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선조는 왕이 될 연유가 없었던 인물입니다, 명종이 붕어 하는 그 순간까지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았고 선조 즉 하성군 보다 항렬이 높은 즉 계승 순위권이 높았던 이가 여렀 있었으나, 명종의 왕후 즉 나라안에서 가장 높은 이가 공석인 상황에서 차석이던 인순왕후 김씨가 어린 시절부터 명종과 정이 두터웠던 것을 사유로 하성군을 추대했던게 전부입니다.
옛날 이야기에 덕흥군의 세 아들, 하원군, 하릉군, 하성군을 불러다 익선관을 주고 가장 잘 어울리는 아이에게 상을 주겠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하성군이 제대로 답했기에 후계자로 낙점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현실적으로 별로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허황됨은 당장 돌아가시기 2년전 병으로 드러누워 오늘 내일 할 때 조차 어땠는가를 본다면 쉽게 알수 있습니다.
(생략)
“요즈음 신하들을 접견하지 않으신지 오래되었으므로 신들이 한번 천안(天顔)을 뵙고자 하는 마음 간절하여 날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늘 특별히 인견하여 주시니 신들은 고맙고 기쁠 뿐만 아니라, 천안도 매우 화평(和平)하셔서 오래지 않아 쾌차하실 날을 볼 수 있을 것이라 더욱 기쁘고 다행스럽습니다. 그런데 동궁을 오래 비워두고 국본(國本)을 아직 정하지 않으시니 요즈음 인심이 불안해 하고 의심하는 이유가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성상의 춘추가 한창이시고 인신(人神)이 모두 도우니 머지않아 성사(聖嗣)의 탄생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본은 반드시 미리 정해야 하는 것이니, 그렇게 해야 인심이 매이는 바가 있고 종사가 힘입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상께서 이 일에 대하여 생각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신들은 항상 절박하게 걱정하고 있었는데 오늘 인견하시니 감히 이 뜻을 여쭙니다.”【이때에 상이 열이 심하여 잠시도 듣기 힘들어 하므로 이 계사를 올렸는데, 상이 보시고 불편한 기색이 많았다. 재삼 읽어보고 오래 있다가 답하였다.】하니, 답하기를,
“요즈음 오랫동안 인견하지 못하였는데 오늘 인견하니 참으로 우연한 것이 아니다. 또 나의 걱정도 항상 세자에 대한 일에 있다. 그러나 큰 일을 미리 정할 수 없으니 지금 형편으론 그렇게 할 수가 없는 일이다.”하였다. 준경 등이 재차 아뢰기를,
“군신(群臣)들의 뜻도 감히 즉시 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께서 만일 생각하고 계신 곳이 있으시다면 미리 마음속으로 정하시고 가끔 인견하시어 배양하는 뜻을 보이시면 종사는 그래도 힘입는 바가 있게 될 것이고, 후일 성사가 탄생하게 되면 저절로 물러가게 될 것이니, 이것이 대계에 통달한 생각입니다.
고사를 상고하면 송 인종(宋仁宗)은 춘추가 24세였는데도 오히려 계사(繼嗣)를 생각하시어 종성(宗姓)을 궁중에서 양육시켰고, 고려(高麗)의 성종(成宗)·목종(穆宗)은 모두 성현의 자품은 아니었으나 겨우 30 남짓한 연세에 현명한 단안을 내려 계사를 정하였는데 논하는 자는 이것을 아름다운 일이라고 칭송합니다. 고사에도 이와 같은 전례가 있었으므로 감히 아룁니다.”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전(內殿)에서 생각하여 처리할 것이다.”
당시 명조 실록의 기사를 보면 이렇습니다, 말 그대로 오늘 내일 하는 그 상황에서 조차 명종은 후계자를 생각하고 있지 않았고, 그럴 마음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명종의 행동은 2년후 눈을 감는 그 순간 까지 계속되었지요.
정이 두터웠다..라고 하는게 어찌보면 좀 과한 표현일수 있으나 실제로 이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막연한게 사실입니다.
