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아이들, 무슨 일이지?’
1921년 9월24일 아침 9시, 경주 노서리 마을을 순시 중이던 미야케 요산(三宅與三) 순사(경주경찰서)의 눈에 심상찮은 장면이 포착됐다. 매립된 흙 속에서 3~4명의 아이들이 뭔가 열심히 찾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보니 아이들 모두 청색 유리옥을 들고 있었다.
‘청색구슬? 혹시 고분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신라가 천년고도임을 알고있던 미야케의 머리가 순식간에 돌아갔다.
“얘들아. 이 흙은 어느 집에서 파서 옮겨온 거야?”
“저기 저 술집이요.”
아들이 가리킨 곳은 봉황대 바로 아래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박문환의 집이었다. 미야케가 주막집 증축을 위한 터파기 작업을 벌이던 박문환의 집 뒷마당으로 출동했다.
현장은 어수선했다. 주막집 확장을 위한 터파기 현장인지, 고분도굴 현장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다음은 미야케가 이와미 하시미쓰(岩見久光) 경주경찰서장에게 올린 보고서의 내용.
“이미 현장에서 오래된 청동 및 금제품과 유리옥 등 유물을 확인했다. 유물로 보아 왕릉이나 귀족 무덤의 중심부라 여기고 유물은 현장에 보관했으니 지휘를 바란다.”
미야케의 긴급보고를 받은 이와미는 곧바로 경주에 사는 총독부박물관 촉탁인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를 통해 본부(총독부박물관)에 긴급보고했다. ‘고적전문가’를 긴급파견해달라는 보고였다.
■순사가 확인한 금관총
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전문가는 파견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와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등 당대의 전문가들이 공교롭게도 가야 패총의 시굴조사를 담당하고 있었다. 전문가를 기다리는 동안 현장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인부가 유리옥을 양동이에 한가득 담아 몰래 운반하다가 적발되기도 했고…. 또 순사들은 멋대로 토기를 발굴하고…. “황금이 나왔다”는 인부의 고함에 현장에 모여들던 구경꾼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그러자 모로가 히데오와 현지 고적보존회 촉탁인 와타리 후미야(渡理文哉), 경주보통학교 교장인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 등이 유물수습에 나섰다. 전문가를 마냥 기다릴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경주의 분위기는 흉흉해졌다.
‘일본인들이 신라왕릉을 판다’는 소문이 인근마을까지 삽시간에 퍼졌다. 민심이 크게 동요됐다. 심지어는….
“금관총 유물 발굴 3일째. 마침 만주에서 황사가 불어와 자욱하듯이 날씨는 매일 침침했다. 일종의 유언비어가 나왔다. ‘저것은 국왕의 묘다. 그것을 일본인이 팠기에 하늘이 어두워졌다!’ 시중에는 뭔지 모르는 일종의 살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때 현곡면에 사는 70대 노파가 가로막는 순사의 손을 뿌리치고 발굴장 한복판까지 들어와 털썩 주저앉아 절규했다. ‘임금님의 무덤을 파는 것이 웬말이냐!’”(오사카 로쿠손의 <취미의 경주>, 1939년)
■아마추어의 졸속발굴
전문가 없이 진행된 발굴은 4일 만에 끝났다.
때문에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유구와 유물의 출토상태가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다. 고고학 발굴사에서 천추의 한을 남긴 것이다.
“우연한 토목공사 중 발견한 것이어서…, 모로가 히데오(비전문가)의 감독아래 주로 유물을 발굴한 것이어서 아무래도 혼잡스러웠고, 더욱이 발견지점은 음식점의 가옥 평소한 뒷마당이어서…, 대단히 풍부한 수량가 종류의 유물이 겨우 1~2평 남짓되는 장소에서 포개져 쌓여있는 것을 단시일 내에 캐내야 했기에… 출토상태를 전혀 알 수 없는 유물이 적지 않아….”
일제가 펴낸 <경주금관총발굴조서보고서>는 이렇게 당시의 상황을 변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주로 경험이 일천한 발굴자인) 모로가와 오사카 등의 기억과 각서에 의존해서 되살렸지만 각자의 소견이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 유감스럽다”고 했다. 이 획기적인 발굴은 이렇게 ‘비전문가의 손에서 불과 4일 만에 해치운’ 졸속 발굴의 상징이라는 오명을 안게 됐다.
