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일전에 조선5군의 존재를 주장하시며 현 학계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셨던 한분을 위해서 바치는 글입니다.
어떤 댓글에서는 상대를 'いまにしりゅう 같은 작자들이 많구나' 라고 비하하시고.. '阿部信行란 새끼의 예언이 틀리지 않구만. 드러운 새끼.'라고 비하하시는 이분께서 그렇게 신뢰하시는 조선5군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1. 조선5군? 이게 뭐지??
여운건 저 '과학으로 밝혀진 우리고대사' 리민족사연구회 2004 에서 본격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주된 내용은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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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 현재 학계에서 주장하는 한사군의 위치 비정을 믿지 못하겠다.
가설 : '사기'에 기록된
'以故遂定朝鮮,為四郡, 封參為澅清侯,陰為荻苴侯,唊為平州侯,長[降]為幾侯.最以父死頗有功,為溫陽侯.'
'이리하여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여 4군을 삼고 삼을 봉하여 획청후로 삼고 음을 봉하여 추저후로 삼고 협을 봉하여 평주후로 삼고 장(항)을 봉하여 기후로 삼았다. 최는 아비가 죽음으로써 자못 공이 있어 온양후로 삼았다.'
으로 보아 한나라가 설치한 한사군의 실체는 사실 조선 후 5인을 봉한 조선 5군이다.
근거 :
1. 한4군이 조선5군과 같다. 라는 근거(솔직히 없더군요.. 그래서 되도록 근거에 가까운 글을 그대로 옮겨 적어 보겠습니다..)
“한나라에 공을 세운 위만조선 고관들이 한 무제로부터 벼슬자리를 받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만약 이것이 한의 4군이라면 ‘전한서’에는 3군, ‘후한서’에는 4군(진번, 임둔, 낙랑, 현토)이라 했는데 왜 바꿨을까?
이러한 것들은 보다 깊이 연구되어야 하겠지만 ‘사기’에 나오는 오군은 모두 중국의 핵심지역인 산동성, 산서성, 발해 지역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역사 왜곡의 명수(?)들이 한사군을 한반도 쪽으로 밀어내기 위하여 엉뚱하게 진번, 임둔, 낙랑, 현토로 조작한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2. 낙랑군이 본래 중원에 있다. 라는 근거
이 주장의 근거는 ‘대명일통지’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영평부는 상나라때에 고죽국으로 있다가 주나라 때에는 유주에 속했으며 춘추시대에는 산융과 비자의 2개국으로 되었다. 진은 요서와 우북평 2군으로 삼았다. 한말에 공손도가 할거한장소가 되었고, 위나라는 노룡군을 열었다.(설치했다.) 북연은 평주 및 낙랑군을 설치했고, 후위(후에 위나라가?)가 낙랑을 패하고 북평군을 열었다.(後魏開樂浪魏北平郡 - 이 부분 해석이 좀 어렵네요.. 혹시 가능하신분?) 영평부는 동으로 산해관에 180리에 이르고, 서쪽으로 순천부 풍윤현에 120리에 이르고, 남쪽으로 해안까지 160리, 북쪽으로 도림구에 60리에 이른다.”
(‘대명일통지’ 권5)
→ 낙랑의 위치는 북평(현 베이징) 부근으로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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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반박해 보지요.. 주된 내용은 초록불 님의 블로그에서 가져왔음을 먼저 알려 드립니다.
2.한사군이 본래는 조선5군?
예... 이건 반박하고 자시고가 없습니다... 근거가 없으니깐요.. 조선5군을 한사군과 동일하게 여기고 있는것인데.. 여기에는 한4군의 기록을 믿을 수 없다는 의식이 기저에 깔려 있습니다. 저쪽의 주장에 의하면 ‘전한서’에는 4군을 3군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후한서’에는 4군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왜곡이 보인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동시에 이런 글도 있습니다.
예... 자기들도 도대체 어떻게 한4군과 조선5군을 연결 시켜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이지요.
3. ‘대명일통지’에 쓰여진 낙랑군??
‘대명일통지’에는 분명히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영평부에)북연은 평주 및 낙랑군을 설치했고, 후위(후에 위나라가?)가 낙랑을 패하고 북평군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단순히 이 기록만 본다면 낙랑군의 위치는 북평군 일대이고 현재 베이징 일대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기록과 교차 검증해 봤을 때 이 기록은 사실이며 동시에 거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우리측 사서인 삼국사기를 보시죠
고구려 본기 미천왕조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겨울 10월에 낙랑군에 침입하여 남녀 2천 명을 사로잡아왔다.”
때는 미천왕 14년 313년으로 이때에 낙랑군이 완전히 축출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자치통감’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건흥 원년(313) 요동의 장통이 낙랑, 대방2군에 웅거하니 고구려왕 을불리(미천왕)와 서로 공격하여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다. 이에 낙랑의 왕준이 장통에게 권고하여 백성 천여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부하게 하였다. 모용외가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두고 장통을 낙랑군 태수에 왕준을 낙랑군참군사로 삼았다.”
