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모두 여러 가지 색깔로 이루어진 누더기. 헐겁고 느슨하게 연결되어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펄럭인다. 그러므로 우리와 우리 자신 사이에도,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만큼이나 많은 다양성이 존재한다.
우리 모두 여럿, 자기 자신의 과잉. 그러므로 주변을 경멸할 때의 어떤 사람은 주변과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거나 주변 때문에 괴로워할 때의 그와 동일한 인물이 아니다. 우리 존재라는 넓은 식민지 안에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새로운 삶이 어떤 모습일지 저도 모릅니다만, 미룰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흘러가 버릴 것이고, 그러면 새로운 삶에서 남는 건 별로 없을 테니까요.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리가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이 보물로 눈을 돌리면,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된다. 관찰의 대상은 그 자리에 서 있지 않고, 말은 경험한 것에서 미끄러져 결국 종이 위에는 모순만 가득하게 남는다. 나는 이것을 극복해야 할 단점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이 문장은 그가 현실 세계에서 입 밖으로 낸 첫 번째 포르투갈어였고, 실제로 효력이 있었다. 그는 말이 어떻게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거나 멈추게 하는지, 어떻게 울거나 웃게 할 수 있는지 어릴 때부터 늘 궁금했다. 이런 의문은 어른이 된 뒤에도 쉽게 풀리지 않았다. 말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마치 요술 같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말의 위력에 대한 신기함은 다른 그 어느 때보다도 컸다.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그가 전혀 모르던 언어가 아니었던가.
“사람들은 가끔 정말 두려워하는 어떤 것 때문에 다른 무엇인가에 두려움을 갖기도 하지요.”
그는 아버지의 작은 기업을 물려받아 대기업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남의 이야기 하듯 무심한 어조였다. 충분히 이해할 만 하지만 넓게 보면 잘못된 결정을 내린 타인에 대해 말하는 듯이 들렸다. 이혼을 했으며, 두 아이를 거의 못 보고 지낸다고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실망과 슬픔이 깔려 있지만, 자기 연민이 배어 있지 않은 목소리에 그레고리우스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문제는…….”
기차가 바야돌리드에 멈췄을 때 실우베이라가 말했다.
“우리가 인생을 조망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앞으로든 뒤로든. 뭔가 일이 잘 풀렸다면 그건 그냥 운이 좋았던 것이겠지요.”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디선가 브레이크를 검사하는 망치질 소리가 났다.
그가 지난 세월 내내 동료들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던 이 익숙함은 착각에 가득한 습관이요, 틈이 생긴 무지임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에 대해 뭐라고 생각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한, 정말 중요한 일인가? 이 문제에 대답할 수 없는 이유는 잠을 못 자서 머리가 복잡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늘 존재했지만, 사회적인 의식 뒤에 숨어 있어 깨닫지 못했던 낯설음을 지금 막 깨닫고 있는 중인가?
그런 다음 우린 모두 7월의 한낮, 무더운 바깥으로 나갔다. 그때 형태가 잡히지 않은 채 우리 앞에 놓여 있던 그 열린 시간에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무엇을 해야 했을까. 자유로워 깃털처럼 가벼웠고, 불확실하여 납처럼 무거웠던 그 시간에.
“그분과 이야기를 하려면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봉투를 건네며 그가 말했다.
“살면서 불행한 일을 많이 겪어 늘 뭔가 언짢아하는 노인이지요. 하지만 기분만 잘 맞추면 아주 친절해져요. 어떻게 해야 기분을 맞출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이긴 해도 말이죠.”
독재가 하나의 현실이라면, 혁명은 하나의 의무다.
자기 삶과는 완전히 달랐고 자기와는 다른 논리를 지녔던 어떤 한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일까. 이게 가능할까. 자기 시간이 새어나가고 있다는 자각과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호기심은 서로 어떻게 조화를 이룰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