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건에 대한 인물의 평가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공부임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조금씩이나마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정보는 전달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전제에 글을 남깁니다.
학봉은 1538년(중종 33)에 태어나 1593년(선조 26)에 나이 56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왕조로는 조선왕조, 시대로는 16세기를 살았던 것이죠. 이 16세기는 그 세기 말에
일어난 임진왜란을 조선왕조가 전반기와 후반기로 갈라지는 시점으로 볼 때 조선조
전반기를 마감하는 시기였습니다. 또한 이 시기는 정치적 갈등이 수많은 죽음을 불러온
혼란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 주로 세조 때에 형성되어 기득권을 누려온 공신
외척이 중심이 된 이른바 훈구세력과 성리학적 이념에 뿌리를 둔 도학정치를 주장하며
성종 때부터 새로이 등장한 신진사림파 사이에 갈등이 빚어져 수많은 사림파 인물들이
네 번에 걸쳐 죽임을 당하였죠. 그것을 사림파 선비들이 당한 화라고 해서 '사화'라고
부르지요. 연산군 시절인 1498년(무오년)에 일어난 무오사화, 1504년(갑자년)에 일어난
갑자사화, 중종 때인 1519년(기묘년)에 일어난 기묘사화, 명종 때인 1545년(을사년)에
일어난 을사사화가 그것이죠.
새로이 정치에 나서게 된 사림 세력은 요임군, 순임금이 행하였다고 전해오는 도덕정치를
이상적 정치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도덕의 학문을 권장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한다'고 하는 도학적 실천을 내걸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기득권을 쥔 훈구, 척신 세력은 혼인관계 등으로 서로 맺어져 크나큰 집단을
형성하고 정권을 독점하여 시진 사림이 정계에 나서려는 것을 안팎으로 막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림파는 이런 정치 사회의 틀을 새롭게 바꾸지 않고는 자신들이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죠. 그리하여 그들은 옛 질서를 깨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고 했고
이 과정에서 훈구 척신세력과 서로 대립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학봉이 태어난 해인 1538년은 1519년 기묘사화로 사림파가 조정에서 쫓겨난 뒤 20여 년이
흐른 뒤였고 기묘사화로 정권에서 물러나 시골에 은거하고 있던 김안국, 김정국, 신광한 등
일부 사림파가 다시 등용된 바로 그 해입니다. 을사사화는 1545년 그가 아직 어린 시절의
일이었으나 그의 외가 쪽의 인물이자 아버지의 스승인 민세정은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림파였고, 1545년 을사사화는 그의 스승인 퇴계의 형이 화를 입은 사화였습니다. 그의
스승도 사화에 걸려 큰 화를 당할 뻔 했던 일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어쩌면 사림파와
뗄 수 없는 연관이 있었던 것이죠. 한편 학봉 자신은 사림파가 정치적으로 자신들의 설자리를
완전히 굳힌 선조 대에 일어난 사림파 사이의 나뉨, 즉 동서 분당의 한편에 서있게 됨으로서
뒷날 자신의 뜻과는 달리 수없이 많은 역사서에 등장하게 되기도 한 것이죠.
학봉의 아버지는 의성김씨 내앞파의 중시조인 김진으로 김성일을 비롯한 다섯 형제를
훌룡하게 키운 뛰어난 아버지이기도 였습니다. 그는 학봉의 학문적, 인간적 성장에 깊은
영향을 끼친 두 사람 가운데 하나였고, 다른 한 사람은 학봉의 학문적 스승인 퇴계입니다.
김진은 그의 큰고모부인 권간에게 학문과 예법을 배웠는데, 교육의 내용은 대부분 '효재지도
(孝悌之道)'에 관련된 내용으로 효제의 도리란 유교 실천 윤리의 출발점으로, 가족에 대한
성실한 자세와 실천을 말합니다. 당시 조선조 사림파 학자들은 효제의 도리로부터 출발하는
주자학적 이념을 스스로 실천하고 또한 널리 알리고 교육하여 유교적 이상사회를 조선사회에서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김진은 1525년 사마시에 급제한 뒤 성균관에 유학하였습니다. 당시 그는 사림들 사이에 이름이
나 있던 하서 김인후와 숙식을 같이 하면서 이름 있는 사림파 선비들과도 서로 교유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 그는 갑자기 과거공부를 단념하고 고향 마을로 돌아와 서당을 세우고 후학을
교육하는데 전념했습니다. 또한 그 동안 자기가 배우고 갈고 닦았던 유학의 실천윤리를 삶
속에서 직접 실천하였고 김진의 이러한 활동은 그의 아들들에게 이어졌습니다. 그의 차남인
귀봉 김수일은 부암의 백운정에서 아버지의 유업을 그대로 이어받았고, 넷째인 학봉은 서후면에
석문정사를 세워 제자들을 키울 뜻을 펴려고 했으며, 막내아들인 남악 김복일은 중년에 예천으로
옮겨가서 그곳 금곡의 덕진동에 금곡서당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김진의 뒷바라지로 그의 다섯아들은 모두 문과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 진사가 되었고, 그 중
세 아들은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학봉은 큰 형 김극일, 둘째형 김수일, 셋째형 김명일과 세 누나가 있었고, 아우는 김복일입니다.
