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도 한넘때문에 중국이 고대에
한반도 평양까지 만리장성을 지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현실이 웃길뿐이죠..ㅡ
그덕에 북한 급변시
UN상임이사국인 중국이 개입할수있는 역사적인 근거를 대주고있으니..ㅡ
고지도 위에서 싸우는 21세기 동북아
시사INLive | 남문희 대기자 | 입력 2015.05.01. 12:01
일본 아베 정권은 독도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온 데 이어 최근에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을 다시 꺼내들었다. 4월 말 아베가 미국을 방문해서 마무리할 새로운 미·일 방위협력지침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유사시 지금까지 후방 지원에 그쳤던 일본 자위대가 직접 무력행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가 골자라고 한다. 임나일본부는 일본이 4~6세기 한반도 남부 지역을 점령·지배하기 위해 설치했다는 기구다.
일본 사학계의 일방적 주장으로 학문적으로는 이미 수명을 마친, 문자 그대로의 설(說)이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수단으로 활용되어왔다. 한반도의 무력 충돌에 개입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를 일본이 정부 차원에서 새삼스레 임나일본부설을 제기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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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의원실 제공 <중국 역사지도집>(위)은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그렸다. 중국은 만리장성이 이어진 지역을 자국의 역사적 강역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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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7일 업무보고에서 도종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동북아 역사지도가 고대사의 핵심 이슈인 한사군의 강역 및 만리장성의 동단 문제와 관련해, 중국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제작된 <중국 역사지도집> 내용과 똑같은 이유가 뭐냐고 따져 물었다.
만리장성은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秦) 시대에 건설되었지만, 이후 왕조인 명(明)에서도 대규모 증축되었다는 주장이 나온다. 중국 측은 만리장성이 이어진 지역을 자국의 역사적 강역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중국 역사지도집>은 만리장성의 동단(동쪽 끝)을 평양까지 이어진 것으로 표시했다. 동북아 역사지도는 <중국 역사지도집>의 만리장성 자리를 국경선으로 표시해놓았다.
또한 동북아 역사지도에 따르면, 한사군이 평양 중심으로 포진해 있다. 도종환 의원은 이를 매우 심각한 사태라고 지적했다. 한사군의 위치는 역사학계에서도 아직 확정하지 못한 문제다. 여러 가지 다른 설들이 격하게 부딪친다. 1990년 이후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서도 구체적으로 표시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하필 동북아 역사재단이 내놓은 역사지도가 <중국 역사지도집>과 마찬가지로 한사군을 평양 주변에 위치시켜버린 것이다. 도종환 의원은 이 같은 주장의 근거로 사용했을 '1차 사료'를 제시하라고 동북아역사재단 측에 요구했다.
3월20일 열린 두 번째 업무보고에서 1차 사료와 관련된 궁금증이 풀렸다. 동북아 역사지도와 동일하게 한사군의 위치를 비정(어떤 미상의 물체에 대하여 그와 유사한 다른 물체와 비교하여 그 성질을 정함)한 지도가 나온 것이다
. '친일 사학자'로 비판받아온 이병도 전 서울대 교수의 저서 <신수한국사대관(新修韓國史大觀)> 38쪽에 실린 '한사군 변천도'였다(아래 오른쪽 그림). 즉 동북아 역사지도의 한사군 위치 비정은 이병도 전 교수의 주장을 그대로 반영한 셈이었다.
ⓒ도종환 의원실 제공 제작 중인 동북아 역사지도(가운데)는 <중국 역사지도집>(왼쪽)과 이병도 전 교수의 <신수한국사대관>(오른쪽)의 내용과 비슷해 논란이 제기됐다.그런데 동북아 역사지도가 중국 측의 <중국 역사지도집>을 빼닮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중국 역사지도집>이 '이병도의 한사군 위치 비정'을 먼저 베꼈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지도집>을 처음 만든 사람은 1970년대 초 중국 푸단 대학 교수였던 담기양이다.
<중국 역사지도집>은 1980년대 초에 업그레이드되는데, 이 과정에서 한사군에 대한 이병도 전 교수의 주장을 반영해 만리장성의 동단을 평양까지 작위적으로 이어 붙였다는 것이다(참조).
결국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병도 전 교수의 학설이 한국의 동북아 역사지도와 <중국 역사지도집>을 통일시켰고, 결과적으로 교육부 산하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이 중국 동북공정 논리를 수용한 꼴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역사학계 일부의 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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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역사지도에서 고대사 부문을 담당한 임기환 서울교대 교수는 '이병도 선생(의 학설)만큼 한사군 강역이나 낙랑군 25개 현을 구체적으로 비정한 연구가 없어서 참고했다. 그러나 (이병도 교수의 주장 이외에도) 평양의 낙랑 유적, 고조선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 위치에 대한 문헌 사료 등을 참조했다'라고
제작 경위를 밝혔다.
사실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연구는 현재진행형이다. 북한 사학계는 한사군이 요동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국내의 일부 학자들은 요서 지역으로 비정한다. 아직 섣불리 어느 쪽으로 단정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은 분명하다.
한사군의 위치는 고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다. '한사군이 어디 있었느냐'에 따라 고조선과 고구려는 물론 신라, 백제 등 고대국가의 강역이 연동되어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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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석산:고조선으로 가는 키워드>-②
연합뉴스 | 입력 2006.03.01. 14:18
갈석산은 또한 진 시황제가 북방 오랑캐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동쪽 기점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시되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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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시황제가 4차 순행에서 올랐다는 갈석산은 지금의 허베이성 친황다오시 일대 어딘가(아마도 노룡현 일대)에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니 이곳이 연나라-고조선, 진.한(秦漢)-위만조선의 주요한 국경 분기점이었다는 사실도 확실하다.
그런데 역사학자 이병도는 갈석을 뜻밖에도 한반도의 황해도에서 찾고자 했다.
앞서 태강지리지라는 문헌에서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이곳이 바로 만리장성이 시작하는 기점이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주목한 이병도는 지금의 황해도 북부에 위치한 수안(遂安)이란 곳이 수성(遂城)과 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이곳을 낙랑군 수성현 자리로 지목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갈석산도 자연히 황해도 수안 일대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다소 황당하게 보이는 이병도의 이런 주장을 통해 역설적으로 갈석산이란 곳이 고조선과 한사군을 이해하는 키워드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