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법에 대해서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준 글인 것 같아서, 다른 분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대동법을 이해하기 위해선 대동법이 왜 필요했는가를 먼저 이해해야합니다.
현대에는 모든 세금을 돈으로 내지만, 당시는 농업이 국가 주요산업이고 화폐가 활성화되지 않았기에 세금을 쌀로 내었습니다. 그런데 이 쌀 이외에 공납이라하여 해당 지역의 특산품을 진상해야했지요.
쉽게 말해 문구점을 하는 김씨 가족의 세금이 30만원이라면 그 30만원 이외에 책과 연필을 세금으로 내야합니다. 그런데 김씨가족의 사정에 의해 문구점을 그만두게 되어서 더이상 책과 연필을 세금으로 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국가는 여전히 김씨 가족에게 책과 연필을 세금으로 내길 요구하고 김씨가족은 어쩔 수 없이 책과 연필을 다른 곳에서 사서 국가에 진상합니다.
이런 일이 조선 팔도 전국에서 마을 단위로 일어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점점 더 케이스가 많아졌습니다. 당연히 이런 현상을 이용해 먹는 무리가 생깁니다.
그 전문업을 방납(防納)이라 합니다.
방납은 국가가 요구하는 해당 물품을 진상할 수 없는 백성에게 그 물건을 비싼 값에 팔면서 이득을 취하지요. 덕분에 백성은 기존 세금 + 방납에 의한 폭리까지 감수해야합니다. 거기에 시간이 지날 수록 요구 공물의 수는 늘어나기까지 하고 없던 공물이 생겨나기까지 합니다. 폐단이 구조화되어버리고 국가 세금보다 공물을 진상하기 위해 방납에 지급하는 돈이 더 비싼,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상황이 발생합니다.
조선 시대 지식인(이며 동시에 기득권)이 이런 현상을 모를리가 없었습니다만,
이런 폐단에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집단은 당연히 기득권이기에 스스로의 권리를 놓을리가 없었습니다.
이 때 이런 현상에 처음 제대로 일침을 가한 건 조선시대 최고의 천재로 불리워진 율곡 이이의 만언소에서였습니다.
만언소의 내용 중 하나가 연산군 때 무너진 공납으로 인해 그 폐단이 심해졌기에 비록 선대에 정한 제도라도 그걸 계속 유지할 수 없다는 겁니다.
만언소는 지금봐도 엄청난 명문의 글이고 당시 시대의 문제점을 아주 날카롭게 지적한 글인데, 선조는 이 글을 보고 극찬을 합니다. 다만, 그 내용이 너무 방대하며 개혁적인지라 당장에 모두 시행할 순 없다 말하면서도 만언소를 다른 대소신료들에게 모두 돌려보게 하고 의논케 합니다.
이런 이이의 뜻이 통했는지 후에 조정의 지식인은 공물에 대한 폐단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하기 위해 고민했습니다.
폐단의 해결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1. 공물 개혁론 : 공물의 폐단을 바로잡고 해당 지역에 맞는 공물을 다시 조사해 바치게 하는 것.
2. 대동법 : 공물이고 뭐고 모든 세금을 쌀로 통일 해 바치게 하는 것.
딱 보면 후자가 쉽고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전자가 훨씬 쉬운 방법입니다. 전자를 하기 위해선 해당 지역의 공물조사만 하면 되지만, 후자를 하기 위해선 전 국토의 토지 조사를 모두 다시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전자를 하기 위해선 김씨 집이 무슨 일을 하고 박씨 집은 무슨 일을 하는지만 조사하면 되는데,
후자를 하기 위해선 김씨 집 박씨집의 모든 수익과 그 사업 규모를 죄다 조사해야하며 그걸 수치화 해야합니다.
현대에도 토지조사를 전국에 걸쳐 하는 게 쉽지 않은데 전근대 시대에 그걸 하는 건 정말 엄청난 일입니다.
둘 다 사회의 발전을 위한 공론이었지만, 정책의 정도가 비교될 수 없을만큼 엄청난 갭이 있었지요.
개혁 자체를 싫어하는 사대부(기득권)는 논외로 치더라도 개혁에 동의하는 사대부조차 의견이 엇갈렸고 특히 대동법의 경우엔 그 정도가 너무 급진적이었습니다.
당연히 공납의 폐단을 없애는 쪽 의견이 중심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지요.
그렇기에 대동법은 아주 조심스럽게 시행됩니다.