큰형과는 16년, 둘째형과는 10년의 나이차가 있어 4년 맏이인 김명일과 3년 아래인 김복일과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10세 무렵부터는 그의 아버지가 세운 부암서당에서 공부하였고, 17세에
큰형 김극일을 홍원 임지로 찾아가 배움을 받았습니다. 19세에 즈음하여 풍기 소수서원에서
아우 김복일과 공부하고 있었는데, 소수서원은 원래 주세붕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이었습니다. 이후 퇴계가 풍기군수로 재직시 명종으로부터 '소수'라는 이름을
사사받아 소수서원이 되었던 것인데 당시 이곳에는 퇴계의 제자인 황준량이 있었습니다.
그로인해 아우와 함께 도산의 퇴계 자택 부근에 있는 계상서당으로 퇴계를 찾아가게 되었고,
당시 퇴계는 56세로 성균관대사성을 역임하고 "천명도설" 등의 탐구에 골몰하고 있었고 그러한
중에 제자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퇴계는 학봉의 성실한 학업태도에 대해 '그의 행실은 높고
학문은 밝으니, 그에 비길 만한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고 크게 칭찬할 정도였습니다. 학봉은
퇴계로부터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가 주역을 이해하는 틀을 만들고, 그것을 통하여 성리학의
우주론을 설명한 "역학계몽"을 배웠습니다.(퇴계가 역학계몽을 이해하기 쉽게 "계몽전의"를 지은
시기가 이 한 해전인 1557년 가을이어서 학봉이 역학계몽을 배웠는지 계몽전의를 배웠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역학계몽을 배웠다 하더라도 계몽전의의 틀을 따라 배웠을 것이기 때문에)
이어 "심경", "대학" 등을 배웠는데, 특히 퇴계가 "심경을 얻어 공부한 뒤로부터 비로소 마음의
학문의 깊은 뿌리와 마음 다스리는 법의 자세하고 치밀함을 알고 평생 이 책을 밝은 신처럼 믿고
엄한 아버지와 같이 존경하였다"고 말할 정도로 매우 높이 여긴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어 학봉은
퇴계로부터 우주의 생성원리와 윤리, 인간의 자세 등을 설명한 '태극도설'을 배웠고, "주자서절요"
등을 통해서는 학문하는 방법을 익히기도 합니다.
1563년 26세에 학봉은 진사시 향시에 합격하고 다음해에는 진사 회시에 합격합니다.
형인 김명일과 아우 김복일이 함께 합격하였던 것입니다. 이미 큰 형 김극일이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있었던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였습니다. 1565년 학봉은 대과를
준비하기 위해 성균관에 입학하여 약 8개월간을 공부합니다. 그러나 그곳은 학문을
닦는 곳이 아니라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에 나가고자 하는 소리없는 전쟁터란 것을 안
그는 과감하게 성균관에서 나와 고향으로 돌아와 스승을 찾아갑니다. 못다 배운 공부를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듬해인 1566년 퇴계는 그에게 요임금, 순임금으로부터 비롯하여
공자, 맹자를 거쳐, 송나라 때 성리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유학의 역사에서 내려오는 성현들의
학문내용과 그 수양방법을 적은 심법을 차례로 적은 80자의 '병명(屛銘)'을 손수 써주었습니다.
이는 훗날 학봉계 학문을 잇는 갈암에게서
"토계선생께서 동남쪽 지방에서 도학을 앞장서서 이끄신 뒤, 그의 문하에서 배운 사람들은
모두 당시에 뛰어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지혜가 남달라서 각자 끊임없이 노력하여
훌륭한 덕을 이룬 사람들을 일일이 손꼽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퇴계선생께서는
손수 요순 이래 우왕, 탕왕, 문왕, 무왕, 주공, 공자, 안자, 증지, 자사, 맹자 주자, 정자 주자가
서로 전한 심법의 중요한 말과 그 깊은 뜻을 써서 학봉 김문충공에게 주었다.
그러니 퇴계선생의 은밀한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 잘 알 수가 있다"
고 한 데에서 의도를 찾기도 합니다. 한변 권오영의 경우 심학이 전해 내려온 계통을 설명한
이 병명의 핵심이 경(敬)이라고 보았는데 이것을 써 줄 당시 퇴계의 학문은 심학과 경으로
정리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퇴계가 심학과 경을 중심으로 학문의 계통을 세웠을 가능성은
충분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는 학봉이 이 '병명'을 평생 가슴에 새기며
심학의 도통을 이해하고 자신의 학문방향을 정하였으며, 그래서 학봉의 학문성향을 심학과
예학으로 정리할 수 있다고도 합니다. 병명의 마지막 구절의 '학문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하는 두가지를 지극히 하였다'는 구절에서 박학(博學)의 측면은 주자학(심학)의 탐구로
이어져 천리에 대한 해명이나 "주자서절요", "심경" 등의 연구로 나타났고, 약례(約禮)의 측면은
예학으로 발전되어, 그 학문의 두 성향을 뚜렷이 드러내게 되었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학봉은 156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습니다. 벼슬살이가 시작된 것이죠.
