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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이 평가하는 김영삼
게시물ID : sisa_62853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테러123
추천 : 3
조회수 : 52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11/26 14:4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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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저 " 여보 나 좀 도와줘" 중 (김영삼 대통령때 쓴 책)
내가 YS로부터 받은 돈 봉투는 수도 없이 많다. 이삼 개월마다 정기적으로 받는 것 이외에도 이런저런 일이 있을 때면 가끔씩 돈을 얻어 썼다. 그런데 YS는돈 봉투를 주면서 이런저런 주문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상당한 힘을 발휘하였을 것이다. 3당 합당 당시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펄쩍 뛰었다. 한참 후까지 오락가락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일단 YS를 만났다는 소문이들리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연락이 끊어졌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변하여 YS 스스로 정치자금에 철퇴를 내리겠다고 공언하고 나섰다. 하기는 이제 그는 돈 봉투가 필요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대신 그보다막강한 권력이 있으니…….
나는 훌륭한 정치 지도자의 3대 요건으로 ‘권력 장악 능력’, ‘살림살이 솜씨’ 그리고 ‘역사의식’을 꼽는다. 그러면 이 기준으로 볼 때, YS는 어느 정도 점수를 받을 수 있을까.
먼저 YS는 ‘권력 장악 능력’이라는 측면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과시했다. 그것도 ‘3당 합당’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신무기를 개발하여 집권에 성공했다. 박정희 대통령이나 전두환 대통령처럼 총을 들고 나온 것도 아니고, 또 자기 스스로 주장해 왔듯이 국민의 지지로 정권을 잡은 것도 아니었다. 물론 선거를 거치긴 했지만, 그건 ‘3당 합당’에 비하면 오히려 결정적인 과정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히 독창적이라 할 수 있는 권력 장악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는 많은 무리도 있었고 또 적지 않은 억지도 있었다. 한마디로 숱한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YS는 숨 막히는 권력 싸움에서 승리했고 대권 장악에 성공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지도자로 부르는 데 아직 동의를 할 수 없다. 그로 말미암아 청산해야 할 이 땅의 기회주의가 다시 때를 만났기 때문이다. 역사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즉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이다.YS가 3당 합당으로 권력을 잡기 전만 해도 이 땅에서는 기회주의자들이 차지할 수 있는 장물의 수준은 한정되어 있었다. 고작해야 권력에 빌붙어 먹고사는정도의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YS의 대권 장악과 함께 기회주의자들의 입지에는 커다란 변화가 생겨났다. 기회주의자들의 성공이 최고 권력의 차원으로까지올라갔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YS의 대권 장악은 기회주의자들에게는 하나의 신선한 모델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스러기나 먹는 기회주의가 아니라 통째로 먹는 기회주의, 즉 기회주의의 극치가 실현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이 옳은것이라고 가르쳐야 할 것인가. 정의니 가치니 하는 말들은 이제 국민의 냉소거리에 지나지 않고, 소신과 지조를 얘기하던 사람들에게는 무력한 허탈감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그나마 YS의 살림살이 솜씨라도 좋아야 할 텐데…….
(imf로 살림살이 망함)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거나, 트로이의 목마라는 이야기도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호랑이 잡겠다고 큰소리 쳐놓고는, 오히려 호랑이의 양자가 되어 호랑이 굴을 상속받아 여전히 동네의 약한 사람들을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제 YS를 만나면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총재님, 이제라도 민자당을 탈당하십시오. 호랑이를 잡았으면 이제 호랑이굴을 파헤쳐 버려야지요. 왜 옛날 호랑이 새끼들과 동거하고 있습니까?”
그의 3당 합당이 ‘변절’이 아니라 ‘전략’이 되려면, 그래서 트로이의 목마라고 할 수 있으려면 지금이라도 민자당을 해체해야 한다.
그리고 옛날 호랑이가 써먹던 국가보안법, 안기부, 용공 조작, 공권력 투입, 이런 못된 발톱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3당 합당 당시 YS는 나를 부르지 않았다. YS는 당시 흔들리는 사람들을 한 사람씩 불러서 소위 ‘각개 격파’라는 것을 해냈다. 그런데 김정길 의원과 나에게만은 그 각개 격파를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3당 합당이 발표되던 날, 감당할 수 없는 충격에 넋이 빠진 나에게 어느 한 선
배 의원은 YS를 지칭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영감쟁이가 완전히 돌았어. 말이 되는 걸 해야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가 있나. 싸우시오! 우리가 힘이 되어 줄 테니, 싸우시오!”
또 한 사람, 국회의 현관 앞에서 마주쳤던 어느 노 선배는 나의 두 손을 꽉 잡
으며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열심히들 하시오. 우리도 힘을 모으고 있소.”
그러나 백만 원군과도 같았던 그 선배들의 격려는 며칠 안 가서 물거품이 되
어 버렸다. 그리고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나와 김정길 의원에게 “당신들 두 사
람이 모두 따라간다 해도 난 혼자서라도 야당에 남을 것”이라고 말했던 사람도
끝내 떠나가 버렸다.
모든 약속과 믿음들이 그렇게 허공으로 흩어져 날아가 버린 빈들에서 김정길
의원과 나는 텅 빈 가슴으로 차가운 겨울 바람에 몸을 떨고 있어야 했다. 허위와
배신에 대한 분노와 쓰라림, 그리고 그런 정치에 대한 환멸로 휩싸인 채…….