■‘일본영토’에서 발견된…
우여곡절 끝에 수습된 유물들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신라금관을 비롯한 팔찌와 관모, 귀고리, 허리띠와 허리띠 장식 등 온갖 황금제품들이 그득했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사상 처음으로 금관이 나온 이 무덤을 ‘금관총’이라 이름 붙였다.
“금관총 출토유물의 황금(당시 보고서는 2관, 즉 7.5㎏으로 추정)은 슐리만이 그리스 미케네에서 발견한 금제 보기(寶器)보다는 뒤지겠지만…. 중앙아시아의 옥수스 출토품들과 견주면 그것을 능가할 것이다.”
옥수스 유적은 1877년 현재 타지키스탄 아무다리야 강 유역에서 발견됐다. 기원전 4세기 쯤 아케메네스 왕조 때 페르시아 고관대작이 남긴 유물로 알려져 있다.
일제는 그러면서 “이 금관총 유물은 우리 ‘일본 영토’ 안에서 처음 발견됐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 또한 전세계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고분 발견 유물의 한 예”라 자랑했다.(<경주 금관총 보고서>) 내용 가운데 ‘일본 영토’는 좀 속 쓰린 표현이지만, 식민지 시대의 아픈 기억으로 치부해야 할까.
■신라의 명문대표가 만난 까닭은
이렇게 발굴된 유물들의 처리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일제는 유물정리를 위해 출토유물들을 서울로 몽땅 옮겨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 경주의 여론이 들끓었다. 마침내 신라 건국의 토대가 된 신라 건국의 주역인 박(朴), 석(昔), 김(金)씨와 이(李), 최(崔), 손(孫), 정(鄭), 설(薛), 배(裵)씨 등의 명문가문 대표가 회담을 열었다. 신라의 명문거족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신라 멸망 이후 처츰 있는 일이었다. 이들은 시민대회를 열어 금관총 유물의 경주 전시를 촉구했으며, 10여 명의 대표단을 총독부로 파견하는 등 총력전을 펼쳤다. 또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모아 조선시대 양식의 박물관 건립을 추진했다. 결국 이들의 뜻에 따라 경주박물관 분관이 생겼고, 지금의 경주박물관 모태가 되었다.(1923년 10월)
■홍안박명
‘홍안박명(紅顔薄命)’이라 했던가. ‘최초의 금관출토’, ‘비전문가에 의한 졸속발굴’ 등으로 출발한 금관총은 이후에도 숱한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솔직히 말하면 ‘수난사’로 표현하는 게 옳을 것 같다. 일제가 1912년 기조의 도로를 확장한 신작로를 만들면서 상당 부분 남아있던 고분을 마구 깎으면서 금관총의 수난은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고분의 거의 대부분이 삭평된 상태에서 민가 뒤에 가려져 있다가 주막집 확장 공사 과정에서 유물이 부장된 관곽이 노출되는 ‘수모’를 겪은 것이다.
비록 후손들에게 엄청난 유산을 남겼다지만…. 신라의 왕이나 왕족 신분인 고분의 주인공을 생각해보라.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다 한순간에 발가벗긴채 노출되고만, 그야말로 민망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미궁에 빠진 금관총 유물 도난사건
그러나 그것은 금관총 수난시대의 서막에 불과했다.
1927년 12월 10일 밤, 경주박물관에 진열돼있던 금관총 유물들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범인은 진열실의 자물쇠를 부수고 금제 허리띠와 허리띠 장식, 귀고리, 반지 등 90여점의 황금유물들을 털었다. 다행히 유리를 깨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 상하개쇄식 진열장에 놓여있던 금관은 손대지 못했다.
도난소식을 접한 경주시민들은 경악했다. 비통에 빠진 경주의 분위기는 죽음의 회색거리가 되었다. 시민들은 도난품의 발견을 기원하며 눈물어린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범인 수색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동아일보>는 1928년 1월19일 ‘미궁으로 들어간 경주고적도난’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도적은 못잡고 애매한 혐의자만 고생시킨다”고 경찰수사를 꼬집고 있다.
“고적의 도난사건은 한달이 훨신 넘은 오늘에 이르도록…경주 읍내에서 조곰이라도 정당히 보이지 안는 사람은 거의 전부를 모조리 한번식 취됴(취조)하여 오히려 수색이 턱업시 가혹한데, 일반의 비난까지 바다가며(받아가며) 계속하야 왔으나 도적의 그림자조차 구경하지 못하야….”