광해군 즉위년에 영의정 이원익의 건의로 시작합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세금을 쌀로만 걷은 뒤 국가에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국가에서 걷은 쌀로 방납인에게 필요한 물품을 사게 하자는 거지요.
그럼 국가를 상대로 거래를 하다보니 방납인은 폭리를 취할 수 없고
백성 역시 세금을 쌀로만 내면 되니 방납에 의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다가 세금의 기준이 토지만으로 이루어지다보니 땅이 적으면 세금 부담이 적어지고
땅이 없으면 부담이 미미하거나 없게되니 진실로 백성을 위한 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대동법은 처음에 선혜청이란 이름으로 경기도 지역에서만 시험 시행됩니다.
경기도 선혜청에서 쌀로 세금을 걷게 된 건 시행부터 백성들의 환영을 받게 됩니다.
반면 관리들 입장에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제도여서 반대하는 의견이 점점 많아집니다.
앞에서 말했듯 토지조사를 다시 해야하고 각 지역별 계층별 이해관계가 갈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은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지역에 이 제도가 시행되길 기다렸고
그걸 가장 적극적으로 요구한 지역은 강원도였습니다.
선혜청 작미가 시행된 지 2년 째,
강원도 관찰사 홍서봉이 조정에 요구합니다.
강원도도 경기도처럼 쌀로 세금을 내게 해달라는 거지요.
사실 강원도란 지역은 지역 특성상 쌀 농사가 활성화될 수 없었기에 공납의 정도가 굉장히 심했던 지역입니다.
공납이 심하다는 건 방납의 폐단이 가장 극심한 지역이라는 것이기에 이 대동법의 시행을 가장 간절히 기다린 곳이었지요.
그리고 선혜청에선 그 의견을 받아들여 강원도에서 시행할 때의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합니다만..
최종 결제를 담당하는 광해군은 그 의견을 거절합니다.
작미로 세금을 걷는 걸 경기지역에만 하는 건 그래도 괜찮지만 다른 지역으로 확장할 수는 없다는 거지요.
다른 지역도 확장 된다면 전국에서 그걸 요구할 테고 그 끝에 곤란한 상황을 겪게 될 거라며 반대한 것입니다.
실제 광해군은 선혜청을 일시적인 관청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은 듯 하기도 합니다.
광해군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는 오항녕 교수지만,
오항녕 교수의 대동법에 대한 시각을 빌리면 광해군의 행동이 이해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자동차를 고치기 위해선 시동을 끄고 차를 고치면 됩니다.
하지만 사람을 고치기 위해선 사람을 껐다가 킬 수 없는 법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고쳐야한다는 거지요.
정책도 이와 비슷합니다.
정책을 개혁하기 위해선 정책을 중단할 수가 없지만,
다만 정책이 중단되었다는 가정을 하고 개혁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이렇다보니 이론과 실제 사이에선 괴리가 발생할 수 밖에 없고 그 괴리 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합니다.
아마 광해군은 대동법 개혁에 의한 이익보다 그 충돌에 대한 손실이 더 크다 생각했던 게 아닌가 합니다.
아니, 광해군뿐 아니라 대동법에 반대한 모든 이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여하튼 광해군이 반정으로 물러날 때까지 대동법은 경기도 지역 밖으로 벗어나지 못 하고 15년 동안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되지요.
그렇게 정체된 대동법은 인조반정에 의해 집권한 서인세력에 의해 다시 시작됩니다.
사실 여기엔 정치적인 의도가 많이 가미되어 있었을 겁니다.
반정으로 광해군을 끌어 내렸으면 행동을 정당화할 이유가 필요했고 그 이유중 하나가 민생이었습니다.
광해군 시기에 궁궐공사로 피폐해진 민생을 다독일 필요가 있었는데,
궁궐공사를 멈추는 걸론 한계가 있었지요. 즉, 플러스 알파가 필요했고 그게 대동법의 확대입니다.
말년에 진정 꼴통같았던 인조도 반정으로 즉위한 직후엔
광해군보다 훌륭한 왕이 되어야하겠다는 각오 때문인지 진심으로 민생을 돌보기 위해 상당한 고민을 합니다.
경연을 아침 저녁으로 꾸준히 하면서 대동법에 대해서도 아주 심도있는 토론을 하지요.
