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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임금의 피난길(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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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애비28호
추천 : 14
조회수 : 1586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5/11/25 16:3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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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에 이어서

(※ 빡치시는 분이 있으셔서 좀 죄송스럽네요. ㅠ 민감한 부분은 조금 다듬었습니다.)

 

 

□ 1592년 선조 25년. 음력 6월 초.

선조는 아직까지 왜적에게 침범 당하지 않은 전라, 충청 일부, 경상 일부 지역의 군사들을 소집, 북진하여 임금을 지킬것을 지속적으로 명령한다. 전라 순찰사 이광(李洸)은 군사를 거느리고 북정(北征)하여 경상 순찰사 김수(金睟)와 충청 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군사와 합류하고 서둘러 임금을 돕기로 한다. 

왜구의 피해가 거의 없었던 전라도 쪽 병력이 가장 많았기 때문에 전라 순찰사 이광이 전체 병력을 통솔 하기로 하는데 ​당시 기록마다 차이가 있으나 그때 모인 조선군의 병력은 약 4~6만명 정도에서 최대 10 ~ 13만 명까지라는 기록이 있다.


6월 1일. 용인(龍仁) 전투에서 조선 육군이 대패하다.

전라 감사 이광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주 목사 이경록(李慶祿)을 중위장으로, 전 부사 이지시(李之詩)를 선봉장으로 삼아 용안강(龍安江)을 건너 호서(湖西)의 임천(林川)을 경유해서 진격한다.

이광의 입장에서는 선조 임금이 적의 배후를 빨리 치고 한양을 수복하라는 명령 때문에 엄청나게 후달리던 중.

전라도 쪽 병력을 전부 뽑아 올린 덕분에 전라도 내륙은 텅텅 비게 된다.

아무튼 이번 전투는 조기에 난리를 수습 할 실마리를 찾느냐 장기전으로 돌입하느냐의 국운이 달린 문제다.

방어사 곽영(郭嶸)은 2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광주 목사 권율(權慄)을 중위장으로, 전 부사 백광언(白光彦)을 선봉장으로 삼아 여산(礪山, 전북 익산) 대로를 경유하여 금강(錦江)을 건넌다. (논산, 천안, 평택, 용인 방향으로 진격 예정)

경상 순찰사 김수는 수하 군사 수백을 거느리고, 충청 순찰사 윤국형은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모였다. 

 

​이 상황에서 병력을 점령되지 않은 성에 분산 주둔 시켜서 적의 배후에서 지연전만 펼쳤더라도 왜구의 진격 속도가 상당히 늦춰졌을 것이고 또 지연전을 펼치는 동안 평안도와 함경도 쪽 군사들을 소집하여 아래, 위로 압박해 들어오면 조선군에게도 어느정도 승산이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른 장수들의 이런 제안을 전라감사 이광은 무시하고 왜구와 전면전을 펼치다가 용인에서 왜구의 주력에게 대패를 하고 만다.

이 전투로 인하여 조선은 상당 기간 제대로된 육군을 규합 하지 못하고 전쟁은 장기전 양상으로 치닫게 됨.

약포집(藥圃集) 6월 1일(기축) 임진강 방어에 실패했다는 도순찰사(都巡察使) 김명원(金命元)의 장계가 올라와서 행재소의 경계가 삼엄해졌다. 전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을 다시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으로 서용하였다. 

6월 2일. 평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난을 결심하다.

용인 전투 패배와 임진강 방어선의 붕괴 소식 후.

임금은 여러 신하들과 결사항전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왜적에 대한 두려움으로 더 북쪽으로 피난 가기를 원한다.

이 날 조정의 회의에서 평양을 지켜야 한다는 쪽과 평양을 버리고 더 북쪽으로 가자는 의견이 대립되게 된다.

난상토론이 벌어지는 와중에 선조 임금이 한마디 하신다.