당시 경찰은 ‘가혹수사’라는 비난을 들어가며 경주읍내를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 답답해진 경찰과 박물관 측은 선전전을 펼치기도 했다.
즉 ‘천년이 넘는 금세공품은 요즘의 금과 성분이 달라 녹이면 금방 눈치챈다’는 둥, ‘무덤에서 나온 물건을 갖고 있으면 집안에 변고가 생긴다’는 둥…. 또한 경주 관광객 감소를 우려한 경주번영회 같은 민간단체는 현상금 1000원까지 내걸며 범인찾기에 나서기도 했다.
그래도 범인의 행방은 묘연했다. 그렇게 6개월이 훌쩍 지난 1928년 5월 21일 새벽 5시쯤이었다. 인분을 처리하던 김지동이라는 노인이 거름망태를 메고 경주경찰서장의 관사를 지나다가 백로지(갱지)로 싼 물체를 발견했다. 아무 생각없이 뜯어본 김지동 노인은 깜짝 놀랐다.
“(김지동이) 뜻밧게 금색찬란한 보물이 잇슴으로 놀래서 경찰서에 고발하야…틀림없는 박물관에서 도난당한 물건인지라….”(<동아일보> 1928년5월26일자)
순금제 반지와 그밖의 순금장식 몇 점을 제외한 도난금제품이 모두 회수된 것이다. 경찰은 즉시 경주읍내를 샅샅이 뒤져 용의자 색출에 나섰지만 끝내 잡지 못했다.
■모조품 금관까지 사라진 사연
금관총의 수난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1956년 3월7일, 경주박물관에 진열중이던 금관총 금관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당시 박물관 수위 유인식(40)이 금관고 자물쇠를 채우지 않고 외출한 사이 금관을 들고 유유히 사라진 것이다.
엄청난 사건이었다. 1927년 도난 때는 그래도 금관 만은 훔치지 못했는데…. 그러나 이번에 범인이 훔쳐간 금관은 모조품이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두 달 여 전인 1955년 12월 30일 <경향신문>엔 어느 마산의 고고학도가 보낸 독자투고가 실린다. 도대체 경주박물관에 소정된 금관을 볼 수 없으니 그 행방을 밝히라는 것이었다. 이 고고학도는 “수 개월 동안 잘 안치돼있던 금관이 대체 어디로 사라졌느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경주박물관 관계자는 <경향신문> 1월3일자에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경주박물관의 금관은 6·25 사변 이후 진품을 진열한 바가 없습니다. 이 사실은 국회에도 보고된 바 있습니다. 현재 진품의 금관은 모처에서 보관돼 있습니다. 귀하께서 보셨다는 금관은 아마도 진열된 모조품이었을 겁니다. 모조품 금관은 박물관 형편으로 잠시 전시되지 않은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금관총 금관은 단 한번도 진품이 진열된 적이 없었다는 것이 박물관 측의 해명이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동판을 오려붙이고 영락을 달아 도금한 모조품을 만들어 전시했던 것이다.
사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그 방면에 조금이라도 식견이 있던 사람이라면 모조품이라는 것을 쉽게 식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지한 범인은 금관이 눈이 멀어 가짜인 줄도 모르고 슬쩍 한 것이다.
‘도난금관은 모조품’이라는 기사를 접한 범인으로서는 청천벽력이었으리라. 범인은 경주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언론보도에 보고 발길을 돌렸다. 그는 경주 시외의 서천(西川) 모래 밭을 깊숙히 판 뒤 모조금관을 파묻고 말았다. 훗날 범거된 범인의 진술에 따라 경찰은 서천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모조금관은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이사지왕의 출현
그로부터 57년이 흐른 지난 7월3일, 금관총이 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고분 주인공의 허리에 차고 있었던 환두대도(고리자루큰칼)를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획기적’인 명문을 발견한 것이다. 칼집의 금속부에 선각된 명문의 내용은 ‘이사지왕(이斯智王)’이었다.
이것은 그저 ‘금관총’이라 이름붙은 피장자의 신원을 밝힐 수 있는 대단한 명문이 아닌가.