풍족한 토지를 가지고 있던 충청, 전라, 경상도 지방과 다르게 위에 이야기했듯
강원도는 대동법의 시행을 간절히 원했고 인조 역시 강원도의 대동법 확대에 찬성하는 결론에 이릅니다.
또한 충청, 전라, 강원도 지방에 대동청을 설치하여 대동법 확대의 기반을 다지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광해군 때의 기득권이 반정으로 사라졌다고 해도,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자들 역시 권력을 잡으면 똑같이 기득권이 됩니다.
기득권은 필연적으로 변화를 싫어합니다.
당연히 대동법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볼리가 없었습니다.
대동법에 가장 크게 반대했던 인물은 좌의정 윤방이었습니다.
그는 대동법은 민간이 불편하게 여기니 대동법을 가장 편리하게 여기는 강원도만 빼놓고 모두 폐지하자는 주장을 하지요.
그 근거는 공물은 기한을 두지 않고 받는 반면 대동법은 쌀을 기한을 정하고 받습니다.
그런데 그 기한에 갑자기 쌀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한순간에 마련하는 것이냐는 거지요.
또한, 그 많은 쌀을 배로 운반하다가 생기는 부작용 역시 우려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대동법은 폐지되는 듯 했으나.. 조선 특성상 한 번 시행된 법은 쉽사리 없앨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나 관청의 개혁정도가 아닌 경기도, 강원도 전체에 이미 적용해버린 대동법을
다시 공납의 형태로 전환하는 것은 공물을 폐지하고 대동법을 시행하는만큼이나 쉬운 일이 아니었죠.
그 때문에 다행히 경기도와 강원도의 대동법은 계속해 유지해나갑니다.
그런 사이에 대동법의 확대를 가장 강력히 주장한 인물이 있습니다.
대동법의 아버지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는 인물 '김육'입니다.
김육은 광해군 대에 자신의 스승인 성혼의 원통함을 풀어줄 것을 건의했으나 거절당하고
결국 정인홍과의 갈등으로 관직에서 물러납니다.
그러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추천으로 발탁되어 관직에 다시 오르게 되고
헌납, 사간, 이조 정랑, 부수찬, 동지사 등을 지내다가 인조 16년 충청감사로 발탁됩니다.
감사로 발령된지 3개월만에 김육은 도내 토지 넓이를 모두 측정하여
당시 화폐로 쓰였던 쌀과 면포를 기준으로 계산하고
대동법이 시행되었을 시 조정이 얻게될 이득을 산술적으로 풀이해 자세히 고하지요.
또한 풍년과 흉년에 따른 면포와 쌀의 기준을 조정하여
흉년에는 무명을 기준으로 하여 쌀 값을 따르게 하고
풍년에는 쌀로 무명 값을 따르게 하여 풍/흉년에 따른 세금 부담의 정도를 최소와 하는 방법까지 건의합니다.
이쯤 되면 대동법의 구체적인 사안이 거의 완성되었다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이 때 인조는 왕이 된지 16년이나 지난 시점이고 병자호란까지 겪어 초심은 이미 사라졌으며
당연히 대동법의 확대를 반기지 않았습니다.
사실 인조뿐 아니라 거의 모든 대신이 대동법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그게 그들이 기득권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까 말했던 이론과 현실사이에서 생기는 실질적 문제점들이 계속해서 발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대동법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대부 역시 존재했습니다.
인조 집권 초기 이원익이 처음 대동법의 확대를 주장하였고
이서가 그것을 강력히 찬성하여 성사시켰습니다.
김육이 그것을 구체화 했으며, 김익희가 만언소로 대동법의 시행을 또 주장했고
조석윤은 공물을 완전히 포기하진 않더라도 축소하면서 대동법의 확대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이시방의 경우엔 죽어가면서까지 자신이 죽으면 대동법을 누가 시행할 것인가하며 탄식했지요.
그리고 인조 17년, 경상도에서 상당한 풍년이 들었습니다.
풍년이 든 이 때야말로 대동법을 확대시키기 가장 좋은 시기였고,
이에 경상 감사 이명웅은 경상도에 대동법을 시험삼아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고 결국 인조의 승낙을 받아냅니다.
대동법이 처음 시행된지 30년이 훌쩍 지난 시점에 시험적 실행이긴 하지만
경기도와 강원도를 벗어난 지역에서 처음 시행되었습니다.
하지만 경상도 시행도 시험 시행에 그치고 인조가 죽을 때까지 대동법은 더이상 확대되는 데 실패합니다.