"의논들이 일치하지 않는구나. 내 생각에는 여기 평양이 안전한 지역이 아니니 군신(君臣)이 함께 왜적의 칼날에 어육(魚肉)이 될 수는 없다. 나는 이주하고 싶은데 대신들이 따르지 않는구나.”라는 원망을 함. - 선조실록

 

임금은 피난 가는 길에 백성들이 왜적에게 협조하거나 길을 막아 피난에 차질이 생길 것 만 염려하였고 다른 이야기들은 그저 아뢴데로 하여라와 대신들에게 물어보라...뿐이었다.

 

이순신이 당포, 당항포, 영등포 등지에서 전라도와 서해안을 점령하려던 왜적의 수군을 차례로 격파한다.

장군은 정2품 자헌대부의 품계로 승진한다.

6월 5일. 명(明)나라의 차관(差官) 최세신(崔世臣) · 임세록(林世祿) 등이 적정(賊情)을 탐지하기 위하여 평양에 도착하니, 선조는 흑단령(黑團領)을 입고서 서쪽 행궁(行宮)에서 그들을 접견하다.(이와중에 임금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 기록까지 하는 실록의 치밀함이 보인다.)

명나라 입장에서도 조선이라는 나라가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질리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고 아무래도 조선이 일본과 한 패로 일을 꾸미는게 아닌가 강한 의심을 하고 있다.

6월 8일. 임진강 방어선이 돌파 당하다.

"왜적들이 와서 대동강 건너편 강변에 출현하였다."  - 약포집(藥圃集) 피난행록 6월 8일


임진강 방어선이 왜적에게 완전히 붕괴되고 이미 임진강을 건너 대동강가 까지 왜적의 선발대가 나타났다.


6월 9일.

"​대가(大駕)가 영변부(寧邊府)로 떠나려 하자, 본부(本府 평양부)의 군민(軍民)들이 무리를 이루어 길을 막으며 떠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청하여 끝내 대가가 떠나지 못했다."  - 약포집(藥圃集) 피난행록 6월 9일


 

6월 10일. 북쪽으로 피난이 결정됨.

우선 평양성을 사수해야 한다는 의견이 앞서 평양 군민들에게 임금이 평양에 남아 사수하기로 한다고 전달한다.

이 소식을 듣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백성들이 평양성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다.

선조 임금과 신하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평양의 백성들이 평양을 사수 하는 동안 잽싸게 평양을 버리기로 합의하고 피난 준비를 서두른다.


백성들의 동태를 찔러보기 위해 왕비 일행을 먼저 함흥으로 출발 시킨다.

그러자 평양 군민들이 왕비의 피난길을 가로 막고 왕비의 몸종을 몽둥이로 두들겨 패버린다. 도망갈꺼면서 왜 백성들은 불려 들였냐고... 당시 호조 판서(정2품) 홍여순은 이와중에 난동을 부리던 백성들에게 두들겨 맞아 허리를 다치기도 했다.


홍여순은 천성이 호걸스럽고 교만하여, 일찍이 남에게 굽히는 일이 없었다. 대가가 평양을 출발하려 하니, 그는 집으로 가 행장을 꾸려 호위하려 하였다. 그 때 길가의 난민들이 큰 막대로 그의 등을 치며 말하기를, 

“금관자(金貫子)ㆍ옥관자(玉貫子)를 단 도적들아! 평시에는 많은 녹봉으로 잘 살고 있다가, 이미 도둑을 막지 못하더니 또 임금에게 우리를 버리고 가게 하느냐.”

하면서, 마구 때렸는데, 말에서 떨어져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그는 다른 이에게 오늘 죽을 뻔 하였다고 말하고는 등을 만지며 아픈 것을 참고 앉았다. 이유징이 말하기를,  

“이 사람의 마음은 평양 사람에게 이미 죽은 것이네.”

하였다. - 기재잡기


왕비의 피난길은 잠시 보류 되고 거의 폭동 수준으로 변하기 직전의 평양성 내부. 황해도 관찰사 송언신이 난동을 부리던 백성 몇몇을 참수하고서야 겨우 힘겹게 진압 한다.

 

이날 승정원에서는 임금이 평양을 버리고 떠나면 북쪽으로는 더 이상 지킬만한 큰 성이 없고 평양을 지키기 위해 모인 백성들을 타이를 명분이 없다고 상소를 올리나 선조 임금은  "적의 예봉을 피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짧막한 답장을 내리고는 피난을 떠난다.  - 약포집(藥圃集) 피난행록 6월 10일.


