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고도(古都) 서울'. 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온 수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의미다. 실제 서울 사대문 안에는 다섯 개의 궁궐이 존재하고, 종묘, 옛 귀족들의 정자, 성곽들이 그대로 존재한다. 사라진 것은 그대로 복원하고, 흔적이 남겨진 것은 복구 작업도 한다. 화재로 유실된 남대문과 한양성곽이 대표적이다.
반면, 부동산으로서의 투자 가치로만 바라보는 곳 또한 서울이다. 지가 상승에 따른 이익이 토지주들에게 돌아가다 보니 거품 같은 욕망과 개발욕이 난무한다. 주거권이라든지, 세입자 생존권이 굴착기로 부셔지는 이유다.
서울이라는 공간 내에는 이처럼 양가적 성격이 공존한다. 역사적 유물 내지는 장소를 담고 있는 보관소로서의 성격과 전도유망한 부동산 투자지로서의 성격이 그것이다.
최근 을지로 지역, 즉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정비사업이 논란이다. 서울시는 올해 말까지 토지주, 상인, 시민사회단체, 전문가와 협의를 거친 뒤, 도심전통산업 생태계 유지를 위한 종합대책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물론, 그때까지 사업은 전면 중단한다.
오래된 음식점 등 을지로 일대 노포(老鋪)들의 생존방식을 고민해보겠다는 서울시의 의지다. 그간 서울이라는 공간을 부동산 투기지역으로만 바라보던 시각에 어느 정도 경종을 울리는 선택이었다. 물론, 이를 두고 서울시가 토지주의 권리를 해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프레시안>에서는 이러한 논쟁과는 조금 다른 쟁점을 제기해보고자 한다. <서울 선언>(열린책들)의 저자인 김시덕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는 '서울은 어떤 도시여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김 교수에 따르면 서울, 그리고 을지로라는 공간 속에는 '서민의 문화'가 즐비하다.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적산가옥과 개량한옥, 그리고 1970~1980년대에 지어진 가옥들이 이곳 을지로에는 혼재해있다. 그리고 이런 가옥들은 당시 민중과 서민들이 사용한, 일종의 문화재인 셈이다. 김 교수는 이런 공간이 일거에 철거되는 게 정당한지를 묻는다.
"평민 또는 노비의 후손으로 태어나 기름밥 먹는 환경에서 자라난 저는, 조선 시대의 지배계급이 남긴 궁궐이나 정자가 현대 한국 서민들의 낡은 집보다 더욱 가치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서울 선언> 중
김 교수를 만나 을지로 지역의 역사적 의미, 그리고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지점을 들어보았다. 아래 그와의 일문일답.
▲ 을지로에 있는 공구가게. ⓒ프레시안(허환주)
"우리는 남성 중심, 왕조 중심 문화만 남긴다"
프레시안 : 현재 을지로 지역의 재개발 문제가 이슈다. 박원순 시장은 사업중단을 선언하고 올해 말까지 여러 이해관계 당사자와 논의해서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김시덕 : 나는 결론만 말한다면 회의적이다. 일례로 옥바라지골목을 생각해보라. 당시 박원순 시장이 중단했으나, 이후 어떻게 됐나. 다 밀렸다. 며칠 전에도 근처를 지나갔는데, 이제 옥바라지골목의 옛 건물은 한둘 정도 남아있었다. 내가 갔을 때는 그 골목마저도 공사를 시작하던 중이었다. 이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프레시안 : 옥바라지골목이 보존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김시덕 : 옥바라지골목은 여성의 문화가 남아있는 공간이라고 보면 된다. 서대문형무소가 맞은편에 있지 않나. 독립운동했던 남편, 아버지, 아들 등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여관방에서 몇 달, 몇 년을 지내는 거다. 그렇기에 당시 여성들의 문화를 유지하는 공간인 셈이다. 그런데 그 공간이 역사적 의미가 없다며 아파트가 들어서는 식이다.
프레시안 : 서대문형무소가 현재의 역사공원으로 만들어질 때도 여성 문화가 사라졌다고 들었다.
김시덕 : 역사공원을 만들 당시, 일제시대 때 일본군 성 노예로 희생당한 여성들의 추모시설인 위안부기념관도 함께 이곳에 건설하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하지만 남성 중심의 독립 운동 관련 단체들이 위안부 여성들의 희생을 그곳에서 기리면 우리 민족이 항일 투쟁보다 일제에 의해 수난만 당한 민족이라는 인식을 관람객들에게 주게 된다면서 반대운동을 전개한 적도 있다.
프레시안 : 결국, 하나는 이념의 이유, 또 다른 하나는 자본의 이유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여성의 문화와 역사가 사라진 듯하다. 을지로 이야기를 해보자. 을지로에도 그러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물이나 문화가 남아있는가.