즉위할당시 모친상을 치르고 있던 하성군은 어떠한 후원 세력도 없었고, 세자로서 교육도 받지 못한 무지하고 동떨어진 이로서, 이러한 갑작스러운 즉위는 이후 조선의 앞날을 크게 뒤흔들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인물 됨을 떠나 말 그대로 백지인 상태로 왕좌에 올랐으니, 그가 행하여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정통성을 세우고, 왕권을 강화하는 일이었습니다, 특히나 오랜 기간 단일 왕조가 이어져 내려오면서 지속적으로 쌓여온, 조세, 재정, 군 등 여러 썩어들어가는 문제들에 대하여 칼을 대야 했으나 이와 같은 고립무원의 상황속에서는 개혁이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요.
홍문관 부제학 노수신, 직제학 김난상, 전한 민기문, 응교 유희춘, 교리 황정욱, 수찬 송응개(宋應漑)·신담(申湛), 저작 조정기 등이 6조목을 상소하였다. 첫째는 뜻을 세울 것, 둘째는 집을 다스려 정제하게 할 것, 세째는 정통(正統)을 높일 것, 네째는 조정을 바르게 할 것, 다섯째는 시비를 정할 것, 여섯째는 음사(淫祀)를 금할 것 등이었는데, 상이 비답하였다.
“이 소장을 보니 모두가 격언으로서 매우 가상하다. 상소에 ‘사로(仕路)가 바르지 못하고 공도(公道)가 펴지지 못하여 관직을 도모하는 자가 우선적으로 벼슬자리의 좋고 나쁨을 선택하고, 주의(注擬)하는 자도 한결같이 그들의 청탁에 따름으로써 정령(政令)이 버려져 시행되지 못하고 간혹 시행되더라도 끝내 이루지 못한다.’ 하였다. 이는 나의 마음이 부정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지 못해서 그러한 것이니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그리고 주의하는 데 있어서 한결같이 청탁에 따른다고 한 것은 아마도 전조(銓曹)를 지적하여 말한 것 같다.
그렇다면 전조도 책임이 없다 할 수 있겠는가? 석 상궁(石尙宮)은 선조(先祖) 때 궁중에 있었으나 시위하던 사람이 아니었는데 무슨 제멋대로 한 죄가 있겠는가. 근일의 언문(諺文) 편지도 역시 알지 못하는 것이니 공론(公論)을 따르지 않겠다. 남곤(南袞)은 중묘조(中廟朝)의 대신이어서 그의 관직을 삭탈하는 것은 미안할 듯하다. 정업원(淨業院)은 바로 선왕(先王)의 후궁들이 거처하는 곳이므로 선조(先祖) 때에도 혁파하지 않았던 것인데 지금 혁파하는 것은 미안하다.”
-선조 1년
(생략)
“이 말은 옳지 않습니다. 단지 말한 내용이 무엇이었느냐가 문제입니다. 말한 것이 옳다면 체통에 무슨 방해가 되겠습니까. 승지도 경연의 참찬관(參贊官)이니 청대하여 일을 말하는 것도 그 직분입니다. 이준경의 말은 크게 편집(偏執)되어 있습니다.
지금 선정이 거행되지 않아서 모든 법도가 폐이(廢弛)된 판국에 만약 분연히 일으켜 한 시대의 규구(規距)를 새롭게 하지 않고 그저 일상 해오던 옛날 법도만 따르고 지킨다면 어떻게 적폐(積弊)를 제거하고 큰일을 성취하겠습니까. 대신으로서 임금을 정당한 길로 인도하지 못하고 다만 근규(近規)를 준수하는 데 힘을 쓰게 하니 자못 아랫사람들의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하였다. 이이가 상에게 아뢰기를,
“정치를 하려면 먼저 시대를 잘 인식해야 합니다. 임금이 잘 하려는 의욕이 있어도 권신이 국정을 독단하거나 전쟁이 일어나 소란스러우면 아무리 뜻이 있다 하더라도 다스리는 일을 성취하기 어렵습니다. 지금은 다행히 권간이나 전쟁이 없으니 지금이야말로 전하께서 급급히 하셔야 될 때입니다.”
(생략)
- 선조 3년
직제학(直提學) 이이(李珥)가 상소하였다.
