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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난생 처음으로 할아버지께 밥을 해드려요.
게시물ID : gomin_154203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생마늘맛있어
추천 : 1
조회수 : 417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10/30 20:25:21
외국에 가 있는 가족들과 달리 혼자 한국에 남아 자취하며 학교다니는 손녀가 걱정되신다고
할아버지께서 내일 서울로 올라오신대요.
제 방에서 하루 주무시고 가시기로 하셨어요.


아주 어릴때는 안그랬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는 할아버지가 그렇게도 어려웠어요.
아빠가 아들을 낳기를 원하셨던 할아버지는, 
첫째인 제가 딸로 태어나고 둘째인 제 동생까지 딸로 태어나자
엄마에게 "○○(제 이름)이를 열 아들 못지 않은 딸로 키워라"라는 말씀을 몇번이고 하셨어요.
저를 부르실 때는 제 이름으로 부르시지 않고 '장손'이라고 부르셨어요.
한번도 저를 여자아이처럼 대하신 적이 없으셨어요.
할아버지께 저는 아들이었고, 아무리 가족 내에서 부모님이 저를 딸로 키우셔도 제겐 할아버지의 존재가 너무도 컸어요. 
그렇게 제 자신도 계속해서 아들같은 딸로 커갔어요.


그러다가 지난 7월, 안식년이라 미국으로 가시게 된 아버지를 어머니와 동생도 따라가게 되었어요. 
저도 같이 갔으면 좋겠다고 하셨지만, 하루빨리 졸업하고 싶어서 그냥 1년간 한국에 혼자 있겠다고 했어요.
손녀가 혼자 살게 되니까 그제서야 이 아이가 여자아이라는 실감이 확 드신건지, 그 이후로 매일매일 전화하셔서 "일찍 집에 들어가라"  "남자애랑은 어울리지 마라"  "여자애가 혼자 살면서 무섭지도 않느냐"  "문 꼭 잠가라" 라며...

정말 적응이 되지 않았어요. 
갑자기 왜 이러실까, 왜 이제와서 여자애가 어쩌지 저쩌니 하시는걸까하고
짜증나고 화도 났어요. 정말로 '왜 이제와서?'라는 생각이 제일 컸어요.
매일 걸려오는 전화도 싫었고, 툭하면 서울 올라오시겠다고 하셔서 '아 그날 MT예요'  '철야예요'  '집에 안들어가요' 라고 이리저리 변명하며 피했어요.
물론 저런 핑계를 대면 '여자애가 집에 안들어가고 어딜 그런델 가려고 하냐' 등등의 말을 들을테지만
차라리 그렇게 혼나고 마는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그 정도로 할아버지는 어렵고,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은 분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어요.
서울 올라오신다는 말씀에 핑계도 대지 못했고, 바쁘다는 말도 안했어요.
할아버지께서 너무도 조심스럽게, 그날 시간이 되는지, 바쁘진 않은지, 언제 집에 들어오는지를 물어보시고는
"그럼 그날 내 올라가도 되겠나?"라고 정말정말 조심스럽게 물어보셨기 때문이었어요.


 달리 혼난것도 아니고 엄한 말을 들은 것도 아니고,
그저 저 목소리와 말투의 분위기에 괜히 눈물이 났어요.
내가 그동안 얼마나 차갑게 거부하기만 했으면 저렇게 조심스러워지셨을까-하는 마음에..


그래서 아무런 핑계도 안 대고, 오시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러자 또다시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저녁..해줄래?"라고 물으셨어요.

 생각해보니 할아버지께 직접 밥 한번 해드린 적이 없었어요.
엄마아빠께는 생신때마다, 생신이 아니어도 가끔은 제가 밥을 해드리곤 했는데
지방에 사셔서 좀처럼 뵐 수 없는 할아버지께는 한번도 직접 밥을 해드린 적이 없었어요.


늘 받기만 했어요. 
저를 엄하게 대하셨지만, 그러면서도 제게 주신건 어마어마하게 많은 분인데
제가 그동안 드린거라고는 의무감에 준비했던 생신카드와 생신선물들 뿐..

그래서 내일 저녁밥에 제 첫 진심을 담으려고 해요.
잘 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라는 마음, 죄송하다는 마음, 고맙다는 마음,
그리고 할머니와 둘이서 적적하게 사시는 할아버지의 외로움을 위로하는 마음까지
다 담아낸 밥을 하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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