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보니 아침 6시 반이 훌쩍 지났다.
큰일이다싶어 속히 머리를 감고 세수와 면도를 하였다.
고향 안동에 가는 날이다....
대한민국 초대 국무령 석주이선생의 존영을 뵈옵고 신흥무관학교 교가를 불렀다.
늘 그렇듯 기쁠때나 슬플때나 가리지 않고 애국가로 여기며 부르는 노래이다.
오늘이 되어 내가 고향에 가는 것은 얼마전 김종길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장과 박원갑 경북향교재단이사장이 자유한국당 대표 황교안에 대한 아첨성발언을 했기 때문에 이를 규탄하러 가는차였다.
김종길원장과 박원갑이사장은 영남 유림의 어른으로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못했으니 어찌 규탄을 면하겠는가?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이 이번의 사태를 통해 그 명예가 실추된 점을 생각하면 통탄을 금할 수 없다.
의성김씨 학봉공파 종손이기도 한 김원장의 16대조 청계 김진은 아들 오형제에게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내렸다.
"사람이 차라리 곧은 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무도하게 사는 것은 옳지 않으니 너희들이 군자가 되어 죽는다면 나는 그것을 살아 있는 것으로 여길 것이고 만약 소인으로 산다면 그것을 죽은 것으로 볼 것이다"
유림에 속한 선비가 되어 속유와 부유로 변한 후 소인배를 따르는 풍조가 지속된다면 장차 앞일을 어찌 할 것인가.
그것을 경계하기 위해 나는 안동시내 문화의 거리에 도착했다.
도착시간은 10시 10분이었다.
그리고 1인시위를 결행하였다.
이 곳 안동 문화의 거리는 기미년만세혁명이 일어났던 곳이다.
안동은 1919년 3월 13일 만진 이상동(晩眞 李相東 1865년 11월 4일 ~ 1951년 11월 29일)선생의 단독시위로 만세혁명이 시작되었다.
만진이선생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친아우이며 유학자임과 동시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만진선생은 오늘 내가 서 있었던 성결교회 앞에서 태극기형상의 종이연에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후에 이것을 하늘로 날린 것으로 역사는 전한다.
그리고 하늘에 연을 날린 직후 선생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한 선생은 곧 왜경에게 압송되었다.
선생의 이 단독시위로 안동의 만세혁명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이 작고 좁은 문화의 거리에서 백년전 3천여명이 한꺼번에 운집하여 만세혁명에 참여한 것을 생각하노라면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 없다.
문화의 거리에서 결행한 1인시위를 바라보는 안동시민들의 반응을 살펴보니 그렇게 냉담하지는 않았다.
많은 안동시민들이 유림의 아첨성 발언에 대해 공감해 주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어떤 어른께선 목이 마를 터이니 커피를 사먹으라며 돈을 건네주시기도 하였고,
사진을 같이 찍자는 의식있는 안동대 철학과 학생도 있었다.
물론 시비를 거는 분도 있었다.
처음에는 동조해주는 척 하면서 문재인대통령 욕으로 끝내는 어른들이 있었고, 나를 일컫어
전라도에서 온 것 아니냐는 여고생도 있었다.
그러나 반대하는 분들은 몇몇에 불과하였다.
조금이나마 정치와 불의에 눈을 떠가는 시민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시민들이 있기에 진실로 다행이다.
안동에도 역시 사람이 있었다.
(고향 안동 시내 문화의 거리에서 김종길 종손, 박원갑 이사장을 규탄하는 1인시위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1인시위 결행에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고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으신 안동의
선배동지 김선생님, 이선생형님께 감사드립니다.
대구의 선배동지들께도 깊은 감사 드립니다.
취재해 주신 기자님들께도 깊은 감사드립니다.
집안문중 등에서 보복성 후폭풍이 올수도 있겠으나 개의치 않겠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