 말이죠.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국방부로 갔던 노재현은 반란군에 붙잡혔고, 장태완에게 전투중지 명령을 내립니다. 마지막 보루였던 수경사는 무력화 됐고, 장태완은 체포됩니다.
그리고 13일 05:10, 노재현이 총리공관으로 가서 최규하의 서명을 받아냅니다.
이렇게 12.12 쿠데타는 끝이 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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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군을 장악한 하나회, 하지만 나라를 장악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최규하 정권은 두 갈래의 공격을 한번에 받고 있었죠. 하나는 전두환이 정부에도 손을 뻗어가는 것, 다른 하나는 학생과 민주화 운동가들이 주도하는 직선제 개헌이었습니다.
뭐 이 과정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은 결별, 87년의 예고편을 보여줍니다만 -_-a
그렇게 5월, 신군부는 이미 준비를 끝내놓고 있었습니다. 특히 시위진압을 위한 충정부대의 훈련이 계속되고 있었죠. 준비 없이 맞은 부마항쟁 때와는 달리 이들은 완벽한 준비가 돼 있었습니다.
그 동안에도 시위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계엄령 해제, 개헌은 물론 국무총리 신현확과 전두환 퇴진을 요구했죠. 봄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성과는 없었고, 전두환의 권력은 강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원했던 일이 벌어지죠.
5월 15일, 청년 3명이 버스를 탈취해 경찰들을 덮칩니다. 전경 1명이 숨지고 4명이 부상당했죠.
이날 밤, 신혁확은 직선제 개헌안을 늦어도 연말까지 확정하겠다면서 학생들의 자제를 당부합니다. 이에 그 유명한 서울역 회군이 일어났고, 다음 날에는 양김이 뭉쳐서 정부에 6개항의 시국수습대책을 발표하면서 학생들에게도 자제를 요청합니다. 하지만 정부가 19일까지 답변하지 않으면 22일에 대규모 투쟁을 전개하겠다고 발표했죠.
어찌보면 양쪽의 말이 조금씩 통해가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치 87년의 6월에서처럼요. 하지만 신군부에게는 지금이 바로 행동할 때였죠. 이 직전에 내밀었던 북한의 남침설과 그것이 전국의 시위와 연결되었다는 것, 이것으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합니다.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였죠.
이 때 계엄령이 내려지지 않은 곳은 제주도 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굳이 제주도를 포함할 필요도 없었죠. 중요한 건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면 계엄사령관은 국방장관을 제치고 대통령 바로 밑에 위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질적으로 모든 힘이 계엄사령관, 전두환에게 넘어가는 것이었죠. 국회에서 이게 통과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8분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는 정권 장악을 시작했고, 이렇게 광주는 피로 물듭니다. 그리고 27일, 그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정권 인수를 시작했고, 8월에 최규하의 하야를 통해 9월, 그렇게 바랐던 대통령이 됩니다.
짧았던 서울의 봄은 끝납니다. 대통령을 국민이 스스로 뽑는다는 꿈도 끝났죠. 하지만 그 불씨까지 사라지진 않았습니다. 아니 짓밟힌만큼 더 크게 타오를 것이었죠.
+) 뭐 어쨌든 이걸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어서 단임제에 유신헌법보단 좀 나은 쪽으로 만들긴 했죠. 그래서 그의 임기가 끝나는 87년, 민주화 운동은 그 어느때보다 더 거세게 타올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