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의 신곡 ‘제제’(Zeze)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며칠째 계속되고 있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가 온라인 서점의 판매량 및 검색어 순위에 진입한 가운데 아이유 음원 폐기 청원 서명운동이 진행되는 흐름이다. 이런 첨예한 대립 속에서 난 다소 다른 주제를 조심스레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출판사의 본분에 대한 이야기다.
사건이 불거졌을 때 난 ‘어? 출판사가 왜 저래?’라는 생각을 가장 먼저 했다. 한국저작권위원회에 따르면 출판사는 저자와 “허락받은 이용방법 및 조건 범위 안에서 복제 배포할 권리와 의무를 부담하는 채권 계약”을 맺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출판사는 유통되는 상품에 대해서만 일정 수준의 권리를 가질 뿐 저작물의 내용과 작가의 견해에 대해서는 하등의 지분이 없다.
하여 난 도서출판 동녘이 공식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그런 문제 제기를 한 것을 문제 삼고 싶다. 만약 출판사 임직원이 자신의 개인 계정에서 그와 같은 견해를 피력한 것이라면 난 수긍한다. 의견을 개진하고 작품을 평가하는 건 모두가 공유하는 권리니까. 하지만 출판사의 이름으로 그러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만약 아이유가 출처를 밝히지 않고 특정 문장 등을 ‘훔친’ 것이라면 당연히 출판사가 그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할 수 있겠으나 이번의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해석의 영역에 속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유통되는 작품의 해석을 두고, 그것도 다른 아티스트가 자신의 시선을 통해 재해석한 창작물을 두고 왈가왈부할 이유는 출판사에 없다. 혹 작가와의 사전조율이 있었다면 달리 바라볼 여지가 있겠지만 원작자는 31년 전에 세상을 뜬 외국인이다. 그렇다면 침묵하는 게 작가에 대한 예의다.
출판사는 작가의 대리인이 아니다. 한데 마치 자신들이 작가의 대리인인 양 구는 출판사들이 꽤 많고 심지어 소속사 행세를 하기도 한다. 몇 달 전 뜨거웠던 신경숙 표절 논란 때 비판에 대처한 주체가 어디였는지를 생각해보라. 바로 출판사 창비였다. 정작 대답해야 할 작가는 침묵 속으로 회피해버리고 출판사가 소위 ‘흑기사’로 나섰다.
당시 창비 문학출판부가 내놓은 입장에 미시마 유키오보다 신경숙의 묘사가 우위에 있다고 평하는 문장이 있는데, 그건 내가 살면서 본 모든 문장을 통틀어 가장 기만적인 것이다. 어찌 출판사의 이름으로 작가의 묘사를, 그것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작가와 국내 온갖 문학상을 휩쓴 작가의 묘사를 ‘감히’ 비교한단 말인가. 누구나 저와 같은 평가를 할 권리를 갖는다고는 하지만 자신들이 출판한 작가를 옹호하기 위해 출판사의 이름으로 내놓을 내용은 결코 아니었다.
출판사의 역할은 작가의 저작물을 온전하게 유통하는 데에 그쳐야 한다. 그런데 그 내용마저 자신들의 것인 양 굴거나, 자신들이 작가의 소속사라고 착각하는 출판사가 너무 많다. 다른 아티스트의 재해석을 공식 계정에서 문제 삼은 동녘, 작가를 옹호하기 위해 기만적인 공식 입장을 내놓은 창비 모두 본분을 벗어났다.
만약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원작자가 살아 있다면 이 사건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차라리 낄낄 비웃지 않을까? 어쩌면 자신들의 영역 밖에서 정의로운 듯이 ‘올바른’ 해석을 강요하며 판매부수를 야금야금 늘리는 모습이야말로 원작자가 비판하고 비웃고 싶었던 바로 그 어른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또한 나라는 한낱 자연인의 해석일 뿐이다. ‘올바른’ 해석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홍형진 소설가
출판사가 아이유에게 뭐라고 했던 것도 진중권이 당시 트윗땜에 욕먹었던 것도 다시 생각해봐야 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