어라? 모용외가 낙랑군을 설치했답니다? 어딜까요? 뭐.. 당연히 모용외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겠지요? 모용외는 모용씨 선비족의 지도자로 동진 원제 에게 평주 자사로 임명 받은바 있는 인물입니다. 따라서 그 근거지는 요서 일대이며 그의 중심지인 창려군 일대에 낙랑군도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측이 가능합니다.
자.. 정리해 보죠.. 지금까지 나온 낙랑군은 총 2곳입니다. 한곳은 미천왕이 공격했을 것으로 보이는 낙랑군, 그리고 다른 한곳은 모용외가 장통을 받아들여 창려군 일대에 설치했을 것으로 보이는 낙랑군.. 뭐.. 전자가 이동해 후자가 된것이기에 두 행정기구가 공존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두 개의 낙랑군이 등장하게 된것이지요.
그래도 이상합니다... 조선5군의 위치는 산동성, 산서성, 발해지역 인걸요.. 아무리 서쪽으로 낙랑군이 이동했어도 여전히 산해군의 북쪽인 요서 지방에 위치했기에 대명일통지의 기록이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어디 좀더 찾아 보지요...
북위의 역사를 서술한 ‘위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연화(세조) 원년(432년), 영구, 성조, 요동, 낙랑, 대방, 현도 6군의 백성 3만 가구를 유주로 옮겼다.” 오호라.. 유주로 옮겼다라? 대명일통지의 기록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군요. “영평부는 상나라때에 고죽국으로 있다가 주나라 때에는 유주에 속했으며...”
예.. 그렇습니다. 북위 시절에 모용외의 자손 모용수가 건국한 후연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낙랑군을 비롯한 대방과 현도 군을 유주로 사민시켰던 것입니다.
조금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지요... 낙랑군을 유주의 정확히 어디에 사민시켰을 까요?
명말 청초에 지어진 ‘독사방여기요’ 노룡현 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북위 임금 도(세조)가 연화 초에 조선민을 비여(肥如)로 사민하여 조선현을 두고, 아울러 북평군을 두어 이를 다스리게 하였고, 북제가 북평군 치소인 신창을 옮기고 조선현을 병합하여 이에 들게하였다.”
드디어 북평군이 나왔군요.. ‘위서’의 기록에 대한 해석으로 볼수 있는 기록에서 조선민이 ‘비여(肥如)’로 사민되었고 이에 북평군을 두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비여는 어딜까요?
‘통전’ 주군전 북평군조에는 ‘盧龍漢肥如縣 有碣石山’ ‘노룡은 한의 비여현이다. 갈석산이 있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노룡이 나왔습니다. 이제 다시 대명일통지로 돌아가 보지요.
“(영평부에)위나라는 노룡군을 열었다.(설치했다.)”
그렇습니다.. 명나라때의 영평부가 바로 노룡군이며 동시에 비여현인 것입니다.
자.. 정리해 보지요..
지금 까지 나온 낙랑군의 종류는 2군데입니다.
1.미천왕이 죽기 살기로 싸웠던 낙랑군 → 한반도에 있는 것으로 추정
2.모용외가 장통을 받아 들여 설치한 낙랑군 → 요서 창려군 일대에 있는 것으로 추정
전자의 경우 313년에 후자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전자는 313년에 소멸한 것이지요.
후자의 낙랑군은 연화 원년 즉 북위 세조 432년 까지 존속하다가 모용외의 후손이 세운 후연이 멸망하면서 유주일대로 이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확한 장소는 한나라 때의 비여현이며 위나라의 노룡현입니다. 그리고 노룡현은 ‘독사방여기요’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리고 ‘대명일통지’의 기록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바로 북평군입니다. 현재의 베이징 일대이지요..
낙랑군 이동 경로
한반도 → 요서 창려군 일대 → 노룡현(=북평군 = 영평부)
4. 드디어 결론
대명일통지의 기록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낙랑군은 조선현이라는 이름으로 계속에서 이동했고 최종적으로는 명의 영평부에 도달했습니다. 따라서 애초에 낙랑군이 중국관내에 설치 되었다는 주장은 낙랑군의 전체적인 이동에 대한 연구가 전무한 소리라고 할수 있는 것이지요..
다시 조선5군으로 돌아가봅시다. 조선5군이 산동반도 일대에 설치된 것은 ‘사기’의 기록상 확인이 가능합니다만... 이 조선5군이 실제로 한4군과 동일한 존재 인지에 대해서는 해명이 불가능합니다. 실제로도 본인들도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했는데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들이 그토록 주장하는 낙랑군의 위치가 조선5군의 위치와 동일하기 때문에 조선5군이 한4군이라는 논리도 결국 낙랑군의 이동에 대한 몰이해의 결과로 봐야 하겠지요..
ps : 이 사람들.. 임승국씨 같은 환단고기 추종자들의 말을 종종 인용하더군요... 사실 거기서 부터 그 주장은 신뢰를 잃었지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