그리고 인조의 둘째아들 효종이 즉위합니다.
어떤 정책이 시행되기 가장 좋은 시기는 새로운 정권이 시작하는 때입니다.
대동법의 경기도 시행이 광해군 즉위년에 시행되었고
강원도 시행이 인조정권 초기에 시행되었습니다.
정체된 대동법을 다시 시작하는데 이보다 좋은 타이밍이 없었던 것이죠.
효종 즉위년, 우의정으로 승진한 김육은 기다렸다는 듯 인조 때 정체된 대동법의 확대를 주장합니다.
이 때 김육이 제시한 대동법은 그 전의 것보다 훨씬 더 구체화되었습니다.
아주 칼을 갈고 있었던 것이었죠.
이 시기 좌의정은 조익으로 인조 때에 대동법을 철폐하려고 했을 때 가장 강력히 반대한 사람입니다.
좌우의정이 모두 대동법 강력 찬성론자이니 이미 대동법의 시행은 기정사실화된 것 같았으나
광해군, 인조와 다르게 효종은 집권 초기부터 대동법에 반대입장을 비춥니다.
그 뒤에는 영의정 이경석과 이조판서 김집이 있었지요. 현실적인 문제도 고려해야한다는 겁니다.
효종이 이렇듯 대동법 확대에 현실적인 문제를 들먹이며 미지근 거리자
김육은 현실적인 문제는 오로지 성상의 결단밖에 남은 것이 없다고 피를 토하며 간언하지만 결국 듣지 않습니다.
이에 빡친 김육은 바로 사직을 해버리려 합니다.-_-;
당연히 효종은 사직서를 처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김육의 반협박(?)이 나오자 이젠 반대 급부에서 난리가 납니다.
이조판서 김집이 대동법 시행에 있어 김육과 충돌이 생기자 아예 고향으로 돌아가버린 거지요-_-;;
그 사이에서 효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는데,
그래도 이 때 송시열이 아주 훌륭한 말을 합니다.
'비록 대동법에 관한 의논이 맞지 않아 불편한 마음이 있지만,
양쪽 주장 모두 공도(공평하고 바른 도리)를 위한 마음에서 나온 것일 뿐,
다만 방법에 의해서 격해졌을 뿐입니다.'
즉, 두 주장이 다르긴 하나 그 마음은 모두 국가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왔다는 뜻입니다.
그런 깊은 마음과는 별개로 이 때부터 아주 난리가 납니다.
대동법에 대한 토론이 엄청나게 진행되고 찬성하는 쪽에서도 반대하는 쪽에서도
왜 자신의 말이 맞는지에 대한 이유를 역설하면서 내 말 안 들어주면 서로 사직하겠다고 반협박성 이야기까지 오가지요.
그래도 이런 논의가 계속된다는 것 자체가 대동법 시행에 있어선 아주 긍정적인 신호였습니다.
토론은 반드시 정책의 단단함을 만들어주니까요.
그리고 효종 2년. 드디어 충청도의 대동법이 시행됩니다.
대동법이 시행된 지 약 35년만에 3번째 지역이 공식적으로 확정된 것이지요.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육은 충청 감사를 지낸 경험이 있어 충청도 전문가였고 아마 그게 충청지역이 선택된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정책을 시행했을 때 백성들이 혜택을 얻기까지엔 시간이 걸리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 시간을 참지 못해합니다.
당연히 반발이 일고 그 반발은 조정의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반발은 현실적이었고 현실적인 반발은 대동법 반대파들에게 대동법이 불필요한 명분을 만들어주지요.
결국 효종은 충청지방으로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대동법이 편리한지에 관한 조사까지 감행합니다.
의견이 충돌합니다.
광해군 때엔 광해군의 한마디로 논의가 끝나 대동법이 좌절됩니다.
인조 때는 논의가 자주 이루어지나 방향이 안 된다는 방향으로 쏠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논의가 됐다는 자체만으로 대동법의 기둥이 보이지 않게 세워졌습니다.
효종 때는 대동법이 국가 정책의 중심이 됩니다.
찬성파와 반대파가 대립합니다.
그러나 그 대립 사이에 정책은 점점 더 단단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조 때와 다르게 대립을 하면서도 그 방향은 대동법의 확대로 틀어져 있었습니다.
정책은 느리지만 단단하게 점점 더 긍정적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효종 8년 드디어 전라도 지방의 확대까지 논의가 시작됩니다.
