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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자들은 대한민국의 권력의 중심에서 그려지는 침묵의 카르텔, 이익에 의한 동조에 대한 이야기다.
경찰대 출신이 아니라서 항상 승진싸움에서 밀렸던 우장훈이 이제는 검사가 되었더니 빽 없고 족보가 없어서 보이지 않는 침묵의 카르텔에 의해 주저 앉는 검사 우장훈은 유력한 대통령 후보와 재벌 회장을 돕는 정치 깡패 안상구와 함께 권력 투쟁의 중심으로 뛰어들고 그들의 진짜 목적은 권력과 이익에 눈이 멀은 미래 자동차 회장도 아니고 유력한 대통령 후보인 장필우도 아니고 그들을 입맛에 맛게 요리하고 조종하는 유명 언론사 논설 위원 이강희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 실체를 향해 의기투합한 이 둘의 싸움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줄거리다.
결론만 딱 떼어놓고 보자면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클리셰가 가득한 뻔한 이야기. 카타르시스적인 결말을 위한 의도적이고 작위적인 장치들과 결말이라고 혹평할만한 여지가 충분히 있다.
영화를 보고나서 마치 그림처럼 모든 것이 짜맞춰 진듯한 느낌이 든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영화 속에서도 등장한 바 있던 그림을 다시 한번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식사>. 1863
기억하기로는 영화 중반 쯤 오회장, 장필우, 이강희 셋의 충격적이자, 파격적인 그들만의 파티 장면 전에 아주 잠깐 등장했던 그림이다. 물론 지금은 오르세 미술관에 걸려있고 아무리 대한민국의 최고의 기업의 총수라 하더라도 쉽사리 얻을 수 있는 그림은 아니겠고, 모작이거나 가품이거나 하겠지만 가장 확실한 설명은 감독이 의도적으로 걸어놓은 일종의 장치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림 속에 있다.
이 작품은 지금도 물론 충격적이지만 당대에서도 큰 충격을 안겨준 작품이었다. 왜 충격적이었을가. 나체의 여인이 남자들과 함께 야외에 어울리고 있어서 였을까? 아니다, 그 전에도 나체의 여성을 소재로 다룬 작품들은 많이 존재했었다. 그 작품들과 이 <풀밭위의 점심식사>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바로 이 작품은 여신이나 님프1가 아닌 바로 동시대 파리의 실제 인물들을 모티프로 차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빅토린 뫼랑을 모델로 한 이 벌거벗은 여인은 당시 "어떻게 정장을 한 신사들이 벌건 대낮에 야외에서 창부들과 놀아날 수 있으냐"는 비난과 함께 외설 시비에 휘말린 바 있다.
논란의 작품의 말로답게(?), 이 작품이 출품된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살롱전에서 이 작품은 낙선을 했고, 낙선한 화가들을 여론들에 힘입어 간신히 낙선된 작품만을 따로 전시하는 초라한 전시회에서도 우산으로 미술품을 손상하려는 등의 감상하는 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작품이다.
그 불편함을 느끼는 자들은 누구일까. 당시 19세기 후반 파리는 도시의 재계발을 통해 퇴폐적이고 향락적으로 변해갔다. 브루주아들은 이곳에서 이중적인 생활을 즐겼고 그림 속 남자들의 복장은 그런 브루주아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반영한 그림 속에 남녀가 캔버스 바깥의 감상자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
그리고 무언가 알 수 없는 의미의 표정을 남겼다. 자못 자신만만한 표정 같기도 하고, 웃음을 숨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불편함을 내비친 이들은, 이 표정들이 남긴 무언의 질문 속에서 도망치듯이 외친 말이 불편한 감정 속에 뒤섞인 것일 뿐이리라.
영화가 그림 속 남자와 여인들처럼 우리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있다. 당신은 그 시선들 속에서 무엇을 느꼈는가?
우리는 영화를 양해 낙선작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이들이 누군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긴 플레이타임에도 담기지 않은 것
영화의 캐릭터들만 놓고 보자면 전혀 개성적이지 않다. 정의를 부르짖는 검사, 그리고 깡패, 검은 흑막. 어느 영화에서나 있었을법한 캐릭터고 느와르물이라면 반드시 필요한 캐릭터들이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뻔하지 않은 것이 바로 연기자들의 내공이다. 연기자들이 각 캐릭터들을 연기할 때마다 그들의 눈빛 속에서 상황을 유추하고 때로는 관객들을 속이고 같은 배우마저 속였다.
