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생각을 해보면 우리는 부모님께 수백 수천번은 혼났던 기억이 있다, 또 부모님이 잔소리 하실때는 수천번은 이야기해도 못알아 들어 속상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했었다.
이 때 수백 혹은 수천번이 수치로서 사실일까 하면 그것은 아니다, 그저 많다는 혹은 대단하다는 뜻의 추상적인 단어일 뿐이다.
이 처럼 수백, 천, 삼천이라는 표현들은 대개 그 수치가 엄정하지 않은 이상 동북아시아에서는 단순하게 많다는 의미의 추상적인 표현인데, 그 어원을 찾아보자면 불교의 그것과 자연 발생설 등 여러 분류로 나뉘나 이 글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그 역사는 결코 짧지만은 않은 것은 확실하다. 유교 5경중 하나인 서경에 이르기를
紂有臣億萬
惟億萬心
周有臣三千
惟一心
라는 구절이 있다.
주왕에게는 억만명의 신하가 있었으나 모두 제각기 다른 마음이었고 주나라에는 삼천의 신하가 있었으나 모두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실제로 이 정도의 신하가 있었으리라 보기는 어렵다, 당시의 인구나 정치 제도 등을 통틀어 볼때 이는 단순한 추상적 표현이라 봐야 옳을 것이다.
또 당나라의 유명한 문인 이백이 벼슬에서 내려와 쓴 시에는 아래와 같은 시가 있었다,
白髮三千丈
緣愁似箇長
不知明鏡裏
何處得秋霜
직역하자면 맑은 거울속을 비춰보니 삼천장이나 되는 길이의 백발이 보이는데 어디서 가을 서리가 내렸는지 알수가 없어 수심만 깊어진다는 시인데, 정말 삼천 장이라면 얼추 3m는 넘는 길이로 역시 실제와는 다른 추상적 표현으로 이는 비슷한 시기의 유명한 문인 백거이의 시 장한가에서도 그러한 표현법을 찾아볼수 있다.
承歡侍宴無閑暇
春從春游夜專夜
後宮佳麗三千人
三千寵愛在一身
임금님 즐거움을 받들어 모시고 잔치 여느라 한가할 틈 없었고 봄엔 봄놀이 친구 되고 밤이면 임금님 사랑을 독차지 하였네. 후궁엔 아름다운 궁녀가 삼천이나 있었지만, 삼천궁녀가 받을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네.
말 그대로 모든 궁녀를 모아봐야, 양귀비의 미모를 가릴수 없다는 그 미모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는 시이다.
비단 한시에서만 이러한 표현을 찾아볼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소설 서유기에도 죽음에서 부활한 당 태종이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내용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궁녀 중에 노처녀 3천명을 풀어주는 내용이 있다.
본디 궁녀라는 것은 왕의 소유로, 그 생과 사는 하늘과 왕만이 할수 있는 것이 보통인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변덕이 아닐수 없는데, 물론 노처녀 3천명이라는 것은 실제 그 정도의 숫자가 정말로 있었다기 보다는 많이 풀어줬다는 표현으로 받아들여야 할것이다.
물론 이러한 표현법은 비단 중국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태종 14년 6월 지속되는 가뭄에 궁녀를 줄이고자 하는 태종에게 이숙번이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중국(中國)의 천자(天子)는 궁녀(宮女)가 3천 명이요, 공후(公侯)는 시첩(侍妾)이 적어도 2,30명을 내려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전하(殿下)의 존귀(尊貴)함으로써 궁첩(宮妾)이 수십 명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이것을 많다고 하여 내보낼수 있겠습니까? 비록 밖으로 내보낸다고 하더라도, 다시 가실(家室)을 가질 계책이 없으니, 그 원한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라고 하였는데 역시나 정말로 궁녀의 숫자나 시첩의 숫자를 조사한것은 물론 아닐것이다. 말 그대로 그 치 들은 댁보다 더 많이 향락을 누리고 사니 더 아낀다고 하늘이 그 뜻을 높게 살리 없다는 이야기 일것이다.
또 조선 중기 문인 민재인의 백마 강부에서도 三千其如雲 즉 구름 처럼 많은 삼천의 궁녀를 언급하였고 그 보다 앞서 조선 초의 김흔 역시 그의 시 낙화암에서 '삼천의 가무 모래에 몸을 맡기고 꽃이 지고 옥이 부숴지듯이 물에 몸을 맡기고 가버렸네' 라는 경구에서 추상적인 수사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볼수 있다.
이렇듯 삼천이니 혹은 천이라느니 하는 숫자는 비단 어느 국가 혹은 개인만의 전유물이라기 보다는 문화적인 바탕에서 나오는 추상적인 표현이다,
가령 불교의 경우를 보자 삼천배란 말 그대로 삼천번의 절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매우 지극한 정성을 이야기 한다, 삼천세계란 세 개로 나뉘어진 세상의 구도를 말하지만 셀수 없이 뻗어나간 우주의 만물을 이야기 한다, 또 삼천불이란 과거, 현재, 미래에 오실 부처를 말하지만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지는 수많은 계도를 뜻하기도 한다.
이 처럼 추상적인 표현은 시대를 가리지 않고 어느 곳이나 문화적인 바탕이 같다는 전제 하에 언제나 동일한 모습으로 있어왔고 어떠한 사실을 판별할때 이러한 추상적인 표현에 얽매여서는 안될것이다.
의자왕과 삼천궁녀라는 주제의 삼천궁녀 어원론을 가지고 떠들던 영양가 없던 이야기에서 더 이야기 하실 마음이 없으신듯하여 접은 댓글을 버리기 아까워 별개로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