시작은 당연히 김육입니다.
전라도 사람들이 충청도 대동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왜 우리 지역은 안 해주냐'고 청하였고 이를 이유로 전라도 확대를 역설했던 것이지요.
김육의 고집은 효종이 알고 있었고 실제 주장하는 이유도 합당했기에
조정 내에서 호남지방의 확대가 구체적으로 논의됩니다.
하지만 반대를 하는 이들도 적지 않게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 조정에서 대동법을 주장하는 이가 소수이다.
- 대동법을 편하게 여기는 고을이 있는 반면 불편하게 있는 고을 역시 존재한다.
- 대동법이 시행된 뒤로 궁궐내에서 사용할 약재를 서울에서 구입해야하는데 그 품질이 과거 공납했던 것보다 좋지 못하다.
- 고을 수령의 권한이 축소된다.
등등이 있었지요.
굉장히 현실적인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었는지 전라남도 진사 박사문이 상소를 올려 대동법의 시행을 청합니다.
효종은 조정에서 의논중이니 일단 물러가라하고 충청도에서 생기는 폐단을 조사합니다.
김육은 다시 압박합니다.
효종은 너무 큰 일이니 함부로 시행할 수 없다고 일단 시기를 늦춥니다.
그러나 이미 대동법의 효력은 모두 인정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주장하는 자가 비록 소수더라도 주장의 설득력 측면에선 훨씬 강력했습니다.
대동법 반대파였던 송시열도 충청지방 대동법을 편리하게 여기는 자가 많음으로 좋은 법이라 인정해버립니다.
더이상 호남지방 대동법을 거부할 이유가 사라졌습니다.
드디어 효종 9년 부분 시행이긴 하지만 전라도 지방의 대동법 확대까지 결정됩니다.
그리고 대동법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김육은 이 해 사망합니다.
전라도 지역 대동법의 일을 자신이 죽으면 흐지부지 될까 걱정하는 상소를 남기고...
효종은 고집불통이었던 김육을 꺼림직해 하였으면서도 그의 정신 자체는 인정했습니다.
대신들을 모두 모아놓고 대동법이 이처럼 시행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일은 반드시 대신들이 담당해야 도모할 수 있는데
만약 서로 미루기만하다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임금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지만,
김육은 혼자 스스로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 없이 시행하였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동법에 대한 대신들의 찬반 의견을 모두 듣고 정리해 전라도 대동법 완전 시행을 추진하려는데...
3개월 후 효종은 갑자기 사망해버립니다.
대동법을 강력히 추진했던 김육도 죽고, 대동법을 가장 널리 시행했던 효종도 죽어버렸습니다.
현종은 19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를 했으니 한순간에 대동법 추진의 공백이 생겨버린 것이죠.
하지만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그 정신은 계승됩니다.
현종은 즉위하자마자 대동법 시행에 관해 대신들의 의견을 먼저 묻고 효종이 추진하려 했던
전라도 나머지 지역의 대동법 시행을 승인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기는 게 해안지방 사람들은 대동법이 없어질까 두려워하고
산간지방 사람들은 대동법이 시행되는 것을 걱정한다는 겁니다.
같은 지방 사람이라도 사는 곳에 따라 정책을 대하는 정도가 달랐고,
그렇다하여 같은 도의 어디는 시행하고 어디는 안 하고를 영구히 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젠 정책의 미세한 조정이 이루어질 차례입니다.
아까 언급했든 대동법은 세금을 쌀과 면포로 낸다고 했는데,
산간지방은 벼농사를 짓기 힘드니 면포로 대신 냅니다.
면포를 화폐 대신 쓰던 시대였지만 그렇다하여 면포가 화폐 그 자체는 아니었습니다.
즉, 세금을 내기 위해 면포를 구입해야했고 그 거래에서 이미 일정부분 손실을 감당해야했던 것이지요.
그렇기에 쌀을 내는 양을 일정부분 늘림으로써 세율을 조정하는 것을 논의합니다.
현종은 암행어사도 계속 보내 상황을 듣습니다.
전라도 산간지방의 대동법을 폐지하는 것이 좋은지 세율 조정하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좋은지 알기 위해서였죠.
조사 후 암행어사 신명규가 호남의 대동법은 산간지방에서 불편하다 하여 폐지하였는데,
염문을 해보니 세력있는 집안은 폐지하길 원하고, 가난한 집안은 모두 다시 시행되길 원한다고 말합니다.
