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책을 보다 놀란 사실이 있었어요 어린이날을 제정한 대표적인 인물 소파 방정환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허나 소춘 김기전에 대해서는 저같은 경우엔 전혀 듣지 못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참고 <행복은 가능한가> 최준식 지음 262쪽) 소춘 선생은 성자와 같은 분으로 북에서 생을 마감한 탓에 우리에게 익숙하지 못 하지만... 소파보다 더욱 철저하게 실천하신분이라 합니다.
(참고 http://m.blog.daum.net/jungam72/18608) 5월 5일은 어린이날이다. 대한민국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날을 알고 있고, 이 날의 유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아마도 꽤 많은 사람들이 교과서를 통해 배운 어린이날이란 이런 것이리라 생각한다. 오래전 어린이를 사랑하는 방정환이란 이름의 청년이 색동회라는 단체를 만들었고, 색동회가 어린이날을 선포하고 기념행사를 열었으며, 그 날이 오늘까지 이어져 국가행사로 정착되었다는. 물론 이 설명이 틀렸다고는 볼 수 없다. 지나치게 신화적이라는 것 외에는 말이다. 공식적으로 제1회 어린이날은 1923년 5월 1일 오후 3시에 열렸다.
~중간생략~
<3> 방정환의 아들 방용운의 증언에 의하면 방정환의 호인 “소파”는 김기전과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 “소춘(小春)”과 “소파(小波)”는 둘이 한 짝인 셈이다.
김기전은 파격적인 주장들을 많이 했는데, 예를 들어 “신은 없다”고 선언해버린다거나 “장유유서를 말폐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장유유서의 말폐” 주장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그가 1920~1921년의 시기에 가장 적대한 것은 다름아닌 삼강오륜이었다.
김기전은 소년 문제에 대해서도 그 당시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을 폈다. 바로 어린이와 어른의 인격이 동등하다는 주장이다. 김기전의 시각에서는 어린이는 어른들에게 억압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들을 해방시키기 전에는 소년 보호니 소년 수양이니 하는 기존의 소년운동 관점은 다 쓸모 없는 것이었다. 그는 어린이를 해방시키기 위한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기전 본인부터 이 주장을 실천했는데, 자신의 자녀들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기전이 자신의 소년운동 이론을 정립해갈 때 쯤, 1919년의 동맹휴학 열풍에 이어 다시 한번 소년운동에 불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진주 소년회 사건이다. 진주 소년회 사건은 1920년과 1921년에 두 차례 일어난 만세 시위 미수 사건이다. 당시 진주소년회의 소년활동가들은 자신들이 직접 쓴 독립선언서를 선포하려다 체포되었다. 이중 8명이 주동자로 지목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이중 16세 소년이 3명, 17세 소년이 2명, 19세 소년이 1명이었다. 김기전은 이 사건을 언론보도로 접하고 소년회 운동을 결심했다. 1921년 5월 1일, 천도교 청년회 산하에 있던 소년부가 “천도교 소년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천도교 소년회는 만 7세부터 만 16세까지라면 천도교인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입회가 가능했다. 이 천도교 소년회는 1년간의 활동 후 창립 1주년을 맞아 하나의 기념식을 치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1922년 5월 1일의 “어린이날”이다.
저희 부모님께서 기독교인이셔서 천도교에 대한 올바른 정보는 없었습니다. 만약 그 세력이 기독교나 불교만큼 컸다면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겠죠... 3.1운동 중심에 천도교가 큰 힘을 냈다는것도 최근에야 알았으니... 제가 역사에 많이 무지했다는 생각도 들고 저 스스로 이런 민족종교에 대해 단순 사이비취급했던 부분도 많이 반성했습니다. 지금 시대엔 어떤 변형이 일어났고 성질이 바뀌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려서부터 다녔던 교회에서 배운 정보가 문제가 많았다는 것도 다 커서 이젠 아이들 엄마가 된 후 알게됐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국정역사교과서에 대한 우려가 더 커집니다. 저는 이제 종교가 없습니다. 어차피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를 믿는다는것도 참 의미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허나 종교를 초월하여 우리 역사에 대해 제대로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