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계획한 주제와는 계속 어긋나는 탈덕 시리즈입니다..-_-;
사실 전편에 예고했던바와 같이 황당한 대전차술을 쓰려고 하였습니다만...
열심히 오유를 눈팅하던 도중 발견한 이 짤방!
이 짤방 때문에 급 주제변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냥 황당한 대전차술은 잊어주세요. 언제 쓸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 인물을 주제로 오유 내에서도 많은 글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간간히
일본인 독립운동가라는 드립과 함께 저런 짤방이 있는데요.
모르시는 분들은 왜 저런 짤방과 드립이 있는지 모르실겁니다~
그런분들을 위해 시작합니다!
<임팔작전의 주무대 미얀마>
때는 1940년대 초, 일본군의 기세는 동남아 전체를 집어 삼킬듯이 몰아쳤고 이는 곧 영국의 식민지이던 미얀마에도 들이닥쳤습니다.
미얀마를 방어하던 영국 식민지 수비군은 곧 패퇴하여 물러났고 이에 영국의 해외 식민지중 그 중요성이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도가
위험해졌습니다. 하지만 일본군 역시 여러 요인으로 인해 더 이상의 전진이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이에 미얀마 주둔 일본군은
공격에서 방어로 태세를 전환하고 적의 공격에 대비합니다.
아니나다를까 연합군의 윙게이트라 불리는 특수부대가 국경인근에 출몰하기 시작했고 일본군은 바짝 긴장하며 대비태세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 글의 주인공! 무다구치 렌야가 등장합니다.
이 지역을 관할하는 제 15군 사령관으로 무다구치 렌야가 임명되어 부임한것입니다.
<보면 볼수록 참~ 대견한 사람..자꾸 정들어..응?>
무다구치에 대해서는 많은 일화가 전해지는게 그 중에서도 중일전쟁 당시의 일화가 가장 유명합니다.
그는 노구교 사건 당시 연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느날 멀리서 총성이 들려왔습니다.
이에 즉시 휘하부대에 인원점검을 명한 무다구치는 병사 하나가 빈다는 보고와 함께 아무래도 중국군에게
그 병사가 당한것 같다는 누군가의 추측성 보고도 받게 됩니다.
이에 빡친 무다구치는 개전의 권한이 없는 일개 연대장임에도 불구하고 중국군에 대한 공격을 허가합니다.
이는 바로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고-_-;; 나중에야 이 병사는 화장실에 가느라 인원점검에 응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어쩄든 정작 전쟁에 불은 붙여놓은 이 인간은 교전에는 참가하지도 않았으면서 팔에 붕대를 감고 직후의 작전회의에 등장하여
다친 척하는 똘짓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똘짓의 기운은 15군 사령관이 된 후에도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자신이 사단장이던 시절 극구 반대하던 아쌈 주 공략을 15군 사령관이 되자 극구 찬성하며 밀어붙히기 시작한겁니다..-_-;;
아 물론 작전을 바꾸는건 가능합니다. 누가 뭐랍니까?ㅋㅋㅋ 문제는 그 작전을 바꾼 이유입니다.
뭔가 도로가 새로 뚫렸다던가 뭐..상황이 좋아졌다던가 이런게 아니라 단순히 윙게이트가 그곳에 나타났기 때문에 마음을 바꾼겁니다.
즉 환경이 워낙 험준해 작전이 힘드니 하지 말자! 에서...야..저것봐라! 적들도 등장했는데 우리는 왜 못하냐! 우리도 할 수 있다!로 바뀐거죠..
여기서 말하는 험준한 환경은 아라칸 산맥을 말하는데 총 길이 950Km에 해발 3000m가 넘는 산이 있는 지역으로 아쌈 주 공격 최대의 장애물이었습니다.
어찌됬든 무다구치가 입안한 작전계획은 간단했습니다. 휘하 3개사단을 동원해 미얀마에서 가장 큰 강인 친드윈 강을 건너 아라칸 산맥을 넘은뒤
임팔과 코히마를 점령하자는 것이었죠. 이 작전계획을 검토한 15군 참모장은 보급이 어렵다며 강하게 반대합니다.
이 정도의 군세가 한달간 작전하려면 1만 5천톤의 물자가 필요한데 사실상 15군에는 그정도 물자가 없었거든요..-_-;;
그러자 무다구치가 처방을 내리니..
1. 일본인은 초식민족이다! 그러므로 정글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2. 징기스칸은 소와 말 등의 가축을 끌고 전쟁에 나서 운반수단과 보급을 동시에 해결했다! 우리도 그러면 된다!
......다른나라 같았으면 니가 한번 가서 해봐라는 말이 나오겠지만 우리의 일본황국군은 이 작전을 승인, 1944년 3월 8일 작전이 개시됩니다.