그러나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선조 임금의 다음 행선지가 중국으로의 망명인지, 함경도 깊은 산 중으로 가서 게릴라전을 펼칠 것인지 아니면 왕비를 따라 함흥쪽으로 크게 우회전을 할 지 결정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6월 11일. 드디어 임금이 평양을 버리고 영변으로 길을 떠나다.

좌의정 윤두수, 도원수 이원익 등에게 평양성을 지키도록 명하고 임금은 북쪽으로 떠났다. 중전은 함흥 쪽으로 길을 떠나게 하였다.

당일로 평양~순안(順安)~숙천(肅川) 구간(40~50km 정도)을 돌파 하는 사상 초유의 광속 피난을 시전한다.

이날밤. 평양에 남아있던 조선군 100여 명이 몰래 대동강을 꺼꾸로 건너 왜적의 진영을 기습 공격한다.

이때까지 어찌나 조선군이 속수무책으로 제대로된 공격을 한번도 하지 않았길래 최전방의 왜적들이 진영 안에서 전부 보초도 없이 전부 자빠저 자고 있었다고 한다. 이날 수 백 명의 왜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린다.

 

6월 12일. 당상관이 곤장을 맞다.

평양을 떠난 임금의 행렬은 바람처럼 내달려 숙천을 지나 쉬어 갈즈음에 해당 고을의 백성과 아전들이 전부 피난을 가고 없었다.

임금이 안주(安州)의 경계로 넘어가는데 길가에는 사람하나 보이지 않고 텅빈 고을에 먹을것도 말먹일 풀도 없었다.

임금의 행차가 너무나 급작스럽고 신속하여 안주에서는 왕이 오는지도 몰랐다. 왕의 행선지가 결정되지 않아 그런 모양이다.

덕분에 안주 목사 이민각(李民覺)이 혼자서 나와 영접하는 꼴이 연출되고 그 죄로 곤장 40대를 맞았다고 한다.  

이날 먹을 양식도 없는 안주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 6월 13일. 임금이 영변에 도착하다.

영변으로 들어가 보니 그 고을의 꼴도 안주와 다를바 없었다.

​"상이 안주에서부터 비를 무릅쓰고 영변부로 들어가니, 성안의 아전과 백성들은 모두 산골짜기로 피하여 들어갔고 관인(官人) 5∼6명만 있을 뿐이었다."  - <선조실록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13일>

​이날 왕의 최종 목적지가 결정되다.


그래결정했어.png
(발 그림 주의)

영변에서의 선택

이 때 임금에게는 세 가지 선택이 있었다.


1안. 강계로 가서 험준한 산맥을 의지하여 게릴라전을 펼치다 여의치 않으면 중국으로 넘어가거나 길이 차단되면 함경도 쪽으로 더 깊숙히 들어가서 함경도의 병력으로 지연전을 펼치는 방법.

2안. 함흥으로 들어가서 함경도와 평안도의 병력을 기다린 뒤 반격을 하던지 상황에 따라 강원도로 내려오던지 북쪽으로 다시 올라가는 방법. 

3안. 바로 의주로 가서 중국으로 넘어가는 방법.

 

 아래의 글은 위 세 가지 방법에 대해 선조 임금과 신하들간에 오간 내용을 선조실록에서 그대로 옮겨본다.

(글 중간에 괄호로 부연 설명이 들어갑니다.)

이 날은 3~4차례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임금의 이후 행보에 대해 논의한다.

