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렇게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두였던 양김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3김이랍시고 김종필 가져다 붙이는 짓은...ㅋ)
저는 역대 대통령들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김대중,노무현은 머리가 좋고 도량이 넓었으며
김영삼은 머리는 나쁘나 도량이 넓었고(다만 김영삼은 의리가 깊은 타입이라 정치보복이 확실했다는게...)
이명박,박정희는 머리는 좋으나 도량이 좁았고
박근혜는 머리도 나쁘고 도량도 좁다.
삼당합당 이전의 행보만을 놓고 봤을때 김영삼이란 인물은 대단한 정치가이자 민주주의의 투사였습니다.
40대 기수론을 끌어내어 김대중을 정치권의 거두로 성장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인물이 김영삼이며
청문회 스타가 된 노무현을 발굴한 인물이 김영삼이며
독재정권의 서슬에도 굴하지 않고 할 말,할 일을 한 인물이 김영삼이며
자신의 목숨조차 아끼지 않고 투쟁한 인물이 김영삼이었습니다.
양김은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라이벌로서 경쟁을 벌였기에 그만큼 성장할 수 있었고 두 사람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비록 그들의 정치가 구시대의 한계를 분명하게 가졌을지라도)
그는 타고난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주변 인물들을 끌어들이는 카리스마와 주변 인물을 챙길 줄 아는 친화력을 겸비한 인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SQ가 매우 높은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언론인과의 친분을 통한 언론플레이는 별로 칭찬할만한 구석이 못되지만) 거기에 대단한 직감과 불굴의 의지, 그리고 그것을 관철하는 실행력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40대 기수론, 자택연금, YH 사건, 국회제명, 단식투쟁, 그리고 수많은 소신발언.
그는 최고의 정치가이자 투사였습니다. 그의 라이벌인 김대중이 우유부단한 면모가 있었음을 생각하면 더욱 빛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열거한 장점은 이후 고스란히 단점으로 넘어가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투사인 동시에 스스로 대통령이 되기를 소망하는 야망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생긴 모순이기도 합니다.
삼당합당 이전 87년 대선 패배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는 복잡한 문제이고 쌍방, 아니 다중과실이니 굳이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이때 갈라진 두 사람이 다시 합쳐지지 못했음은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든 -88년 총선의 패배가 위기감을 안겨주어서인지,그 패배가 김대중에 대한 라이벌의식과 콤플렉스를 자극해서인지,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야망을 이루기에 가장 적합한 방법이라고 판단해서인지- 삼당야합은 그가 대한민국의 역사에 지은 다시없는 중죄입니다.
제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안타깝게 여기는 게 세가지 있는데
하나는 반민특위의 어이없는 해산으로 친일파 문제가 아직까지도 명백히 정리되지 못하고 있는 점이고
둘째가 삼당합당으로 대한민국 정치에서 지역주의가 고착된 것이며
셋째는 국민의 정부-참여정부 10년동안 수구세력를 위축시키고 진보를 성장시키지 못한 일입니다.
삼당합당은 충청도,경북,경남을 기반으로 삼는 세 정당이 전라도를 기반으로 삼는 정당을 왕따시키는 추잡한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여소야대의 정국을 선택한 국민의 민의를 좌절시키는 추잡한 목적을 가졌으며
그 결과로서 아직까지도 대한민국 정치판에 지역주의가 만연하게 한 추잡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가 민주주의의 투사라면 김대중처럼 합당제의를 단칼에 잘라버렸어야 옳은 일이었습니다.
삼당합당의 과오가 과거 민주화투사로서의 김영삼의 투쟁과 이후 대통령으로서의 치적을 덮어버릴 수는 없지만 그것은 분명한 잘못으로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비판받아 마땅한 일임은 틀림없습니다. 이후 1992년 총선에서 그가 발굴한 노무현을 깎아내리면서 12.12쿠데타 주역인 허삼수를 지원유세했던 모습은 삼당합당의 모순을 보여주는 광경으로 남을 것입니다.
이후 민자당 내의 권력투쟁...역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잘 모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만 어차피 민자당은 그놈이 그놈입니다. 김영삼을 긍정적으로 봐줄 부분은 이후 대통령 시절에나 나옵니다.
40대 기수론 시절에는 한수 아래 취급하던 김대중에게 일격을 맞고 패배, 87년 대선에서는 김대중과의 분열로 패배. 삼당합당으로 평생 먹을 욕 다 먹음.정치인생이 패배로 점철된 김대중만큼은 아니지만 김영삼도 별로 순탄한 정치인생을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초등학생중학생때부터(초등학생때는 일제시대였는데 대통령은 무슨...) 대통령을 꿈꿨다는 김영삼은 마침내 대통령이 됩니다. 민자당 내의 치열한 권력투쟁을 이겨내고 14대 대선의 다크호스 정주영과 평생의 라이벌 김대중을 모두 떨쳐내고 거둔 승리입니다.('우리가 남이가'로 유명한 초원복국집 사건이라든가 전직 민주화투사 주제에 대선 직전에 간첩단 사건을 터뜨렸다거나 하는건 접어두고서라도. 이선실 간첩단 사건은 조작은 아니지만 터진 시기가 너무나 절묘했습니다. 어째서 13,14대 대선 전에는 북풍이 불고 15,16,17대 대선때는 없었는지.... 총풍사건은 '야당'이 저질렀으니 성격이 약간 다릅니다.)
