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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호와 조선사편수회
게시물ID : history_241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임경업
추천 : 3
조회수 : 914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5/11/12 18:43:40
 
**친일사학자 신석호(申奭鎬 1904∼1981)
일본이름 테라타니 슈조 寺谷 修三
 
1904 경북 봉화 출생
1929 경성제대 사학과 졸
1930~1937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
1938~1940 조선사편수회 수사관
1946~1949 국사관장
1949~1965 국사편찬위원장, 문교부 장관
1946~1966 고려대 교수
1966~1970 성균관대 문리대학장
1971~1974 영남대 대학원장
2005 고대 일재잔재 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대 100년 속 일제잔재 10인'에 선정
2008 친일인명사전 등재
 
 
 
 
신석호는 한국 사학계의 거두로서 사망 직전까지 활발한 활동을 했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여 1929년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 들어가서 꾸준히 활동해서 해방되던 당시에는 수사관(修史官)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해방이 되자 재빨리 이병도(李丙燾), 김상기(金庠基) 등과 함께 임시 중등국사교원 양성소를 설치하여 교원 양성에 앞장서기도 했으며, 현재까지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국사편찬위원회를 창설시키는 데 1등 공신 역할을 했다.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영남대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 밖에도 수많은 요직을 거치면서 한국 사학계의 제1인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이렇게 화려한 경력의 이면에는 친일 인사로서의 반민족적 행위가 자리잡고 있다. 친일파 처리 문제의 실패라는 한국현대사의 비극으로 인하여 신석호는 한국사학계의 권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한국의 식민지화를 역사적인 견지에서 정당화하려 했으니, 이러한 필요에서 나온 관점이 식민사관이다. 한국사의 전개 과정이 한민족의 자주적인 역량에 의해 자율적으로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하는 타율성론과, 왕조의 교체 등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구조에 아무런 발전도 가져오지 못했다고 설명하는 정체성론이 식민사관의 핵심이다. 이렇게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을 핵심으로 하는 식민사관을 제도적으로 창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가 조선사편수회이며, 그 대표적 성과물이 《조선사》라는 저서이다. 신석호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서 《조선사》 간행에 적극 기여하였던 것이다.
일본은 《조선사》가 공명정대한 학술적 사서(史書)라는 것을 강조했는데, 이것을 가시적으로 보장해 주는 편찬 체제가 바로 편년체였던 것이다. 당시 사학계에 풍미되었던 실증사학을 보장해 주는 듯이 간주되었던 것이 편년체였는데, 이것의 근본적인 목적은 연도가 정확하지 않은 단군조선을 사서에서 제외시켜 버리려는 데 있었다. 또한 이 연장선에서 조선이 동북아시의 패권을 잡았던 삼국 시대 이전 시기를 왜소, 왜곡시키려 했던 데도 그 일단의 목적을 두었다. 실제로 《조선사》에는 이러한 목적이 관철되었다. 신석호, 이병도 등 당시 친일사학자들이 실증사학을 도입함으로써 역사학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 이면에는 일본의 식민 지배 이데올로기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조선사편수회는 사서 편찬을 이유로 자료를 독점하여, 군국 일본의 의도대로 취사선택해 《조선사》를 간행했으니 식민사관의 온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신석호는 1929년 경성제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조선사편수회 촉탁(囑託)으로 기용되었고 1930년에는 수사관보, 1937년에는 수사관으로 승진했다. 1920년대 중반 조선사편수회가 《조선사》의 편찬을 기도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에서는 이 사건을 최후의 정신적 파탄으로 간주하고 공정한 사서의 편찬을 촉구하였다. 최남선이 1928년 조선사편수회에 가입하자 민족주의 역사학자 정인보(鄭寅普)가 울분을 참지 못했다는 일화는 이미 항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1929년 신석호의 조선사편수회 가입은 그의 역사 의식 결여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신석호는 친일학회에 가입하기도 한다. 경성제대와 조선사편수회 임원들이 중심이 된 친일학회 청구학회(靑丘學會)가 1930년에 조직되는데, 신석호는 여기서 위원직에 있으면서 실무를 담당했고, 학술지 {청구학총}에 몇 편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8·15해방은 신석호의 신변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했다. 총독부 역사 왜곡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던 신석호는 해방 후에도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1958년 12월 이승만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신석호 등을 경무대로 불러, 일제가 우리의 역사를 왜곡했으니 우리 역사상 독립 정신이 어려있는 사실을 구명(究明)하여 표준될 만한 학설을 세워 왜곡 선전된 것을 시정하라고 주문했다. 이에 따라 1960년 4월까지 전체 6권의 《국사상의 제문제》라는 저서를 간행했다(국사편찬위윈회사, 235∼236쪽). 그런데 이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보면 신석호를 위시해 조선사편수회에서 역사 왜곡의 주범을 활약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바로 이들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명목하에(그것도 독립정신이 어려있는 사실의 구명이라는 면에서) 《국사상의 제문제》를 간행했던 것이다. 이들에게 이것을 주문한 이승만이나, 양심의 거리낌없이 선뜻 이 작업에 착수했던 그들이나 모두 우리 민족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현재의 국사편찬위원회는 과거야 어떻든 간에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국사학 관련 기구이다. 그런데 1990년 이곳에서 나온 《국사편찬위원회사》를 보면 어이없는 기록이 있다. 직원 명단의 재직 기간을 보면 조선사편수회의 경력도 포함하고 있다. 신석호로 예를 들어 보자면, 역대 사무국장 명단에서는 그의 재임 기간을 '(1929.4) 1946.9∼1965.1.21'로 표시하더니, 역대 퇴직(전출)자 명단에서는 그나마 괄호도 없애고 '1929.4∼1965.1.21'로 적어놓고 있다. 의도적이건 아니건 간에 이것만 놓고 본다면, 국사편찬위원회는 식민사관의 온상이었던 조선사편수회의 직접적인 연장이란 말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잘못은 결코 사소한 것으로 치부될 수 없다. 어떻게 본다면 우리 민족의 근현대 역사학은 식민사관의 극복과 궤를 같이 하여 발전해왔다. 그리고 그 작업은 아직도 채 끝나지 않은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사편수회의 부정과 극복이 아닌, 연장선으로서의 국사편찬위원회라고 해석될 수 있는 그러한 기록은 하루바삐 시정되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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