사실 이러한 캐릭터를 살리는 연기들은 그들 3인방의 연기력이 뛰어난 면도 있지만 계속해서 캐릭터를 살려주는 자잘한 연출들이 많이 산재해있었다.
예를들어 이병헌의 부하의 부인의 생일을 챙겨준다던가, 박종팔 사장에게 라면을 건네며 콩한쪽도 나눠먹자는 거칠지만 속은 정이 깊은 남자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알고 지내던 친구 사이인 고기자의 소개로 검사 인맥을 만드려는 주선 자리였다는 것을 알아챈 우검사가 검은 손길을 뿌리치는 장면은 그가 지금까지 우직하게 달려온 인생을 함축하고 있다.
그 이외에도 이병헌과 조승우와 의 대화나 조승우와 백윤식의 조사실 면담과 같은 장면은 일부로 롱테이크로 길게 늘여 대화사이에서 그들 사이에 긴장감과 동시에 캐릭터성을 부가하기 위한 장면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장면들이 너무 과투자된 면이 있어서 극 후반에 되어서는 되레 발목을 잡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극의 긴장감을 이끌어 가기 위해서 그들의 관계 설정이 모호졌다.
첫번째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강희 배신이 극명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복선이나 안상구가 이강희를 정말로 친형처럼 생각했었다는 에피소드가 대사 이외에는 없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덕분에 우장훈의 입에서 이강희가 모든 것이 흑막이고 안상구의 팔이 그렇게 된 것도 다 이강희가 배신해서 였다라는 말을 했을 때도 그닥 와닿지 않았던 이유가 되었다.
사실 너무나 오픈된 정보가 많아서 이강희가 배신했다는 사실은 이병헌 빼고 관객들도 다 알고있는 사실인 듯했다. 따로 반전처럼 설정해둔 것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해도 이강희의 배신이 조금더 '이해할만한 수준'이 되어야한다는 것은 동일하다.
게다가 복수 종반부에 우장훈 검사가 내부자들로서 그들의 모임에 초대되었을 때, 장필우가 받은 경찰에게서의 전화 또한 의문 투성이다. 대략 추측해보기로는 그 형사가 이경영이 심어놓은 경찰쪽 쁘락치였는데 이병헌이 자수할때 있었던 증거물인 녹음기가 사라졌는데 그것에 관련해서 조사를 하던 중에 조승우의 수상한 점을 발견했고, 그것을 보고하려던 차에 캐릭터 성격상 이경영이 시켰을 것 같지는 않고 백윤식이 시켰던 사건인데 형사는 이경영이 시킨 일인줄 알고 그쪽으로 보고를 하다가 장난 전화인줄 알고 끊었다.(혹은 검찰줄을 확실히 잡은줄 알았던 이경영이 경찰줄을 버렸다는 해석도 가능하다)그래서 백윤식이 무슨 전화냐고 물었던 것도 아마 백윤식이 그래도 어느 정도 조승우에 대한 의심의 끈은 잡고 있었다라고 여겨진다. 만약 거기서 경찰에서 전화가 왔다고 몇마디만 했었어도 상황은 급변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설명이 아니라면 후반부의 급격한 변화와 완결은 너무나 허무하다. 완벽하게 그려져 왔던 캐릭터인 설계자 역할을 자처했던 숨은 권력자 이강희가 우장훈 검사의 변절에 의심을 품지 않을리 없다.
연결이 어색해질 정도로 편집한 부분이 매끄럽지 않아서 우후죽순식으로 나아가다가 허무맹랑하고 찝찝한 마무리가 되어버렸다.
당연 한정된 플레이타임 내에서 잘라내야할 것은 잘라내야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오히려 캐릭터를 살리려다가 관계설정들을 다 죽여버려 빈대잡으려다가 초가삼간 다 태운 격이 되어버렸다.(차라리 모히또 엔딩을 크레딧 뒤에 쿠키영상으로 짧게 대체하고 내용을 더 보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든다. 감독판 DVD를 팔려고 일부로 그런건가)
복수를 뿌리 내리기 위한 그들이 가진 무기
첫번째 싸움에서 안상구와 우장훈 연합은 이강희에게 패배했다. 사회의 심판을 받으리라, 사회에 정의가 살아있으리라 굳게 믿었던 그들은 오히려 사회의. 현실의 벽앞에 무너져 내렸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이병헌과 백윤식의 난투씬이 있을 때도 백윤식이 무기로 든 것은 연필이었다. 물론 그가 진짜로 연필을 들고 그들에 맞선 것은 아니다.