<선조실록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13일 5번 째 기사>

영변 행궁에서 신하를 인견하고 이어할 곳을 논의하다

상이 영변 행궁(行宮)에 납시어 호종한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최흥원(崔興源)이 아뢰기를,
“상께서 정주(定州)로 이주하고 싶으시더라도 우선은 여기에 머무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에 대한 내 생각은 이미 정해졌다. 세자는 여기에 머무를 것이니 여러 신하들 중에 따라오고 싶지 않은 사람은 오지 않아도 좋다.”
하였다. ...(중략)...
​상이 이르기를,
“호종하는 관원을 여기에 많이 머물게 하고 나는 가벼운 행장으로 옮겨갈 것이다.”
하였다. 정철이 아뢰기를,
“우선 평양의 소식이 오는 것을 기다려 봄이 어떻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이 머물자고 권하는 것이나 피하자고 권하는 것이 각각 소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다시 갈 만한 곳이 있겠는가. 그러나 말하여 보라. 만약 있다면 내가 따를 것이다.”
하니, 흥원이 아뢰기를,
“왜적의 기세가 꺾이면 북도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가산 군수(嘉山郡守) 심신겸(沈信謙)이 행재소(行在所)에 와 있었는데, 상이 내관(內官)에게 명하여 가산까지의 거리를 물어보도록 하니, 입계(入啓)하기를,
(가산은 영변에서 정주, 선천, 용천, 의주로 가는 길목의 첫번째 고을이다.)
“90리 길입니다. 그러나 큰 강(江)이 둘이 있고, 가산에서 의주(義州)까지는 촌락이 다 비어 있으므로 인연(人煙)이 매우 드뭅니다.”
하자, (의주로 튀는 방법에 대해 완곡하게 어렵다고 이야기하는 입장이다.)
정​철이 아뢰기를,
서북 지방은 조금 완전하여 우리 나라 강토가 아직은 다 함락당하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피할 만한 곳이 없겠습니까. 강계(江界)는 사람들이 모두 방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정철은 평안도와 함경도 쪽의 험한 산맥으로 피신하여 뒷 일을 도모하자고 하는 중이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랫사람들은 어느 곳이든 못 갈 곳이 없겠지만 나는 정주(定州)로 피해야겠다. 평양이 함락당하면 함경도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정주는 의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이곽이 아뢰기를,
“평양이 함락당하면 우리 나라는 보전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하자, 철이 아뢰기를,
“임진(臨津, 임진강)은 왜적이 주인이 되고 우리가 객(客)이 되었지만, 평양은 우리가 주인이 되고 왜적이 객(客)이 됩니다.”
(평양은 막을만한 요충지라는 뜻)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김정목(金庭睦)의 말을 들어보지 못했는가. 왜적이 만약 뗏목을 만들어 일시에 진격해 오면 그 예봉(銳鋒)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흥원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는 피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 요동으로 들어갈 것을 의논하고 있는데 요동으로 일단 들어가면 조종(祖宗)의 종묘(宗廟)·사직(社稷)을 장차 누구에게 부탁하시겠습니까.
하자, 철이 아뢰기를,
“1주(州)·1읍(邑)만 가지고서도 역시 도모할 수 있습니다.”
(정철은 계속 끝까지 항전 불사를 외치고 있다.)​
하니, 흥원이 아뢰기를,
중국이 우리를 받아주지 않고 왜적이 또 뒤에서 핍박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정주(定州)로 이주한다는 분부가 있자 인심이 동요되고 있으니 잘 생각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곽이 아뢰기를,
“시종신(侍從臣)을 보내어 조치하는 일을 우선 멈추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곽이 아뢰기를,
“이 지경에 이르러 어찌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전일에 왜적과 통신(通信)한 일이 있었으니 중국에서 그다지 믿어주지 않을 성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요동에 들어갈 수 없단 말인가. 왜적의 문서(文書) 중에, 그들의 장수를 8도에 나누어 보내겠다고 하였으니, 우리 나라 지방에서는 피할 만한 곳이 없을 성싶다.”
하였다.

이 대화에서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는다.


<선조실록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13일 6번째기사>

양사가 머무르면서 왜적의 형세를 보아 피하기를 청하다

양사(사간원, 사헌부)가 합계(合啓)하여, 이곳에 머무르면서 서서히 왜적의 형세를 보아 피하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왜적의 형세가 몹시 위급하니 이주하지 않을 수 없다.”


