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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들이 없나봅니다.
1970년대는 북한보다 못 살았죠. 70년대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선전한 내용이 80년이 되면 집집마다 자가용이 생기고 쌀 밥에 고깃국을 먹는다는 거였습니다. 70년대는 남한에서 경제 위기의 연속이었죠.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고. 두번의 유가 폭등으로 남한 경제는 위기 그 자체였죠. 박정희가 암살당한 이유도 결국은 경제위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건 김재규가 부마항쟁 보고서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죠.
부산 마산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중정 요원들을 풀어서 원인을 분석한 결과는 학생들 주도의 정치적 동기보다 경제난과 실업난 때문에 들고 일어난 젊은 노동자들이라는 것이 중정의 분석이고, 그래서 정치적 제스쳐나 군부의 위력 과시로 해소될 성질이 아니라는 것이 김재규와 중정의 판단, 그냥 밀어버리면 된다는 것이 차지철의 판단, 박정희가 차지철보다 더 심한 말을 하자 총을 당기게 되는거죠.
박정희 말년 내내 남한은 암울한 나날의 연속이었죠. 박정희의 철권 통치와 인권 유린으로 국제적으로 고립되고(그래서 국민들 호도하려고 가봉의 봉고 대통령을 여자와 돈으로 데려와 기념우표까지 발행했음), 유가 폭등으로 경제는 어렵고 물가는 폭등하고 그런 와중에 박정희가 암살되게 됩니다.
70년대에 자가용이 있는 집이라면 정말 대단한 부자집. 그렇게 잘 사는 집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죠. 남한에서 보통의 시민들이 돼지고기를 편하게 먹을 수 있었던 시절은 노태우 집권 후부터라고 봐야 합니다. 그 전까지는 일반 시민들에게 돼지고기도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죠. 지금 북한도 그렇다고 하는데, 소 도축도 국가 허가를 받아야 했죠. 탈북자들이 북한에 대해 하는 말은 70년대까지 남한에서도 동일한 상황.
노태우 대통령이 위대했던 건, 북방정책과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도 있지만, 실제로는 물태우 소리를 들으면서 노동자들의 몫을 키워 준 것이죠. 그래서 차 같지도 않은 현대자동차가 승용차 내수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겁니다. 물태우 소리 들으면서(당시 조선일보는 나라 망한다고 했었음) 노동자들 몫이 늘고 중산층이 형성되면서 경제발전이 가속화 됩니다. 노태우 대통령 이후에 남한은 그나마 인간다운 생활이 가능한 나라가 됐습니다. 80년대 한강물, 중랑천 물은 거의 독극물 수준.
대체 박정희 시절에 살기 좋았다는 사람들은 뭔가요? 한 번 구체적으로 어떻게 잘 살았는지 물어보세요. 무엇을 먹고 무엇을 타고 다녔고 무엇을 즐겼는지. 그 시절에는 젊어서 이웃집 순이하고 연애를 하던 시절이어서 아름답게 남아 있을지는 모르지만, 물질적으로는 절대로 풍요로울 수가 없는 나라였습니다. 박정희 사망했을때 이 나라 국민소득이 1천 달러 정도였어요. 전두환이 3천 달러 정도 만들고 노태우가 5-6천 달러 만들고 김영삼이 8천 달러 만들고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2만 달러를 만든 겁니다.
대체 머리에 뭐가 들었길래 박정희 18년 통치를 찬양할까요? 박정희 경제개발 속도보다 중국의 경제발전 속도가 월등하게 빠릅니다.
경제 개발 초기는 정말 아주 쉽죠. 외자 도입해서 공장 돌리면 5천 달러대까지는 어렵지 않습니다. 진짜 어려운건 1만 달러를 넘고부터죠..
외환위기를 겪은 경제를 물려받은 김대중 노무현 두분도 천재적으로 경제를 잘 운영하셨던 거죠. 그래서 이명박이 전세계적 금융위기를 쉽게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일본 엔화 환율을 보면 노무현 대통령 임기 말 경에 800원 수준에서 이명박 시절 1500원까지 올라간 다음에 이제 1,000원대, 우리 경제가 그만큼 일본 대비 성장한 겁니다. 이제 일본과 한국의 생활수준은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 명목상으로 1/4정도 차이나지만 실질 구매력 수준으로는 거의 차이가 없죠. 초등학교 교사 월급은 초봉은 비슷한 수준이지만 경력 쌓이면 우리가 훨씬 많음.
박정희 대통령이 포항제철을 만들고 경부고속 건설하고 등등은 잘 한 겁니다. 그런데 18년의 철권 통치를 감안하면 그냥 봐 줄 정도죠. 박정희 시절 일반 국민들은 절대 잘 살지 않았습니다. 모두 힘들었죠. 현재의 북한 주민들처럼.
출처 |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286416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