“오늘날을 보건대, 정치는 옛 규례만을 지키고 사람은 익숙한 것만을 취하여, 묘당(廟堂)320) 에는 건백(建白)하는 의논이 없고 신하들은 일을 좋아한다는 비방을 피하므로, 정심(正心)·성의(誠意)는 이미 헌신짝같이 되고, 왕도(王道)·인정(仁政)은 어리석은 선비의 헛말이 되고, 장주(章奏)는 해사(該司)의 고지(故紙)가 되고, 부첩(簿牒)은 서리(胥吏)의 세업(世業)이 되고, 시종(侍從)은 휴가를 고하고 직사(職事)를 폐기하는 것을 고상한 것으로 여기고, 사류(士類)는 애매하게 결정하지 않고 입을 다무는 것을 중도에 맞는 것으로 여깁니다. 또 뭇 관원이 자주 바뀌어 온갖 일이 수거(修擧)되지 않으며, 사사로운 일을 일삼는 자를 지혜롭게 여기고, 공변된 일에 봉사하는 자를 어리석게 여기며, 시속에 따르는 자는 어질게 여기고, 독특하게 뛰어난 자를 불초하게 여깁니다.
설령 아름다운 덕을 품고 기특한 생각을 품은 호걸(豪傑)의 선비가 조정의 반열(班列)에 끼어 있더라도 반드시 모순되고 견제되어 한 계책도 시행하지 못할 것인데, 더구나 재주가 모자라고 병이 깊으며 말이 오활하고 행적이 외로운 신이겠습니까. 쇠잔한 뿌리로 약하게 선 처지로 뭇 비난과 비웃음 가운데에 혈혈 단신이라 죄짓는 것을 면할 수 없을 것인데, 더구나 곤직(袞職)을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마땅한 사람을 얻어서 정치하여 한 시대를 구제하시려면, 반드시 건강(乾剛)의 뜻을 분발하고 삼황 오제(三皇五帝)의 자취를 깊이 추구하여, 위아래가 서로 맹세하고서 구습(舊習)을 통렬히 씻어내고 뛰어난 사람을 널리 불러들여 뭇 지위에 벌여 두어 구습을 따르는 폐단을 일체 혁파하고서야 국가의 형세가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선조 6년
이이가 또 아뢰기를,“상께서 만약 유위하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당시 제일의 명사들을 조정에 모아 상규(常規)에 얽매이지 말고 출신(出身)이 아닌 민순(閔純) 같은 사람들에게 모두 경연(經筵)의 직명(職名)을 겸대(兼帶)시켜 경연에 출입하여 논란(論難)하게 하고, 또 반드시 경연 때가 아니더라도 불시(不時)에 불러 보시어 서로 정이 붙은 뒤에야 일을 할 수 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연 이외에 어떻게 군신(群臣)을 자주 접견하겠느냐.”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조종조에서는 승지가 항상 들어가 일을 아뢰었고, 시종관(侍從官)도 무시(無時)로 독대(獨對)하여 의심스러운 일을 논란하였으며, 성종(成宗)·중종조(中宗朝)에서도 모두 그렇게 하였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과 옥당이 입번(入番)하면 내가 자주 불러 보겠으나, 승지가 일을 아뢰는 것은 어려울 듯하다.”하였다.
- 선조 8년
선조 초기의 상소와 강연들의 '일부'입니다, 보시다시피 일관되게 나라를 바로 세울것을 간하는 내용들로 거의 이러한 것은 우리도 잘 알다시피 선조 말년까지 고쳐지지 않고 주욱 유지되어왔으며 오히려 말년에는 그간 신하들을 이간질 시켜온 댓가로 붕당정치의 문제점까지 더해지게 됩니다.
말 그대로 이후의 왜란의 행적들 까지 보자면 좋은 왕으로서 선정을 베풀었다고...보기는 물론 어려운게 사실이나 다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정책적인 문제점을 오직 선조의 '개인적 능력'에만 비춰서는 안될것 입니다.
중요한것은 그의 배경이지요. 본디 왕권이란 왕이 홀로 세울수 있는게 아닙니다, 정통성을 비릇하여 왕권 아래에서 그를 받쳐줄 권력과 그를 따르는 차기 정국의 기반이 되는 신하들이 있어야 할터이지만 선조는 16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왕이 되었습니다.
왕손으로서의 기본적인 교육은 있었으나 세자로서의 교육은 없었고, 인순왕후 김씨가 말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선조실록의 총서에, 선조가 왕위에 오르는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명종의 병문안에 참석하였고, 그의 정이 두터웠더라가 전부이겠습니까?
이런 갑갑한 상황속에서 차츰 실무를 통해 정치적 능력을 향상 시켜나간 선조가 행한 것은 신하들에 대한 이간책을 통한 권력 강화 및 정권 유지 였습니다,
이는 다음 글에서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