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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전 어학연수시절 열정페이
게시물ID : emigration_50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드레스덴가이
추천 : 14
조회수 : 1286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5/09/25 21:47:03
미국정착 이화는 추후에 쓰도록하구요.
요즘 하도 열정페이란 말이 많아서, 저도 제경험을 적어보려합니다.

때는 십년전 뉴질랜드 오클랜드입니다. 
전 학생비자로 어학원을 다니고 있었죠. 하지만 여행을 하기위해선 부모님께 손을 안벌리고 혼자 돈을 마련하여, 뉴질랜드 전국투어를 해보기로 다짐하고 준비를 했었습니다.
다행히 시내에 학원근처에 한국인사장님이 하시는 편의점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편의점과 그옆 리쿼샵을 같이 운영하셨던분이었어요. 
처음엔 시금 팔불을 받기로하고 들어갔는데 첫주급받을때가되니, 넌 아직 수습이고 일도배워야하니 육불로 계산을 해서주는겁니다. 처음한달은 육불을 받아라했죠. 물론 이게 한달지나도 팔불로는 안올려줬지만요. 
게다가 전 당연히 매장에서 상품진열및 트럭이오면 물건상하차를도와주고, 창고로 운반을하는일이었는데 이사장은 일이없을땐 알바노는꼴을 못보는지 청소부터 시작하여, 심지어는 마우리들 물건훔쳐가는지 잘 감시하고, 물건들고 도망갈시엔 저보고 잡아야한다고 시키더군요. 지금생각해보면 그렇게 하다가 칼이라도 맞았으면 어찌됬을까 아찔합니다. 
게다가, 전 분명 편의점에서 일하기로 하고 갔는데, 옆에 리쿼샵에 술이들어오면 그리로 출동해서 엄청무거운 술박스를 날라야했어요. 그리고 혹시나 술병을 떨어뜨려 깨드리거나하면 월급에서 공제를했죠. 저를 전천후로 부려먹었죠.
본인은 왕년에 국내대기업 임원이었다고하시는데, 회사에서도 밑에사람 어찌 부려먹었는지 짐작이가더군요. 아니 저를 남의집 귀한자식을 일못한다고 막대기로 배를쿡쿡찌르고 욕을하고..... 상처를 너무 많이받았었죠. 밤 12시에마쳐 막차버스타고 집에오는데 이건아니다싶었어요. 
그리 돈벌어서 여행한들 즐거울까 싶었죠.

그래서 친구와같이 차라리 사과농장엘가서 사과를 따기로하고 사장님께 일을관둔다했죠. 한마디가 이거였어요. 니가 그따위 헤이한 정신상태로 사과딴다고 돈을 벌것 같아? 이러더군요. 그러면서 배를 몽둥이로 쿡쿡찌르는데... 참았습니다. 그때 전 이미 한국의 갑을관계를 깨달았던거같아요. 전할 수 있는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학생비자가 아르바이트가 그당시는 불법이라 저도 말할처지는 못되었구요.
아무튼 속시원히 관두고 사과농장가서 일을하니 몸은 힘들어도 너무 편하더군요. 능력제로 일한대로 돈받고, 옆에서 갈구는 사람없으니... 아마 전 그때부터 깨닳은것 같네요. 한국회사에서 한국관리자밑에서 일하는건 정말힘들거것같아 라구요. 물론 다 그런건 아니지만, 일부 유명한 기업들은 몇몇회사들은 압니다. 
차라리, 외국인 밑에서 일하는게 그나마 합리적으로 부려먹기라도 하니 전 좋더라구요.

 지금은 유학생도 파트타임으로 일을할수 있도록 법이 바뀐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학생분이나 외국에서 파트타임하시는분들은 일하시기전에 확실하게 자신의 업무롤과업무시간이 명시된 컨트랙을 꼼꼼히 읽은뒤 사인하시고 일을 시작하시구요. 착한한국 학생들 잘못된점에 참지마시길 바랍니다. 불합리한 대우나 잘못된 점이 있을시, 꼬박꼬박 기록해두시거나 녹화또는 녹음을 해두세요.
그렇다면, 굳이 변호사를 고용안하셔도 고용주에게 반박할 힘이 생길겁니다. 정안된다면 변호사를 알아보셔도 좋구요. 
전 이렇게 한국인끼리 불합리한대접을 받는거 저희세대에서 끊어내고싶어요. 저희자식세대에는 공정히일한만큼 보상받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구요. 그러기위해서 이러한 견제를 통해 고용주도 깨닫고 변화될수 있길 바랍니다. 
한국에선 참는게 미덕이었죠. 하지만, 이젠 참는건 상처를 더 곪게할뿐 치유되진 않아요.
 
우리 똑똑한 젊은이들이 올바른 목소리를 낼때 상처는 아물고 치유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잘 못하지만, 부조리에대한 올바른 외침이 아주 많이 필요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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