<15군 참모장 오바타 노부요시>
1번의 이유는 누가봐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2번의 이유는 나름의 현실성이 있다고 생각하실수도 있겠습니다만...-_-;;
틀린 말은 아닙니다. 고대로부터 시작하여 나폴레옹까지 현지의 약탈을 통해 보급을 해결하는 사례는 전사에 흔하니까요.
하지만 각종 장비가 규격화되어 있는 현대전에서는 그게 안 먹힙니다..아니 현대까지 내려오지 않더라도
고대에도 역으로 상대방이 청야전술을 펼치는 사례가 있습니다.
하여튼 3개 사단을 주력으로 전진을 시작한 일본군은...곧 징기스칸 보급의 한계에 부딪칩니다.
강을 건너면서 태반의 동물이 죽고...계속되는 가혹한 환경속에 동물들은 통제가 안되 도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나마 남은 동물들은 지쳐 정글길에서 주저앉아 길을 막고..길이 막히자 일본군 병사들은 소에게 불을 붙혀 움직이게 했습니다.
또한 제공권을 장악한 연합군의 공습이라도 있을라치면 놀란 동물들은 사방팔방 도망치기 빠쁜데..
문제는 등에 실려있는 탄약과 식량까지 같이 가지고 도망친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20일안에 작전을 끝내겠다는 무다구치의 원대한 포부는 하늘로 날아가고
그 자리에는 연합군이 잘못 공수한 보급품으로 먹고살며 간신히 목숨만 유지하는 일본군만 남았으니..
그마저도 없는 날에는 굶어죽거나 열대병에 걸려 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일본군이 건너야 했던 죽음의 강>
이런 떄 우기가 겹쳐 엄청난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으니..탄약도 없어~ 식량도 없어~ 약품도 없는 일본군은 그야말로 시체로 길을 메우며 움직이는
실정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개박살이 난 일본군에게 무다구치가 보낸 전문의 내용은 더 황당했으니..
"천장절까지 임팔을 공략하라"
"도래한 우기는 황군의 편이니 끝까지 싸워라"
무다구치는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에 임팔공략이라는 선물을 바치고 싶었던겁니다.
결과요? ㅋ
그렇게 4월이 가고 5월이 왔습니다.
이쯤되면 일본군 전체 병력이 거의 아사로 인한 사상자로 조직 전체가 망가지는 수준에 오게 됩니다.
그러자 휘하 31사단의 사단장이던 사토 중장은 상부에 작전중지를 계속 건의합니다.
하지만 계속된 거부의 답변에 빡돌아버린 사토 중장은 전체 휘하 부대를 데리고 전선이탈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감행합니다.
" 15군과 미얀마 방면군! 남방총군! 대본영! 이 바보 4인방을 믿고 기다리다간 우리는 죽는다 이에 본 사단장의 책임하에 우리사단은 독단으로 퇴각한다"
(사토 중장은 그나마 개념이 잡힌 인물-우리 입장에서는 아니지만-로 임팔작전의 보급문제에 대비해 작전투입직전 따로 15군 군수참모를 불러내
31사단만이라도 원할한 보급을 해줄것을 약속받은 인물입니다.)
나가 죽으라면 나가 죽는 일본군에서 사단장이 군사령관에게 항명하다니..이건 정말 전대미문의 엄청난 사례죠
이들이 이렇게 개고생 할떄 무다구치는 뭐했냐구요? ㅋ
1. 요리사와 기생을 불러 놓고 매일 업무가 칼퇴근하여 질펀하게 놀았다.
2. 사령부에 제단을 만들고 축사를 올렸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연합군은 즉시 이 사실을 방송을 통해 전선의 일본군에게 전달함으로 심리전을 펼치고자 하였으나
이미 일본군 사이에서 무다구치에 대한 평판은 자자했으니....
" 바보같은 대장은 적보다 더 무섭다" "무다구치 사령관이 찾는 3가지는 1순위가 훈장, 2순위가 여자, 3순위가 기자다" "귀축 무다구치 렌야" 등의
소문이 파다하게 돈지 오래라 연합군의 심리전이 무력화됬습니다.
또한 도망친 사토 중장에게 "부하를 통해"(지는 도망가고 잘못한건 아나?) 할복용 단검을 건냈다.
단검을 건내 받은 사토 중장은 할복으로 사죄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무다구치이며,
황군을 직접적으로 비판한 죄로 사형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군법회의를 열어 무다구치의 잘못을 공개하겠다는 태도로 응수합니다.
그러자 수뇌부는 사토 중장을 강제로 정신과에 입원, 본토로 요양을 명받고 예비역으로 강제편입됩니다.
결국 이 작전의 실패를 통감한 무다구치는 옆에 있던 참모에게 천황폐하꼐 죽음으로 사죄하고 싶다는 뜻을 비칩니다.
이에 이 참모는...