이젠 고민할 것도 없는 의견이었지요.
전라도의 대동법 완전 시행이 확정됩니다.
대동법이 처음 추진 된 지 이미 60년이 지난 시점에 전라도 대동법 완전 시행이 결정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년 후 이어지는 그 악명 높은 경신 대기근.
기근이 지나고 현종 14년 사간이 현종에게 올린 보고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비록 신해년의 변을 겪었지만 지금까지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대동법의 은혜입니다.'
이제 남은 곳은 인조 때 임시 추진되었다 실패한 경상도와 황해도입니다.
그리고 다음 바톤 터치자는 현종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숙종.
숙종 3년 경상도 지방도 호남, 호서지방과 같이 전도에 대동법이 시행되었고,
이젠 대동법을 시행하느냐 안 하느냐의 논의보단
그 시기와 정도에 관한 논의가 중점이 됩니다.
또 시행 도중에 생기는 부작용이나 시행한지 오래되어 자연스레 생기는 폐단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요.
하지만 여기에서 복병을 만납니다.
어떠한 정책도 완전할 순 없으며 부작용이 생길 수 밖에 없고,
그 부작용은 시간이 지날 수록 고착화됩니다.
각 도를 따로따로 시행하다보니 경기도는 이미 대동법을 시행한지 100년 가까이 지났고
당연히 어떠한 부작용이 눈에 띌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황해도 지방의 대동법 확대가 논의는 끝난 상태에서 결단이 내려지지 않는 고착 상태가 유지된 것이죠.
이에 대한 절충안으로 들고온 것이 상정법이었고,
황해도 지방을 대읍, 중읍, 소읍으로 나누어 그 노동의 중함에 따라서
그 정도를 절반으로 감하거나 1/3으로 감하여 차별화하는 대신,
원래 1결에 12두 씩 내는 대동미 이외에 별도로 3두를 더 지급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숙종 34년 8도 중 5도의 대동법과 황해도 1도의 상정법으로 최북단 지역인 관서와 관북지방을 제외한
6도에 대동법의 시행이 성사됩니다.
이 때가 1708년이었고 대동법이 처음 시행되었을 때가 1608년이었으니,
정확히 100년만에 대동법이라는 조선의 최대 개혁이 완성된 것입니다.
국사 교과서는 제가 가지고 있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이 대동법에 대한 7차 초판 인쇄된 누드교과서의 의견은
'여전히 별공은 존재했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지주가 자신이 내야하는 대동세를
소작농이 내도록 시키는 등의 폐단이 발생하면서 농민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사태는 대동법 실시 이전보다 더 심해졌지 나아지지는 않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라고 적혀있습니다.
100년동안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으며 완성되었던 조선의 개혁은
현대에 이정도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현대의 우리가 조선시대 중후반 시대를 모두 살지 못하기에 정말 대동법의 실시 이전보다
이후의 생활이 더 피폐했는지 안 했는지에 대해 확답을 내릴 수 없습니다.
확실한 건 어떤 개혁도 완벽하지 못하고 100년에 걸친 개혁인 대동법 조차
그 한계성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이 그랬고,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러합니다.
그걸 이루기 위한 희생은 너무나 확실한데 그 완성은 언제나 부족합니다.
하지만 그렇다하여 그 희생이 정말 가치가 없는 것인가.
정말 100년에 걸친 논의가 의미가 없는 행동이었는가.
그에 대한 평가를 정조의 말로 대신하겠습니다.
'대동이란 기자의 홍범 칠계의에 있는, 전체 의사가 다 같다고 하는 것이다.
대동법이 원래는 공물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시작한 것인데,
그것을 상납하면 공물가가 되고, 유치해두면 저축이 되고, 떼어주면 관청의 수요가 된다.
각각 나누어서 말하면 이름이 셋이 되고, 합쳐 말하면 대동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뜻은 대체로 위에서는 받고 아래서는 바친다는 뜻을 취한 것으로서,
시골 백성들은 힘을 펼 수 있고, 도시 사람들은 생활이 윤택해지고, 수령들은 자신의 청렴성을 유지할 수 있다.
예산 집행에 가닥이 잡히고, 또 장사꾼들은 사고팔 길이 생기며, 배와 수레는 품팔이 할 길이 있어,
상하 내외 어디로 보나 고루 공평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대동이라는 이름이 헛이름이 아니었다. (양홍렬 역, 홍재전서 중 대동법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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