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수학을 잘 못했던 나는, 그저 막연하게 '나는 문과구나'정도의 생각만 하고 있었다.
문과라면, 역시 정치외교학과를 가야 하는거 아냐? 라는 너무나 단순한 생각만을 가지고, 고등학교 1년을 마쳤다.
2. 고2가 되었다. 역시 나는 타고난 문과였다. 수학성적은 점점 낮아졌다. 반면에 언어와 외국어는 점수가 오르기만 했다.
특히 외국어는, 내가 보기에도, 나는 조금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전교 학생수 50여명의 작은 시골학교에서, 학원도 안가고, 혼자서 공부해서 토익이 900점을 넘었다.
이때의 나는 '그렇구나. 나는 외국어를 공부해야겠다'고.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3. 고3이 되었다. 지금에와서 생각해보면, 이 시기의 나는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전쟁이 있다고 말만 듣다가, 갑자기 그 격렬한 전투 한가운데로 떨어져버릴, 그런 위치.
헤맬 수 밖에 없다. 모두가 그러하듯. 나의 꿈은 자고 일어나면 바뀌어 있었다. 현실과 타협하는 날엔 '영어교육과', 협상이 잘 되지 않았던 날엔 '정치외교학과', 세상이 갑자기 싫어질 때는 '법학과'
'그래, 차라리 법학과 갔다가 사법고시나 해라'는 공무원(중등교사) 아버지의 말씀은, 비록 반은 장난이었을지 몰라도, 반은 진심이었으리라.
4. 그러다가 고3 담임선생님이 내게 똥을 주었다. 선생님은 나를 유심히 지켜보시더니 책을 추천해주셨다. 그 책은, 내 인생에 있어서 최초의 본격적인 철학책이었고, 덕분에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철학콘서트>. 나는 이 책을 가볍게 읽으려 했다. 그러나 책을 덮는데 느껴지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거짓말같아 보이지만, 나는 이 책 한 권을 읽음으로 인해 철학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5. 대학진학이 다가왔다. 수능 등급은 언어1/수리3/외국어1 이었다. 사회탐구는 기억나지 않는다. '역시 뼛속까지 문과군'이란 생각을 하며 성적표를 받았다. 서울 안에 있는 중상위권 대학을 노려봤다. 수학이 드디어 내 인생의 발목을 잡았다. 넘어졌다. 재수를 고민했으나, 포기했다. 거점 국립대 중 한 곳에서 4년 장학금을 보장받게 되었다. 운이 좋았다.
6. 일부러 철학과로 진학하지 않았다. 내가 있던 곳은 '자유전공학부'라 불리는 곳이었다. 나는 최소한 학부에서만큼은 자유롭게 공부하고 싶었다. 멋진 제너널리스트가 꿈이 되었다. 스페셜은 대학원에 가서 할 것이었으므로.
7. 그리고 6년이 지났다. 지금 나는 4학년이다. 곧 학부를 졸업한다. 그동안 나의 영어는 토익 900후반에서, 토플 100점 이상으로 변화했다. 시험이 너무 비싸서 자주 쳐보진 못한다. 그래도 다시 또 보면 성적은 오를 것이다. 3년 전에 봤던 토플이 107점 이었다. 더 오른다면 유학가능성도 충분하다. 최근엔 IELTS도 준비하고 있다. 나는 유학을 갈것이다.
8. 누군가 내게 철학 중에서도 뭘 전공할거냐고 묻는다면, 그는 철학에 아주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답한다. '윤리학'
9. 나는 올바르게 살고 싶었다. 지금도 올바르게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다면 올바른 것은 무엇인가? 올바름과 그름을 나누는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윤리적 문제에 봉착했을 때, 인간이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는 보편적 윤리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것인가? 이런 류의 질문들은, 그 형식이 매우 유치해보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있어서는 너무나 매력적인 아이들이었다. 나는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질문에 답하기 위해 사용할 의지가 있다.
10. 그러나 현실은 너무 어렵다. 차라리 내가 아예 재능이 없었더라면, 철학에 흥미가 없었더라면. 아니면 집에 돈이 엄청나게 많았더라면.
우리 아버지가 중등교사로 일하시면서 버는 돈은, 아버지, 어머니, 나, 동생 정도는 먹여살릴 만 하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공부가 너무나 하고싶은 아들은, 돈이 없어서 공부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