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26주차에 들어서는 임산부입니다.
착한 남편 만났고, 절실히 원했던 때에 아기가 생겼고, 임신 후 몸 상태도 썩 괜찮고 큰 문제 없는 삶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주엔 많이 우울했습니다.
남편이 10월 내내 일때문에 많이 바빠서 지쳐있었거든요.
그게 안쓰러워서 자꾸 남편 눈치 보다보니 오히려 서운한 마음이 쌓였는지 남편의 별 거 아닌 표정이나 행동에 눈물이 멈추질 않는거에요.
그 순간만 그런 게 아니라 다음날까지, 혼자 운전하다가 눈물이 또 왈칵 쏟아지기도 하구요.
이러다 임신우울증이라도 오면 아기한테까지 나쁜 영향이 있겠다 싶어서 남편에게 세 가지를 부탁했습니다.
첫째, 매일매일 예쁘다고 해 줄 것.
둘째, 시간 나는 대로 함께 산책 가자고 해 줄 것.
셋째, 11월 중에 함께 근사한 곳에서 외식할 수 있도록 준비해줄 것.
단, 위의 세가지 행동을 할 때는 절대 "하아~~ 니가 해달라니까 해준다"라는 느낌이 들지 않게 진심을 담을 것.
고맙게도 남편은 "내 마음은 당연히 항상 너를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네가 쓸쓸하게 느꼈다면 미안하다. 좀 더 많이 표현하도록 노력할게"라고 말해줬습니다. 여전히 바빠서 함께 산책은 못가고 있지만, 매일 여러 방식으로 애정표현을 해주고 있어요.
그리고 오늘은 남편이랑 데이트를 했습니다.
오랜만에 고데기로 말은 머리도 너무 잘되었고, 화장도 딱 마음에 들었고, 거울에 비친 옷차림도 만족스러웠어요.
쌀쌀한 바람맞은 후에 차안에서 발라드 음악 틀어놓고 드라이브하는 것도 기분 좋았구요.
미술관에서 남편이 좋아하는 그림책 작가의 작품 전시회가 있어서 보러갔는데, 서로의 어린시절 이야기 나눠가며 그림들을 보는 시간이 왠지모르게 따뜻하고 즐거웠습니다.
저녁은 남편이 예약해 놓은 이탈리안 레스토랑, 서비스도 음식도 나무랄데 없었구요. 무엇보다 정말 오랜만에 남편이랑 '한끼를 때우기 위한' 외식이 아니라 여유있게 시간을 즐기기 위한 외식을 하는 그 자체가 기분 좋았습니다. 분위기가 좋으니까 평소에 하기 어려웠던 오글토글한 이야기들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어서 서로가 "와~~ 그런 생각도 했어?"라며 스윗스윗했구요.
집에 돌아와서 남편은 페퍼민트티, 저는 캬라멜홍차 한잔씩 마시고, 우리만 맛난 거 먹고온 게 미안해서 우리집 고양이에게 차오추르 한 봉지 따주고 소파에 앉았는데 "오늘 하루 정말 행복했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미술관 관람료며 외식 비용이며, 적지 않은 돈이라면 적지 않은 돈이고, 순간적으로 "아... 살까말까 고민했던 아기용품 하나쯤은 살 수 있는 금액이었구나"란 생각이 들긴 했는데, 그냥 오늘 하루가 너무 행복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여행을 한 번 다녀오면 마음이 충전되고, 일상을 활기차게 보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잖아요. 저는 오늘 반나절의 짧은 외출 덕분에 또 한동안 즐거운 마음으로 일상의 사소한 스트레스들과 대적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은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오늘 쓴 돈은 낭비가 아니라 훌륭한 투자였다고 말하는 스스로에게 납득되었습니다.(그...뤠잇??)
아이가 태어나면 더더욱 이런 재충전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그럴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겠죠. 특히 저희는 둘 다에게 타국인 곳에서 살고 있다보니 친정과 시댁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어서 더 그럴 것 같습니다. 서로에게 서운한 마음이 쌓이고 상처를 줄 수도 있을거에요. 그럴 때, 오늘의 이 행복했던 기분을 잘 기억해 두어서, 아주 작고 사소한 일에서라도 현실에서 벗어나 재충전을 할 수 있는 슬기로움을 가질 수 있기를, 또한 남편에게도 그런 기회를 선사하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제 자신에게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정말 남편에게 고맙네요. 딱히 해 줄 수 있는 건 없고, 내일은 좋아하는 수입맥주나 한 짝 사다 냉장고에 넣어줘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