"옛부터 죽겠다는 사람치고 진짜로 죽음을 결행하는 사람은 못 봤슴돠. 게다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부하된 도리로 한번쯤은 말리는 척 해야되지 않슴꽈?
그러니 그냥 말씀하시지 말고 할복하십쇼. 이번 패전의 책임정도면 죽고도 남슴돠"
물론 우리의 무다구치는 꿋꿋하게 할복하지 않고 버팁니다.
세월은 흘러 6월쯤 되자 연합군은 일본군과의 전투보다 퇴각하면서 죽어간 일본군의 시체를 처리하는 일이 주임무가 되어 갔고
7월 초 결국 공식적으로 작전 중지명령이 내려집니다.
하지만 이떄는 8만명이 넘는 작전 투입 병력중 7만명이 죽고 1만명이 간신히 살아돌아온 시점이었죠.
이런 시점에 우리의 무다구치는 살아돌아온 장교들을 모아놓고 일장 훈시를 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 못 싸운다는게 말이 되나? 천황폐하의 군대는 먹을게 없어도 싸워야 된다! 무기가 없네 탄약이 없네 하는 변명은 필요없다!
총알이 없으면 대검으로 적을 찔러라! 대검이 없으면 맨주먹으로 싸워라! 주먹이 없으면 발로 차고! 발이 없으면 이빨로 적을 물어 뜯어라!
일본은 신의 나라이고 우리는 신이 지켜주고 있다!"
그리고 훈시를 끝낸 무다구치는 퇴로를 시찰한다는 핑계를 대고 그대로 일본까지 비행기로 도망칩니다.
<다시 한번 보세요? 참 정들죠?>
7만명이라는 팀킬로 연합군에 엄청난 이익을 안겨준 무다구치
만약 그가 제대로 된 작전을 구사하는 인물이었다면 아마 전쟁은 더 길어졌을겁니다.
임팔작전의 실패로 버마주둔일본군은 말 그대로 연합군에게 완벽하게 열세가 되어버렸고
계속 밀리기만 하다가 미얀마 전체를 내주게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의외로 적에 대한 가혹행위는 없었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적은 안 죽이고????????????? 팀킬만 7만???????????>
사실 이런 인물이 군사령관까지 올랐던 배경에는 일본군의 전형적인 파벌싸움이 그 배경입니다.
유명한 일본해군과 육군간의 싸움은 제쳐두고라도 일본 육군내에서도 파벌이 존재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천보전(天保錢)조인데..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자들중에 우수한 인원들은 육군대학으로 진학합니다.
육군대학을 졸업하면 천보전 즉 구일본의 화폐모양으로 된 메달을 주는데 이걸 받은 이들을 천보전조라 칭합니다.
이들은 능력유무에 관계없이 장군진급이 보장되어 있었죠. 특히 당시 군부의 수장이던 도조 역시 이들과 한편이었습니다.
<천보전 메달-짧은 한자실력으로 검색해서 얻었으나 확신은 못...ㅜㅜ->
때문에 임팔작전의 충격적인 패배에도 불구하고 본토로 소환된 후에도 별다른 처벌없이 예비역으로 예편되었다가 오늘날 3사관학교에
해당되는 예과사관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어 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안락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전후에 도쿄재판에서는 불기소 처분을 받았으나 싱가폴 재판에서 처벌 받아 2년간 감방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살이 찔 정도로 감방생활이 편했다는 것은 함정!
물론 전쟁이 끝나도 이 주체할수 없는 똘짓의 기운을 막을 수 없었는지
임팔작전의 실패는 전적으로 부하들의 책임이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임팔작전 위령회의 자리에서 임팔작전의 패전책임은 내가 아니라 부하들에게 있다는 논조의 유인물을 배포하다 쫓겨나고
부대 전우회에서도 같은 주장을 하다 옛 전우들에게 얻어맞고 쫓겨났으며
죽기전에 유언으로 자신의 장례식에서 내 잘못이 아닌 부하들 잘못이라는 유인물을 나눠주도록 했습니다.
심지어 전후 실전경험을 인터뷰하던 자위대를 상대로도 하라는 인터뷰는 안하고 임팔 작전에 대한 자신의 주장만 늘어놨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대본영에 잠입한 대한광복군이나 연합군의 첩자라고 해도 믿을듯....-_-;;;
어쩄든 무다구치 렌야는 황군의 무능으로 남아 전후 태평양 전쟁을 재평가하려는 일본 극우세력들 사이에서도 무능한 장군으로
재평가 되지 않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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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못 자서 오타나 띄어쓰기는 물론 문맥이 안 맞습니다. 한번 수정하고 싶으나..지금은 너무 피곤..ㅠㅠ
잘 봐주세용~! 다큐멘터리, 책자, 블로그 등을 보고 쓰지만 틀린게 있을 수도 있습니다. 둥글게~ 지적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