부친의 바람으로 관직으로 나아갔으나 순수 학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스승에게
하소연하는 간찰을 여러차례 올리기도 했습니다.
퇴계는 학봉에게 '경건한 마음과 의리에 맞는 행동을 같이 지녀야 하며 넓은 배움과 깊은 사색을
함께 아우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가르침이 이른바 퇴계 심학의 내용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현실로
드러날 때는 자연스레 사회의 규범인 禮의 형식을 띌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예란 하늘과 땅의 질서,
사계절의 변화를 본받는다. 또한 음양의 움직임을 법칙으로 하고 사람의 정을 따르는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예가 자연의 질서와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의 자연스러운 질서라는 것을 말한 것이지요.
예가 인정을 따른다고 한 것은 예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주로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사람의
감정을 반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부모에 대한 예는 부모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드러낸 것이며,
임금에 대한 예는 임금에 대한 충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벗에 대한 예는 벗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학봉은 예의를 존중하고 늘 실행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자기의
행동이 예에 맞기를 바랐고, 예를 실천하는 데 있어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스승인
퇴계에게 물어서 조금도 틀림없이 예에 맞게 시행하고자 하였습니다. 즉 학봉의 삶은 예를 실천하는
삶이었고 그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하늘의 질서이자 사람의 도리인 예를 실천하는 마음가짐과
몸가짐으로 해나갔습니다.
학봉이 1590년 왜에 통신부사로 갔을 때, 그는 상사 황윤길, 서장관 허성 등과 왜에 도착하는 날로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사사건건 의견이 대립되었습니다. 마침내는 "이제부터는 각자가 들은 대로 판단하고
아는 대로 행동할 것이며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고 절교를 선언을 하기에까지 이릅니다. 왜에서
사사건건 서로 대립하였던 이유는 하나같이 예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의 문제였습니다. 학봉은
예에 맞지 않는 왜의 행위를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우리 사신들의 체통을 잃는 일에 그치지 않고
국가의 체통과 존엄성을 잃는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체통을 잃은 행동을 예를
잃은 행동으로 생각하여 다른 사람들이 지나치다 할 정도로 몹시 분개하였습니다. 학봉은 허성에게
"체통이라는 이 두 글자를 그대는 이미 듣기조차 싫을 것이지만 내가 지키는 바는 이 두 글자이고,
사신의 일에 있어서도 이 두 글자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학봉은 왜에 통신부사로
가서 행동한 것에 대해 스스로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왜의 수도에 들어갈 때 다툰 것은 예를 다툰
것이었고, 나올 때 다툰 것은 의리를 다툰 것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보다 앞선 1577년에 학봉은 윤두수의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명으로 향했습니다. 사신으로 가는 목적은
겉으로는 명황제를 방문하여 은혜에 감사하는 형식이었으나 실제로는 조선조 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말썽이 되었던 조선 왕조의 태조 이성계가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명나라의 법전인 "대명회전"에
고려 왕조의 신하 이인임의 아들로 되어 있는 것을 바로 잡으려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습니다.
조선에서는 왕조의 정통성과 순수성이 걸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 초기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여러 차례 중국 황제에게 바로잡아 주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던 터였죠. 사신일행은 2월에
서울을 떠나 4월에 명 조정이 있는 북경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 일행은 명나라의 예부에 나가 절차를 밟아
일을 시행하였습니다. 학봉이 예의와 절차에 밝았으므로 정사 윤두수는 일을 처리하는 절차 하나하나를
서장관인 그에게 물어서 시행하였습니다. 또한 학봉은 문장이 깔끔한데다가 뜻도 잘 나타냈으므로 중국
황제에게 올리는 글도 대부분 그가 지었습니다. 질정관으로 글 잘 짓기로 소문난 이를 데려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사신의 임무는 완전한 성공이었습니다. 명나라 예부 마상서가 몸도 "대명회전" 등에 잘못 기록된
부분을 고쳐 주고, 기록을 몇 줄 더 보태 아주 명백하게 처리해 주었던 것이죠. 이를 바탕으로
그 뒤로도 여러 번 사신을 보내 노력한 끝에 십여 년 뒤 조선왕조는 잘못 기록된 왕조의 계통을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상 학봉이 살았던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간략한 설명입니다. 또한 학문적 연원과 학봉의 학습을
통해 살펴 본 그의 임난 전 그의 행적 중 일부를 소개한 것이고, 이어 그의 관료생활과 임난시의 행적
등에 관한 대략을 올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