사실 금관총을 비롯한 황금유물은 신라시대 대규모 적석목곽분이 유행했던 마립간 시대의 산물로 여겨진다. 마립간 시대라 하면, 17대 내물(재위 356~402년)~18대 실성(402~417)~19대 눌지(417~458)~20대 자비(458~479)~21대 소지(479~500)~22대 지증(500~514년) 사이를 뜻한다. 그렇다면 ‘이사지왕’은 이 6명의 마립간 가운데 한 명일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금관총에서는 금관 뿐 아니라 금제관모, 관식, 금제 허리띠는 물론 허리춤에 찬 환두대도까지 확인됐다. 피장자의 지위가 최상위급이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사지왕’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역사기록에서나, 그 어떤 금석문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사지왕이 마립간이 아닌 왕족일 가능성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신라 때는 ‘갈문왕’이나 ‘차칠왕등(此七王等)’처럼 왕(마립간)이 아닌 왕족에게도 왕의 칭호를 붙였다는 것이다.
■나·제 결혼동맹이 내미는 실마리
이 가운데 황금유물 전문가인 이한상 교수(대전대)의 ‘추정’은 흥미롭다.
그는 이미 금관총과 서봉총·황남대총 남북분 등을 연구한 성과를 토대로 적석목곽분의 절대연대를 추정한 바 있다. 그는 금관총의 경우 절대연대를 ‘5세기 4/4분기’로 보았다. 즉 475~500년 사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소지왕(재위 479~500년)이 아닌가. 무슨 근거로? 이 교수는 금관총에서 출토된 허리띠와 띠꾸미개가 공주 송산동 4호분의 출토품과 디자인이나 크기가 100% 똑같다는 점을 주목한다.
“디자인이나 크기가 완전히 같습니다. 재질, 즉 금관총의 것이 금제인 반면 송산리의 것이 은제라는 점만 다릅니다. 경주의 장인(匠人) 한 사람이 만든 동일한 형태의 제품이 금관총과 송산리 4호분에 묻힌 것입니다.”(이한상 교수)
송산리 4호분의 절대연대는 5세기 말~6세기 초, 즉 백제 동성왕(479~501) 시대이다. 그런데 “493년, 동성왕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했으며. 신라는 이찬 비지(比智)의 딸을 시집보냈다.”(<삼국사기> 백제본기·동성왕조’)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에 맞서 맺었던 ‘나·제 결혼동맹’의 기사이다.
이 교수가 또 하나 주목하는 것은 ‘이사지왕’의 ‘이(이)’자이다. ‘이(이)’자가 사전의 의미대로 ‘그(其)’, 혹은 ‘이(此)’의 의미라면? 그렇다면 ‘이사지왕’은 ‘그 분이나 혹은 이 분’인 ‘사지왕’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경우 ‘사지왕’은 혹시 ‘소지왕’과 동일인물은 아닐까.
■백제·신라 결혼동맹의 결과물?
또 동성왕에게 딸을 시집보낸 ‘비지(比智)’라는 인물과 ‘사지(斯智)’는 어떤 관계일까.
백제와 결혼동맹을 맺을 정도라면 최소한 왕족을 시집보냈을 가능성이 짙다. ‘사지=소지’왕이 그와 혈연관계에 있는 왕족, 즉 ‘비지’라는 인물의 딸을 보낸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비지’의 관등이 왕족의 관등인 ‘이찬’이라는 점도 주목거리다. 그렇게 보면 송산리 4호분은 신라에서 백제로 시집간 ‘비지의 딸’과 어떤 연관이 있는 무덤일 가능성이 충분한 것이다. 소지왕이 왕족인 비지의 딸을 백제왕에게 보내면서 은제 허리띠를 혼례품으로 하사했을 수도 있고…. 혹은 비지의 딸이 백제 땅에서 죽자 장례품으로 보냈을 수도 있고….
소지왕과 (이)사지왕…. 소지왕과 왕족 ‘비지’…. 그리고 백제 동성왕과 비지의 딸…. 이한상 교수의 추론을 들어보면 어쩌면 풀릴 수 있는 퍼즐 놀이 같기도 한데….
어쨌거나 묻힌 지 1500년 만에 현현했고, 이후 또 92년 간이나 잠들었던 수장고에서 기지개를 켠 이사지왕이 후손들에게 수수께끼 한 문제를 낸 셈이다. ‘내가 누구게~.’
이기환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