<선조실록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13일 7번째기사> 

저녁에 신하들을 인견하고 대가의 이어에 대해 논의하다
이날 저녁에 또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중략)...​
​이곽(우부승지)이 아뢰기를,
“지금 여기에 들어온 대신(大臣)들이 밖에 있을 적에 모두들 만약 강계로 가려면 운산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밤새도록 가면 운산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신하들의 뜻은 모두 나를 인도하여 강계로 가려는 것인가?”
(나를 죽일 작정이냐?)하였다. 
정​철이 아뢰기를,
“어떤 계책이 좋은지 모르기 때문에 이처럼 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 일찍이 요동으로 갔었더라면 좋았을 것인데, 의논이 일치하지 않아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처음부터 항상 왜적이 앞에서 나타난 뒤에는 피해 가기 어렵다는 일로 말하곤 하였다.”
하였다. 상이 명을 내려 성대업(成大業, 당시 운산 군수)을 불러들이도록 한 다음에 이르기를,
“그에게 도로의 원근을 자세히 물어보라.”
하였다. 【대업이 원신(遠臣)이기 때문에 직접 하문하지 않았다. 】 대업이 아뢰기를,
“덕천(德川)·운산(雲山) 지경부터는 샛길이 있고, 개천(价川)에서 함흥(咸興)까지는 그 거리가 매우 가깝습니다.”
하고,(함흥으로 가는것이 어떻게냐는 이야기)
이어 아뢰기를,
강계는 서쪽으로는 의주로 가는 길이 있고 동쪽으로는 적유령이 있는데, 길이 좀 넓어서 적을 방어하기가 어려우니, 따로 매우 험준한 한 곳이 있습니다.”
하였다.(강계 방면도 괜찮고...)
정철이 아뢰기를,
“이런 지역은 도적도 지나가기 어려운 곳입니다. 절벽이 천 길이나 되고 겨우 잔도(棧道)로 통행하는데 북쪽으로는 산융(山戎)과 통하고 서쪽으로는 의주(義州)와 연하였습니다.”(방어 하기 좋은 곳 이란 말이야!!!)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강계로 갈 수 없으니 장차 어느 곳으로 갈 것인가?”
(길이 험해서 그쪽으로는 못간다.)
하였다. 흥원이 아뢰기를,
“만약에 왜적의 소식이 없다면 함흥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곳에서 정주(定州)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하자, 모두 대답하기를,
“이틀 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하루 안에는 도달하기 어렵겠다.”
하고, 상이 이어 요동(遼東)으로 들어갈 일에 대하여 말하자. 흥원이 아뢰기를,
“요동은 인심이 몹시 험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찌 갈 만한 지역을 말하지 않는가. 내가 천자(天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적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
하였다.
상이 세자(世子)를 이곳에 주류(駐留, 머무르게)시켜 두고 떠나는 것이 괜찮겠느냐고 하문하자, 철(澈)이 아뢰기를,
“만약 왜적의 형세가 가까와지면 동궁도 어떻게 여기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하고, ...(중략)...
​ 상이 곽에게 하문하기를,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이 어떠한가?”
하자, 곽이 대답하기를,
“사람들의 말에 ‘전일에 왜적과 통신한 일이 있었으므로 명조가 지금은 비록 포용해주고 있지만 꼭 받아줄지의 여부는 기필할 수 없다. 만약 적병이 뒤쫓아오면 반드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고 하는데, 이 말도 그럴 듯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 요동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하였다.
이때 비변사의 당상 이산보(李山甫)·이항복·이성중(李誠中)·한준(韓準)·심충겸(沈忠謙) 등이 청대(請對)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혹시 이들이 요동 망명 이외의 길을 주장하려고 하는 줄 알고 만남을 아예 회피한다.)
그러자 신하들이 곧바로 들어가 진대(進對)하였다. 
(임금의 허락도 없이 임금 앞으로 들어가버림.)
심​충겸이 아뢰기를,
“소신이 비변사 당상이기 때문에 청대하였습니다. 내일 행차를 어떻게 정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들은 각각 생각한 바를 진술하고 싶습니다.”
하고, 한준이 아뢰기를,
“주상께서는 정주로 가시더라도 세자는 함경도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함경도에 왜적이 있으면 어찌할 것인가?”
하자, 충겸이 아뢰기를,
“가다가 왜적이 있으면 마땅히 물러나 함관(咸關, 금강산)에서 보전하고 이것도 되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물러나 보전한다면 나라의 신민들이 촉망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부득이 창업할 때처럼 비바람을 무릅쓴 뒤에야 보전할 수 있습니다. 양궁(兩宮)이 한 곳으로 함께 가시면 사람들이 기대를 부칠 곳이 없게 됩니다.”
하고, 준이 아뢰기를,
세자는 북도로 가고 대가는 의주로 가신다면 명조에게는 반드시 구원병을 요청할 것으로 여겨 돌보아 주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항복이 아뢰기를,
