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삼아 가지고 나와…부당한 의도 없고 죄 안돼" 항변
대법원 함께 근무한 영장판사가 같은 논리로 압수영장 기각
검찰, 문건 파기 전후 접촉한 현직 판사들 수사 방침
대법원 기밀자료를 대량으로 들고 나갔다가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무단으로 파기한 고위 법관 출신 변호사가 압수수색 영장심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현직 판사들에게 '구명 이메일'을 돌린 것으로 전해졌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수사하는 서울중앙지검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은 의혹에 연루된 전·현직 판사들이 법원의 압수수색 영장 발부 권한을 이용해 사실상 수사방해를 시도한 정황으로 보고 증거인멸에 현직 판사들이 관여했는지 철저히 수사할 방침이다.
이른바 '사법농단' 수사와 관련해 구속영장 무더기 기각 사태가 이어지는 상황이어서 최근의 검찰-법원 간 갈등이 정면 충돌로 확대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1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을 지낸 유해용(52) 변호사는 전날 복수의 현직 판사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이번 사건에 연루된 데 대한 억울함을 호소했다.
유 변호사는 이메일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 의료진' 김영재 원장 측의 특허소송, 옛 통합진보당 의원들의 지위확인 소송 등에 개입했다는 자신의 혐의를 대부분 강하게 부인했다.
그는 특히 대법원 재직 시절 수집한 기밀자료들을 무단 반출한 혐의에 대해 "법원에 근무할 때 습관처럼 작성·저장했던 자료들 중 일부를 추억 삼아 가지고 나온 것"이라며 "부당한 의도를 가지고 한 것은 아니다"라고 항변했다.
유 변호사는 검찰이 의심하는 공무상비밀누설·공공기록물관리법 위반 혐의에 대한 자체 판단도 내렸다.
그는 "가지고 있던 자료들 중 상당 부분은 개인의견을 담은 자료로서 공무상 비밀이나 공공기록물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판결서 초고라고 표현된 의견서 역시 거의 대부분 이미 판결이 선고된 사건에 관한 것일 뿐 아니라, 이 역시 연구관이 작성한 초안에 제가 의견을 추가해 기재한 것으로 미완성 상태의 문서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유 변호사는 문건이 무단 반출된 사실이 처음 드러난 지난 5일 검찰의 압수수색에 대해 "별건수사 의도가 명백하다"는 주장도 폈다.
검찰이 김 원장 측 소송 관련 자료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만 가져와서 PC에 저장된 파일을 확인하려 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유 변호사가 이메일을 돌린 시점이다.
검찰은 유 변호사가 최대 수만 건의 재판연구관 보고서와 판결문 초고 등을 출력물 또는 파일 형태로 보관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고 지난 7일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했다. 영장은 유 변호사가 이메일을 돌린 뒤인 전날 저녁 기각됐다.
검찰은 서울중앙지법이 압수수색 영장 발부 여부를 나흘째 검토 중인 상황에서 유 변호사가 현직 법관들을 상대로 일종의 '구명 운동'을 벌인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이메일은 현재 법원행정처에 근무하는 법관들에게도 일부 발송된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로 서울중앙지법 박범석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유 변호사의 주장과 유사한 사유로 압수수색 영장을 기각했다. 박 부장판사는 "대법원 재판자료를 반출 소지한 것은 대법원 입장에서 볼 때 매우 부적절한 행위이나 죄가 되지는 않는다"라는 이유를 들었다.
박 부장판사는 2014년 유 변호사가 선임재판연구관으로 재직할 당시 재판연구관실에 함께 근무했다. 유 변호사가 반출한 재판연구관실 문건에는 박 부장판사가 당시 작성한 보고서 등이 포함됐을 가능성도 커 영장심사를 '회피'했어야 한다는 주장이 검찰 일각에서 나온다.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은 지난 7일, 윤리감사관실은 전날 유 변호사와 전화통화 등으로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문건 파기를 전후한 유 변호사와 법원행정처의 접촉을 비롯해, 전날 전송된 이메일이 압수수색 영장 기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면밀히 살펴볼 방침이다. 유 변호사는 지난 5일 무단 반출된 문건을 임의제출해달라는 검찰의 요구에 "증거를 인멸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쓰고 나서 이튿날 문건들을 모두 파기했다.
한편 검찰은 이날 오전 서울 서초동에 있는 유 변호사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박 부장판사는 전날 압수수색 영장을 대부분 기각하면서 특정 사건번호로 검색해 나오는 통진당 소송 관련 문건에 대한 압수수색만 허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