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줄 새는 일자리 예산 백태 '내일배움카드' 취미용 전락 전기기능사 강좌 텅텅 비고 바리스타 수강생만 북적 인기 높았던 中企 직무훈련 300억 예산 전액 삭감되기도 정부주도 일자리정책 구멍
◆ 구멍난 일자리 예산의 민낯 ① ◆
지난해 2년간의 계약직 근무를 마친 남형석 씨(가명·31)는 실업급여 450만원을 여유자금 삼아 40여 일간 미국 여행을 다녀왔다. 남씨는 "생활자금이 충분해 급하게 일자리를 구할 필요는 없었다. 마침 실업급여까지 지급되니 재충전을 위해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실업급여를 받는 동안 한 달에 두 차례 구직활동을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지만 취업원서만 쓰면 돼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남씨는 "본격적인 구직활동은 실업급여 수급기간이 끝나는 3개월 뒤부터 시작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어디에 어떻게 쓰일지 모르는 나랏돈이 매년 수십조 원씩 지출되고 있다. 정부는 내년에도 일자리 예산 22조9000억원을 배정했다. 아직 집계가 완료되지 않은 지방자치단체의 자체사업 예산도 2조원은 넘는다는 게 관가의 예측이다.
하지만 이미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1년7개월간 막대한 혈세를 일자리 창출에 쏟아부었음에도 고용시장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재정 투입이 일자리 확대의 마중물 역할을 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처절히 무너진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일자리 예산을 쏟아부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줄줄 새고 있기 때문이다. 3조원이 투입된 올해 청년 일자리 예산 역시 게임기나 상품권 구매에 낭비됐음에도 걸러지지 못했다. 일자리 예산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9조8000억원가량의 실업급여로 일부 실업자는 재취업 노력에 박차를 가하는 대신 해외여행을 다녀와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관광산업 활성화를 통해 관광 분야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미명 아래 배정된 300억원 규모 관광산업 지원 일자리 예산 역시 간판만 차려놓은 유령 여행사들의 쌈짓돈으로 전락하고 있다.
일자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민간을 대신해 정부가 세금으로 '시장 실패'를 보완하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세금이 낭비되는 '정부 실패'가 나타난 것이다.
직장인의 취미활동을 위한 학원 수강 비용이 직업훈련 명목으로 일자리 예산에서 나가고 기왕에 자원봉사활동을 해온 여유 있는 고령층이 취약계층 일자리 지원 혜택을 받아 '월급'이라는 횡재를 하는 진풍경도 연출되고 있다. 실제 직업훈련을 위한 온라인 강좌 수강료를 지원하는 '내일배움카드'는 직장인들의 취미생활 지원금제도란 오명을 얻은 지 오래다.
가령 직장인이 더 나은 양질의 직장으로 전직하기 위한 전직 훈련 차원에서 바리스타 교육을 받으면 수강료를 환급받을 수 있다. 문제는 해당 분야로 이직할 계획이 없는 직장인들이 취미 활동 차원에서 나랏돈을 받아 강좌 수강에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직업훈련 명목의 학원 수강 종료 후 6개월 이내 취업률이 50.7%에 불과하다는 점도 이를 방증한다. 제과제빵 강좌처럼 직장인들이 취미생활 용도로 즐기는 강좌에만 수강생이 몰려들고, '전기기능사 자격증 취득'처럼 실제 취업 수요와 상관성이 높은 강좌는 지원율이 미미하다.
2015년 시작된 '인문특화 취업아카데미'도 허술한 직업훈련 정책의 하나로 꼽힌다. 인문계 대학생들에게 현장에서 원하는 직무교육을 한 후 교육수행 기관·기업에 취업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기본 계획인데, 2015년과 2016년 교육수행 기업 취업률이 3.9%와 5.6%에 불과했다.
경기도에 사는 정 모씨(68)는 은퇴 이후 자원봉사 활동을 하다가 최근 취업하는 데 성공했다. 지자체에서 낸 취로사업(就勞事業·영세 근로자의 생계를 돕기 위해 정부에서 실시하는 사업) 덕분이다. 정씨는 "어차피 집에서 할 일이 없어 자원봉사를 해왔고 비슷한 고령자가 많았는데 요즘 들어 경험과 지식이 있는 노장년층 자원봉사자들이 자취를 감췄다"며 "원래 자원봉사로 하던 것에 각종 수당을 주면서 일자리 사업으로 둔갑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중장년층 대상 사회공헌일자리와 노인일자리사업 등 이른바 '자원봉사형 일자리'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국민연금과 주택연금, 자녀 용돈까지 받는 여유 있는 고령층도 이처럼 나랏돈이 지원되는 취로사업에 참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자리 예산이 불요불급한 곳에 낭비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감사원도 지난해부터 일자리 사업이 실제로 저소득층에게 돌아가는 비율이 매우 작다고 고용노동부와 기획재정부에 지적했다. 하지만 고용부는 "낮은 실업소득 수준을 감안해 노인 등 특정 계층의 기본적 소득을 보조하는 일자리사업도 직접일자리사업에 포함한다"고 정부 부처들과 지자체에 최근 공지했다.
비효율적인 일자리 예산이 집행되고 있는 사이 기업이나 근로자들에게 호응을 얻어온 사업은 오히려 종료되고 있다. 중소기업 종사자들의 직무능력 향상을 위해 연 200억~300억원의 예산이 투입돼온 '핵심 직무 능력 향상 지원사업'이 대표적이다. 현재 사업 자체가 종료된 이 사업은 그간 지방 산단에서 '원정교육'을 보낼 정도로 우수한 교육 과정을 제공해 중소기업 근로자들에게 호응을 받았다. 예산 삭감으로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행정직원 약 100명이 일자리를 잃기도 했다.
[기획취재팀 = 손일선 차장(팀장) / 임성현 기자 / 정석우 기자 / 최희석 기자 / 김태준 기자 / 연규욱 기자 / 문재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