“소신의 생각도 시종 양궁이 나누어 주찰(駐札)하는 것을 옳게 여겼습니다. 명조에서도 반드시 포용하여 받아들일 것이고 거절할 리가 없습니다.” (여기서 임금과 신하들의 합의점이 나온다. 임금은 중국으로 도망, 세자는 남아서 끝까지 버팀. 그러면 중국에서 불쌍하다고 도와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왜적의 손에 죽기보다는 차라리 중국에 가서 죽겠다.”
하였다. 충겸이 아뢰기를,
“세자가 북도로 가면 혹 성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고, 철이 아뢰기를,
“요동으로 들어가겠다는 생각이 드러나자 인심이 해이되었는데, 하물며 참으로 요동으로 들어가는 경우이겠습니까. 일이 궁박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런 의논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논이 많으면 좋지 않은 것이다. 지금 백방으로 생각해 봐도 내가 가는 곳에는 왜적도 갈 수 있으므로 본국에 있으면 발붙일 땅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흥원이 아뢰기를,
“소신의 생각에는 요동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합니다. 들어갔다가 허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무리 그렇더라도 나는 반드시 압록강을 건너갈 것이다.”
하였다. 충겸이 아뢰기를,
요동으로 들어가면 내전과 비빈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 버려두고 갈 수 없으니 가려서 대동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러자 항복 등이 아뢰기를,
“부득이하면 지극히 간소하게 대동하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세자 빈도 북도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모든 일을 오늘 확정하는 것이 좋겠으니 동궁을 불러 함께 의논하여 처리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종묘 사직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세자가 함흥에다 봉안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성중(誠中)이 아뢰기를,
“신은 당초 의논할 적에 요동으로 들어가는 것을 불가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불가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슨 까닭인가?”
하니, 성중이 아뢰기를,
“들어가지 못할 성싶어서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느 곳으로 가야 하겠는가?”
하자, 성중이 아뢰기를,
북도가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은 피난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안남국(安南國)이 멸망당하고 스스로 중국에 입조(入朝)하니 명조에게 병사를 동원하여 안남으로 보내안남을 회복시킨 적이 있었다. 나도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하였기 때문에 요동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세자는 북도로 가고 영상이 따라가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양궁이 나누어 이주하면 호종하는 관원으로서 북도로 가는 사람이 불가불 많아야 합니다.”
하자, 준이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미행(微行)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를 호종할 사람은 자원(自願)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근력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려워하지 말고 각각 말을 해보라. 북도로 가는 것도 종묘 사직의 중대한 일이니 불가불 많이 보내야 한다.
호판(戶判)은【준(準)이다. 】 북도로 가는 것이 좋겠다. 나는 종묘 사직에 죄를 졌으니 수행할 필요가 없다. 내가 나라를 떠나 지성으로써 사대(事大)하면, 명조가 반드시 포용하여 우리를 받아들일 것이요 거절까지는 않을 것이다. 경들은 병이 있는 것 같으니 모두들 북도로 가는 것이 좋겠다. 꼭 요동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 형세가 어려우면 강계로 가더라도 해로울 것이 뭐 있겠는가.”
하니, 군신(君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이후 서로간에 합의점을 찾은 조정에서는 선조 임금과 세자에게 나뉠 신하들의 규모를 일사천리로 논하고 그 날 회의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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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에 이어 5부도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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