마지막 순간까지도 흔들림 없이 우리와 함께 남겠다는 뜻을 밝혔고, 또 그 뜻
을 서명으로 확인해 주었던 그 친구와의 사연이다. 그 친구는 야당 잔류 의사를
기자 회견을 통해 밝히기로 한 바로 전날, YS를 만난 자리에서 기어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 친구의 자형과 누나가 나를 맞아 주었다. 나는 찾아온 이유를 말하고 그 친
구를 만나 보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어디서 그렇게 술을 마셨는
지, 아예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이층의 방 안에 틀어박힌 채 고래고래 질러대
는 그의 고함 소리가 처절한 신음 소리로만 들릴 뿐이었다.
그 친구의 누나와 자형이 이층에 올라가서 이야기를 전하려 했으나 도저히 불
가능했다.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저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사람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냥 돌아가 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통사정을 하는 그 친구 누나의 얼굴에 가득 담긴 슬픔을 뒤로하고 나는 그냥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처남이 노 의원처럼 변호사거나 돈이 조금만 있었어도 한번 버텨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원체 돈이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군요.”
마주앉은 나에게 그 친구의 자형이 푸념처럼 흘린 이 한마디가 살 속에 박힌
가시처럼 자꾸만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괜한 밤하늘만 노려보았다. 그냥
고통 없이 떠나게나. 자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고통이고 부끄러움인 것
을…….
**전두환 청문회 명패투척 사건의 진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다. 전두환 씨에게 명패를 던진 것이 아니라, 땅바닥
에 내동댕이를 친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전두환 씨에게 대한 분노보다는 당시
내가 소속하고 있던 통일민주당의 지도부에 대해 화가 치밀어 내동댕이쳤던 것
이다.
지금 와서 새삼 무슨 변명을 하고 싶지는 않으나, 당시 우리가 몸담고 있던 정
치 현장의 분위기와 그에 익숙하지 못했던 우리 소장 의원들의 고뇌를 이야기하
고 싶어 그 사건의 전말을 밝혀 볼까 한다.
청문회로 온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진행되었던 5공 특위와 광주 특위는
89년 1월 민정당의 불참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다 그해 연말 4당 영수 회담에서
노태우·YS·DJ·JP는 정호용 씨만 희생양으로 삼는 선에서 5공 특위와 광주 특
위 건을 마무리짓기로 합의했다.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소장 의원들은 지도부의 그런 결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집권당의 반대 때문이라면 청문회가 공전되는 한이 있더라
도 마무리하지 말고 그대로 두어야 할 일이다. 그래야 뒷날에라도 바른 매듭을
지을 수 있지 않은가.
또한 전두환 씨의 청문회 증언 문제도 전두환 씨가 서면 질문에 종합적으로
답변하고 보충 질문을 일체 허용하지 않기로 합의되었다. 한마디로 전두환 씨를
국회로 불러내 일방적인 해명 기회를 주자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건 법적으로
도 명백한 불법이었다. 국회법에 보장된 국회의원의 질문권을 봉쇄한 것이기 때
문이다. 한마디로 이건 청문회가 아니라 전두환 씨의 대국민 연설을 의미하는 것
이었다.
당연히 이러한 합의에 평민당과 통일민주당의 소장 의원들은 반발했다. 그래서
질문권을 계속 주장하기로 하고 작전까지 미리 짜 놓았다.
1989년 12월 31일 밤, 전두환 씨의 연설이 시작되자마자 국민들 항의 전화가
빗발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저게 증언이냐? 연설이지.” “어서 끌어내서 증
언대로 앉히지 않고 뭐하냐?” 등등. 국회의원들도 “이렇게 국회가 모독당해도
되느냐.”며 모두 흥분했다. 각 당의 원내총무실, 대표실 등을 들락거리며 모두
들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통일민주당 지도부의 반응이었다. ‘광주 항쟁과 관련
된 사안이니 틀림없이 평민당에서 누가 나와 판을 깰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않
아도 과격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평민당이 온통 바가지를 뒤집어 쓸 것이다. 그
러니 우리 당은 절대 항의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라.’ 이것이 지도부의 지시
내용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평민당의 지도부도 마찬가지였었다.
나는 울화를 삼키며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전두환 씨가 광주 학살
대목에서 “자위권 발동…” 운운하며 거짓말을 늘어놓자, 평민당의 정상용 의원
이 참지 못하고 “자위권 발동이 뭐야! 발포 명령자 밝혀!”라고 소리치며 앞으
로 뛰어 나왔고, 동시에 평민당의 이철용 의원이 증언대로 뛰어나가며 “살인자
전두환!” 하며 고함을 질렀다.
순식간에 청문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민정당 의원이 들고일어나 삿대질을
해댔고, 여기에 맞서 평민당 의원들의 맞고함이 시작되었다.
이럴 때는 으레 통일민주당도 일어나 야당 편을 들어주는 게 관례였다. 그런데
그때는 달랐다. 뒤쪽 지도부에서 ‘우리 당은 조용히 있어라. 이제 평민당이 다
뒤집어쓰게 되었다’는 식의 의사가 전달되어 오는 게 아닌가.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벌떡 일어나 민정당 의원들을 향해 “전두환이
아직도 너희들 상전이야!” 하며 소리를 질렀다.
결국 소동이 가라앉지 않자 전두환 씨가 퇴장을 했고, 나는 통일민주당의 지도
부를 향해 욕을 퍼부으며 명패를 집어 바닥에 팽개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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