김시덕 : 대표적으로 전기종, 전현철 등 독립운동가들이 하숙했다고 추정되는 벽돌건물이 그 곳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을지로는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주택의 특색을 보인다. 그것은 20세기 전기 만들어진 개량한옥과 적산가옥(일본식 주택)이다. 적산가옥의 시작은 충무로다. 그곳에서 출발해서 명동, 을지로로 확대됐다. 일본인들의 이른바 조선 진출이었다. 충무로가 당시는 일본인들의 타운(town)이었다. 통감부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확대되다가 1930년대 다음 단계로 청계천으로 넘어가려다 조선의 건축왕 정세권 선생이 이를 저지한다. 조선인들에게 북촌 일대에 개량한옥을 대량 보급해서 일본인의 진출을 저지했다. 여담이지만 그래서 북촌 한옥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집이 아니라 식민지 시대 중산층 조선인들의 집이 됐다. 어쨌든 정세권 선생의 방어로 을지로는 일본인들의 적산가옥을 막는 최북 전방이 되었다.
▲ 일제시대에 지어진 적산가옥 뒤로 오피스 건물이 서 있는 을지로. ⓒ김시덕
"존재하고 있으니, 존재해야 한다"
프레시안 : <서울선언>에서 주장한 바에 따르면, 현대 서울의 독특한 풍경은 '삼문화 광장'이라는 시간의 지층, 시층(時層)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그러한 풍경을 을지로에서도 볼 수 있을 듯하다.
김시덕 : 삼문화 광장은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에 있는 틀라텔롤코 광장의 다른 이름이다. 이곳에는 아스텍 시대, 에스파냐 식민지 시대, 그리고 현대의 건축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기에 '삼문화', 즉 '세문화의 광장이라고 한다. 을지로도 마찬가지다. 일제시대 때 지어진 개량한옥과 적산가옥이 1960년~1970년대 지어진 주택과 같이 공존한다.
그리고 1970~1980년대 성장시대 때 지어진 건물들도 이곳 을지로에는 많다. 초기 오피스빌딩, 5층짜리 건물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건물들은 마포, 영등포, 을지로 일대에 많이 있었는데, 1990년대부터 한국에 돈이 생기고 고도성장 시대로 접어들면서 고층 오피스텔과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나머지 지역은 거의 다 사라지고 이제 여기만 남았다. 결국, 을지로는 구한말, 일제시대, 그리고 한국의 고도성장 시대가 겹쳐 있는 흔치 않은 공간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프레시안 : 그런 문화적 의미가 있는 공간이지만 현재 철거가 진행 중이다. 하지만 역사적 유물이나 전통적인 건물은 보존하려 노력한다. 적산가옥 등이 문화적으로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닌가.
김시덕 :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해보자. 왕조, 즉 기득권 문화는 우리가 어떻게든 보존하려 한다. 없던 것은 복원이라는 이름의 창조를 하고 있다. 우리의 얼이라고 하면서 어떻게든 재건하려 한다. 1968년에 세워진 남산 식물원의 경우, 2006년 철거됐다. 그리고는 옛 한양 성곽을 발굴, 복원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수많은 서울 시민들이 찾은 남산 식물원을 헐고 조선 왕조 시대의 성곽을 복원하는 식이다. 시민들의 문화는 사라지고 왕조의 문화가 부활하는 셈이다.
프레시안 :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문화적 가치가 있기 때문 아닌가.
김시덕 : 문화적 가치를 따진다면 고려 시대, 백제 시대로까지 가야 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딱 조선시대까지 만이다.
프레시안 :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김시덕 : 조선시대는 양반 질서가 만들어진 시기다. 그리고 가부장제가 확고하게 만들어진 시기다. 당시만 해도 양반은 극소수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라. 누가 자신을 상놈 내지는 중인이라고 하는가. 모두가 양반의 후손이다.
프레시안 : 실제 자신의 조상이 상놈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대부분 가정에 족보가 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이 양반의 후예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양반의 수가 너무도 많다.
김시덕 : 그렇다. 우리나라 족보의 99%가 19세기 말, 그리고 20세기 초에 만들어졌다. 저명한 한국사 연구자인 고(故) 이기백 선생이 쓴 <족보와 현대사회>라는 글을 보면 1920년에서 1929년에 이르는 10년 간 출판된 당시 조선 시대 도서 건수를 보면, 족보는 1920년에 63건, 1929년에 178건으로서, 매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평민·노비의 문화는 우리 조상의 것이 아닌 게 된다. 그렇게 되면서 '우린 양반이니 평민·노비 문화를 챙길 필요가 없다'는 도식이 성립된 셈이다. 이는 평민·노비 문화를 무시하고 외면하는 풍토를 만들었고, 이것이 지금까지 유지되는 식이다.
프레시안 : 그런 정서가 이어지다 보니, 시민이라 불리는 이의 건물과 공간들은 귀하게 여겨지지 않는 듯하다. 그러니 자본의 논리, 이념의 논리로 사라지는 듯하다.
