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사시-연수원 출신 변호사입니다. 개인적으로 사시와 로스쿨 논쟁에 대해 직접 참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그냥 눈팅만 했습니다만, 로스쿨 지지자들이 연수원 기수 문화 어쩌고 하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한 마디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부분에 대해 사실을 밝혀보고자 합니다.
참고로 저는 자연과학을 전공하고,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가정사정 때문에 돈을 벌어야 해서 사법시험을 쳤습니다. 이른바 흙수저 출신의 사법시험 합격자이며, 법조계 인맥과도 무관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로스쿨과 금수저 논란이나 사법시험 대비 로스쿨의 장점이라고 주장되는 것들에 대해서도 할말이 많긴 합니다만, 일단 여기서는 사시 기수, 그리고 전관예우에 대한 내용만 설명을 하겠습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사시 기수 또는 연수원 기수와 전관예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 전관예우라는 개념 자체가 사시 기수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전관예우는 말 그대로 “전관을 예우”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 전까지 부장판사로 근무한 판사 출신 변호사를, 그 부장판사를 모시던 후배 판사들이 유리하게 봐주는 것이 전관예우입니다. 검찰의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전관예우를 노릴 경우에는 해당 변호사가 옷 벗기 전 어디에서 근무했는지를 가장 먼저 고려합니다. 대구지방법원에서 옷을 벗었으면 대구지방법원 사건의 경우에 전관예우를 기대해볼 수 있겠죠. 또는 광주지방검찰청에서 옷을 벗었다면 광주지방검찰청에서 지휘하는 수사에서 전관예우를 기대해볼 수 있는 것이고요.
이런 이유에서, 전관예우를 방지하기 위한 정책은 주로 그가 옷을 벗기 전에 있었던 관청에서 관할하는 지역에서 개업하는 것을 일정기간 금지하거나, 그 지역의 사건을 수임하는 것을 일정기간 금지하는 형태를 취하게 됩니다.
내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건 연수원 기수나 사시 기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문화는 우리나라가 정실 자본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에 불과한 거죠. 그래서 연수원 출신이냐 로스쿨 출신이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같이 일하던, 담당 검사가 모시던 상관 출신변호사기만 하면 전관예우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고, 지금 상황에서 로스쿨 출신들이 늘어나면 로스쿨 출신들도 당연히 전관예우를 이용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연수원 기수에 대해 좀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주 먼 옛날, 아마도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 상당수가 태어나기도 전, 사법시험 합격자 숫자가 수십여명에 불과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아마도 연수원 동기라는 것만으로도 서로 통하는 것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다들 자신이 다닌 고등학교 또는 대학교를 생각해보세요. 같은 반 친구, 또는 과 동기와 모두 친하게 지내신 분이 있으신가요? 그래서 수십년이 지난후에도 반이나 과 친구 누구에게나 아쉬운 소리나 청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으신가요? 아마 그런 분은 많지 않을 겁니다.
연수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수원 동기라고 해서 모두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진 것도 아니고, 모두 친한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일년에 수십명만이 배출되던 그 시절에도 연수생들 모두가 친했던 것은 아니에요. 그러니 훨씬 많은 숫자가 배출되는 지금 와서는 그런 관계를 기대하기 어렵죠.
저만 하더라도 연수원 내에서 같은 조였던 사람들 (약 20명 정도 됩니다), 그리고 같은 반이었던 사람들 (약 62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정도가 같이 공부한 카테고리로 묶입니다만, 그나마 같은 조였던 사람들 정도가 지금도 편하게 연락할 수 있는 수준이고, 조가 다르다면 같은 반이라도 대부분 연락 자주 못 하고 지냅니다. 당연히 뭐 부탁하거나 하는 것은 생각도 못하죠. 저는 심지어 같은 조였던 동기들에게도 업무와 관련해서 뭘 부탁해본 일이 없습니다. 잘못 부탁했다가 현직에 있는 친구들이 낭패를 당할까봐 걱정이 되기 때문이죠.
따라서 연수원 동기관계라는 것은 사실상 거의 도움이 안 됩니다. 물론 동기라는 것을 이용해서 청탁을 시도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관예우 문제에 비해서는 거의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보셔도 됩니다. “전관예우”라는 말은 있지만 “동기예우”나 “기수예우”라는 말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이해가 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수 문화에 대해 말씀드리죠.
로스쿨 출신들은 연수원 기수문화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도 마치 해병대 기수문화 같은 철저한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것처럼 주장하는데, 이건 사실과 완전히 정 반대입니다. 제가 속한 집단중에 가장 기수 구별 안 하는 곳이 사법연수원이거든요.
이게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연수원 같은 기수라고 하더라도 워낙 다양한 나이대, 다양한 출신학교, 다양한 학번들이 섞여있기 때문에, 기수로 뭘 나누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제 연수원 동기중에 저보다 고등학교 7년 선배가 계셨는데, 이분과 제가 동기라고 맞먹을 수 있었을까요?
심지어 노장으로 붙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연수원 교수들도 존대를 하면서 존중하는 것이 사법연수원 문화입니다. 사실 사법연수원 교수로 올 나이대와 노장으로 붙은 연수생 나이대가 비슷하거든요. 그런데 같은 학교 출신이라면 학번대도 비슷하니, “난 교수, 넌 연수생”이라는 식의 구분을 주장하기 어려워지는 거죠.
그래서 사법연수원 기수보다 오히려 고등학교 기수, 또는 대학교 학번이 더 중요합니다. 특히 자기들끼리 잘 뭉치는 주요 사립대 출신들의 경우에는 연수원 기수 그런 거 없습니다. 그냥 학번으로 가는 겁니다.
사법연수원 기수 문제는 아마도 법원이나 검찰의 승진 절차 문제와 헷갈리시는 분이 있으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법원이나 검찰의 승진에는 사법연수원 기수가 고려되거든요. 그런데 이건 사실 당연한 겁니다. 사법연수원 기수는 그 사람의 법조계 경력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니까요. 당장 사기업의 경우에도 몇 년도 입사인지 따지잖아요. 마찬가지인 겁니다. 물론 능력이 있으면 먼저 승진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검사나 판사는 공무원이기 때문에 비교적 연공서열 분위기가 강하게 남아있는 것이고, 그래서 승진에 있어 사법연수원 기수를 따지게 되는 겁니다.
그렇지만 그거 뿐입니다. 사법연수원 기수는 법조 경력을 말해주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어요.
당장 저만 해도, 우리회사에 저보다 연수원 기수가 아래인 사람들에게도 모두 존댓말을 씁니다. 그 중에는 저보다 나이가 많은데 후배인 사람들도 여럿 있는데, 저는 모두 존대를 하고, 업무상 지시하는 경우 이외에는 선배노릇 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이건 당연한 것이고, 다른 변호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를 따져서 형 동생 하면서 반말을 쓰는 경우야 있을 수 있지만, 학번 깡패나 군대 기수 같은 분위기는 요즈음은 물론, 심지어 일년에 몇 명 안 뽑을 때에도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