대통령으로서의 김영삼은 치적과 실책이 너무나도 극명하게 엇갈립니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그의 성격과도 연관되는 부분들입니다.
하나회 척결,공직자 재산공개,금융실명제 실시,조선총독부 철거 등은 김영삼이 아니면 하지 못했을 일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김영삼의 결단력과 행동력이 빚어낸 업적입니다. 생각이 많은 김대중이라면 저렇게 과감하고 빠르게 행동하지 못합니다. 특히 하나회 척결은 엄청난 속도전으로 과거 수도 없이 비토,쿠데타 위협을 가하던 군부를 저항할 시간조차 없이 날려버렸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만 합니다.
그러나 대통령 김영삼을 긍정적으로만 평가하기에는 부정적인 면이 너무 큽니다.
김영삼은 서울대 졸업장이 있긴 하지만(청강생이었고 성적이 영 별로였지만) 학력이 딱히 인간의 지성을 대표하지는 않습니다. 대한민국 현대사 최고의 천재 중 하나인 라이벌 김대중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냉정히 말해서 그는 별로 지적인 인간은 아니었습니다. 이게 어째서 문제가 되느냐, 국정철학의 부재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이는 한나라당,새누리당 정권이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는 문제이며, 지성과 도량을 모두 겸비한 대통령만 가질 수 있는 것이 국정철학입니다.) 김영삼의 국정에는 철학이 없었습니다. 경수로와 불바다발언으로 대표되는 대북정책의 난맥상은 이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국정철학이 없는 정권은 무엇이든 갖다붙이기를 좋아하는데, 박정희때는 '반공','유신' 등, 김영삼때는 '세계화', 이명박 때는 '녹색성장', 박근혜 때는 '창조경제'가 그 갖다붙이기의 대상이 되겠습니다.)
또한 주변 인물들을 잘 챙겨주는 그의 성격 또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통령으로서 정책의 기밀성을 중시하던 성격까지 더해져(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 실시 때는 이게 대단한 장점으로 작용했지만) 김영삼 정부의 인사정책은 완전히 엉망이 됩니다. 초대 내각의 대다수가 이런저런 비리로 낙마했으며 통일부 장관은 무려 7명이나 되었습니다.
국정철학의 부재와 인사정책의 난맥상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이것이 '사고공화국'의 악명과 외환위기의 발생에 크게 기여했음은 분명합니다. (이후 노무현 정권 때 정부 차원에서 안전관리 매뉴얼을 만든 것과 이명박 정권때 이를 팽개친 것이 '국정철학'의 차이를 보여준다고 봐도 좋습니다.) 하나회, 금융실명제와 같은 겉으로 드러난 문제는 빠르게 도려낼 실행력이 있었지만 속으로 곪은 환부를 진단할 능력은 없었던 겁니다.
따로 언급할 기회는 없었지만, 작금의 비정규직 문제의 근원이 된, 헌정이래 최대의 노동쟁의를 불러온 노동법 개악 또한 그의 큰 잘못으로 꼽을 만 합니다.
초등학생이 존경하는 인물 1위, 말년 지지율 14%. 대통령 김영삼을 보여주는 숫자들입니다.
앞서도 언급했습니만, 김영삼은 도량은 있으나 머리는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불굴의 의지와 과단성을 갖춘 인물이었지만 잘못된 방향을 향했을 때는 그것이 아집으로 변하게 됩니다. 대단한 카리스마와 뛰어난 대인관계능력을 갖춘 인물이었으나 그것은 독단과 잘못된 인사정책, 철저한 정치보복을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삼당합당과 외환위기의 발생,노동법 개악의 잘못은 어떻게 해도 덮을 수 없는 크나큰 과오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소신발언의 사나이 김영삼,독재정권을 두려워하지 않던 투사 김영삼,목숨도 아끼지 않던 투사 김영삼,현대사의 큰 인물이자 대한민국 정치의 거두 김영삼을 덮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오욕이 교차하는 삶이라고 하면 딱 맞을 것입니다.
여적
한가지 정말 마음아픈 일은 김대중과 김영삼이 87년 대선에서 갈라진 이래 끝까지 화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김대중이 당선되기 전에는 민주계 대통합의 논의가 있었고 당선 후에 김대중이 화해를 제의했으나 모두 무산되었습니다. 결국 김대중이 사경을 헤매던 때에나 김영삼이 찾아와서 사과의 말을 남김으로서 겉으로는 화해한 것이 되었으나 여전히 동교동계와 상도동계는 다른 정당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 결과 아직까지도 '우리가 남이가'로 상징되는 PK-TK 카르텔이 건재한 것이 현실입니다. 과거 4.19 혁명과 부마항쟁의 근원지였던 PK가 현재는 새누리당의 지지세력이 됐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하기사, 대구도 과거에는 '조선의 모스크바'였고 전라도가 박정희를 지지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사실 상도동계라고 해봤자 보스께서 잘못된 길을 가시겠다는데 붙잡지 못하고 그저 따라간 작자들입니다만...(보스가 모든 것인 보스정치의 한계가 그렇습니다. 이후 꼬마 민주당계가 겪은 고생을 생각하면 명리로서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딱히 나이가 많은 편도 아니고 오히려 새파랗게 어린놈이라고 불릴 만한 나이입니다만, 이렇게 하나둘씩 역사의 뒤안길로 떠나가는 것을 보면 참 세월이 무상하다는 생각이 들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