김시덕 : 서울에 적산가옥이 존재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존재하고 있으니 존재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구한말, 그리고 식민지까지 일본인은 물론, 조선인도 그 적산가옥에서 살았거나 개량한옥에 살았다. 해방 이후에는 식민지 시대보다 더 긴 기간 그 공간에서 조선인이 살았고, 이는 6.25 전쟁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다. 이를 부정하면 지난 80년간 우리의, 민중의 역사가 사라지는 것이 된다. 그런 역사를 우리는 헐어버려야 하는가.
▲ 철거 공사가 한창인 을지로 3구역. ⓒ프레시안(허환주)
"어느 문화가 더 중요하다는 건, 편협한 세계관"
프레시안 : 그런 의미를 인정한다 해도, 을지로 일대는 노후한 게 사실이다. 이를 재정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시덕 : 물론, 무조건 을지로를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을지로라는 공간에서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정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을지로 같은 아주 독특한 공간이 서울에서 한 두 개 정도는 있으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프레시안 : 이러함 문화적 가치가 있는 공간을 보존하면서 개발하는 방법은 없을까.
김시덕 : 없다. 사실 한국은 그러한 문화적 가치를 빼고 바라본다면 도시화가 매우 덜 됐다. 유럽 도시의 경우, 18세기에 이미 지금 인구가 살아도 될 정도로 용적률이 올라갔다. 그에 비한다면 한양, 경성은 거대한 시골이었다.
프레시안 : 을지로 지역의 개발은 세운상가의 경우, 가치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도시재생사업이 진행되지만 나머지 지역은 재정비구역으로 전면 철거 뒤 재개발하는 식이다. 이와 관련해서도 여러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김시덕 : 세운상가를 남겨두는 것을 두고 오세훈 시장과 박원순 시장과의 차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왜 세운상가만 가치가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나는 세운상가보다 그 주변의 적산가옥과 개량한옥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김시덕 : 1968년에 지어진 세운상가는 당시 개발독재의 잔재라고 봐도 무방하다. 태평양전쟁 시기, 미국 항공기가 경성 시내를 폭격할 가능성이 제기되자, 폭격에 따른 불길이 다른 곳으로 쉽게 옮겨지지 않도록 종로부터 충무로 사이의 좁고 긴 구간의 목조 주택이 철거되었다. 그런데 그 공간에 철거민들이 판잣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고, 박정희 시대에 김현옥 서울시장이 이를 밀고는 그곳에 오늘날의 세운상가·청계상가·삼풍상가·진양상가를 세웠다.
반면, 세운상가 주변 일대는 해방 이후, 시민들이 사무 활동을 하고, 공장을 지어 운영했던 공간이다. 세운상가는 처음에는 철거민들, 즉 월남민, 피난민, 농촌민들을 밀어내고 지었고, 지금은 또다시 그 옆에 있는 것들을 싹 밀어내고 자기만 살아남는 식이 됐다. 나는 해방 이후 시민들이 활동했던 공간에 서울의 가치는 더 있다고 생각한다. 지배자에 의해 만들어지고, 보존되는 공간만이 서울의 역사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울의 모든 건물, 거리, 골목 등에는 나름의 뜻이 있고 역사가 존재한다. 이를 무시하고 어느 문화가 더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편협한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오랜 시간 감사하다.
---------------------------------------------------------------------------------------------------------------------------------
고려, 삼국시대까지 까지 문화재 복원이 가지못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너무 오래되어서 유구 등 흔적을 발굴하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알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반면 조선시대의 건축물들은 형태를 유추하거나 그려진(혹은 쵤영된) 사료들이 비교적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가능한거고요. 뭐 양반문화니 어쨌느니 하면서 쓸데없이 계급투쟁적, 젠더투쟁적으로 볼 일이 아니라는겁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그것도 어이가 없네요. 고려, 삼국시대때는 귀족이 없었는줄 아는지... 양반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지배계층이 귀족들이었는데 말이죠.
대부분의 문화유산들이 남성위주로 되어있는것도 당연한거 아닌가요? 인류 역사가 그렇게 흘러왔으니까요. 야생에서 수렵생활 하다가 부족을 이루고, 국가체재를 형성하고 귀족정에서 왕정으로, 시민의식이 발달해 시민혁명을 거쳐 민주주의가 들어서고 그 인권의식이 차츰 여성에게까지 확대되어 오늘날의 현대사회가 되온것인데, 이런건 마치 그 과정은 싹다 무시하고, 민주사회 이전의, 성평등 이전의 가치들은 무슨 야만의 시대 산물인양 보는거같아 매우 불편하네요... (저는 되려 이런것도 서구에 대한 사대주의적인 태도라 보여집니다. 무슨 BC AD나누듯이 예수 탄생전후로 시대를 구분하는것도 아니고;)
저는 역사나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관점중에서 이런관점이 매우 불편하고 두렵네요. 이런게 "궁궐따위 구시대, 봉건시대 기득권층의 산물일 뿐이다. 불태워 없애자! 남성위주의 성차별적 역사인 조선의 역사와 그 문화유산을 지워버리자!"같은 문화혁명 비스무리하게 발전될가 두려워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