생각이라는 것이 무섭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사고하고 어떤 언어를 취득하느냐에 따라 생각의 내용과 방향이 달라진다. 그래서 문장이 중요하다. 단어는 하나의 개념을 지칭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단어가 모여서 만들어진 문자은 생각의 방향을 만들어내는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일단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순간, 우리는 그 문장을 끝내기 전까지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마지막에 결정되는 볼 수 있다와, 그렇게 여겨진다, 매우 보여진다의 어감 차이에 따라서 우리는 천국도 지옥도 행차할 수 있는 것이다.
글은 관념을 담는다. 진실은 사실 앞에서 무력해지고, 우리가 원하고 찾는 것은 알기 불편한 진실보다는 믿기 쉬운 달콤한 거짓말에 더 가깝다.
그가 가진 진정한 무기는 바로 이것이다.
반대로 안상구가 가진 무기는 그야말로 무력이다. 그의 진실한 고백에도 무너져내렸을 때, 그가 결국 택한 것은 무력을 이용한 탈출과 복수였다.
우장훈이 가진 무기는 정의였다. 낯간지럽기는 하지만 그가 배신한줄만 알았던건 부장검사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니고 세상이었다. 막다른 벽에 부딪혔을 때 그가 마지막으로 의지한 것은 그가 그토록 싫어했던 '연'이었다.
그 연이 장필우와 미래자동차 회장, 그리고 이강희의 연과 다른 게 있다면 이 둘은 믿음이 있었다. 이강희는 장필우를 신임하지 못했고 오히려 다른 후보로 갈아치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마지막에 장필우가 싼 똥에 함께 직격탄을 맞게 된 것이고, 이병헌은 조승우가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었기에 그들의 폭로가 담긴 내용을 퍼트린 것이다.
아이러니 한 점은 첫번째 그들이 정공법으로 택한 진실한 선언들은 묻혔지만 자극적인 영상으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라고 남긴 메세지와 함께 퍼진 영상은 급속도로 퍼지게 된다.
사람들이 폭력전과와 온갖 구설수에 휘말련던 안상구를 불신임하고 진실을 매도했던 것과 같은 방식의 복수인 셈이다.
특히 그 메세지 안에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라고 남겼던 것을 보고 이 영화의 각본은 안상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복사해놓은 미래 자동차 비자금 파일이 들어있던 USB의 십자가 목걸이도 그렇고 안상구는 아마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캐릭터인 모양이다.
카이사르의 것은 사이사르에게는 마태복음 성경구절에 나오는 예수가 말한 부분이다. 유다라는 사람이 하나님만이 유대인들의 통치자라는 구호 아래 로마 공화정에게 납세하는 것을 거부하는 운동을 일으켰고 무력으로 민족 독립운동까지 번졌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를 함정에 빠트리게 하기위해 예수님에게 납세 문제에 대해서 물어봤고, 예수님은 그들의 함정을 알아차리고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대답하였다.
이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
즉, 이 영화에서는 정치와 언론의 분리, 재벌과 정치, 뿌리깊은 유대 관계에 대한 분리의 선언을 내포한 셈이다.
결국 이 영화의 주제로 돌아가자면 만연한 학연 지연의 끈들을 통한 결탁들이 이 사회를 좀먹고 썩게 만들고 있다. 우장훈 검사와 안상구는 바로 이들을 향해 맞서는 콤비로서 꽤나 알맞다.
우장훈 검사는 정의 실현을 위해, 안상구는 복수를 위해. 서로 목적도 다르고 원하는 것도 다르지만 돈없고 빽이 없으면 결국에 버려진다는 것을 절실히 경험한 둘이다. 그만큼 그 둘을 하나로 묶어줄 경험은 또 없을 것이다.
원작에서의 기자가 아닌 경상도 검사로 설정한 이유 또한 아마 이러한 이유 였을 것이다.
안상구는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전라도 출신이고 우장훈은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학연은 커녕 지연마저도 완전히 다른 둘이여야만 가능했던 이야기인 셈이다.
한줄평
연기자들은 너무 잘해주었지만 연출자들이 그 역량에 못미치고 있다. 문제는 내부자들 중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출처 | http://blog.naver.com/silveryflow/2205482388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