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중국 방문 중에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부제까지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개헌론을 제기했다가 하루만에 “대통령께 죄송하다”며 꼬리를 내렸다.
여당대표 압박하는 제왕적 대통령
“개헌은 경제를 삼키는 블랙홀이 될 것”이라고 개헌론에 쐐기를 박았던 청와대는 아직도 분이 덜 풀렸는지 고위관계자의 입을 빌려 “실수로 언급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집권여당의 대표를 이례적이고 공개적으로 겁박했다. 참으로 볼썽사나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헌법 개정은 나라의 근본 틀을 바꾸는 중차대한 일이다. 1987년에 만들어진 현행 헌법을 바꿀지 말지는 국민이 판단할 몫이고, 이에 대해 정치의 중심에 있어야 할 국회에서 활발한 공론의 장이 펼쳐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지난 대선 때는 “집권후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되는 개헌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공약했다. 어떠한 경우도 당파적, 정략적 목적에서 논의 자체를 봉쇄해선 안된다. 청와대가 아무리 개헌 논의를 틀어막아도 김무성 대표의 말처럼 정기국회가 끝나면 봇물 터지듯 다시 불붙을 가능성이 크다.
개헌을 주장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 중 하나가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청와대가 집권 여당 대표의 입까지 막아가며 개헌 논의에 찬물을 끼얹고, 여당대표가 “대통령께서 아셈 회의를 하고 계시는데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죄송하다”며 사과를 하는 것 자체가 개헌이 왜 필요하는지를 역설하는 것 같아 입맛이 씁쓸하다.
무소불위의 제왕적 대통령제
사실 우리나라 대통령은 ‘대통령제의 모범’으로 일컬어지는 미국의 대통령에 비해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말 그대로 ‘대권(大權)을 행사하는 제왕’에 가깝다.
입법권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미국은 입법권을 의회가 독점한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의 주요업무 중 하나가 정부가 원하는 법안을 만들기 위해 의원들을 접촉하고 설득하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의원입법이 늘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대부분의 중요 법안을 정부가 제출한다.
조약체결권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은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지닌 조약 체결 협상의 대상, 시기, 내용, 범위 등을 구체적으로 명기하여 정부에 한시적으로 수권한다. 미국 정부가 의회의 수권 범위 하에서 협상을 하기 때문에 협상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헌법 제60조에 따라 국회가 조약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질 뿐이다. 정부가 모든 것을 ‘맘대로 협상’하고 국회는 여야를 막론하고 오직 찬반 투표의 권리만 행사할 뿐이다.
나라살림에 가장 중요한 예산편성권을 봐도 그렇다. 미국은 의회가 예산 편성권을 전적으로 행사하고 정부는 대통령실의 GBO를 통해 의회의 예산 편성을 지원하고 도울 수 있을 뿐이다. 반면 우리는 정부가 완전히 독자적으로 예산을 편성하여 국회에 10월 2일까지 제출하면 국회는 12월 2일까지 심의‧확정권만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추석 연휴, 국정감사 등을 고려하면 실질적인 예산 심사에 주어지는 시간이 기껏해야 2, 3주에 불과하기 때문에 예산심사가 졸속에 그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의회의 견제를 받지 않는 막강한 인사권을 행사한다. 주한미국대사 임명 과정에서 보듯 미국은 상원의 인준을 얻어야 하는 직위가 1,200여개가 넘지만 우리는 실질적으로 국회가 의결권을 행사하는 청문회 대상 공직이 30여 개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임면권을 행사하는 자리는 장․차관 및 고위공무원단 1,500여명, 공공기관 기관장과 감사 600여명, 헌법기관 고위직, 대통령 직속 위원회 위원, 검찰․경찰 등 특정직 공무원 4,000여명 등 7천여 개에 달한다. 뿐만 아니라 정권이 바뀔 때마다 법적근거도 없이 금융권 핵심 경영진과 민영화된 회사의 인사에도 정부가 입김을 행사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카리스마가 사라진 시대
우리의 제왕적 대통령제는 건국기에 좌우 이념투쟁을 극복하고 자유민주주의의 기반을 확립할 때나 개발 독재시대에 강력한 리더십을 기반으로 고속성장을 이루는데 긍정적 역할을 했다.
대학진학률이 25% 안팎에 머물고 공공부문에 엘리트가 집중되던 시절에는 제왕적 대통령이 정보기관 등 통치권력을 앞세워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면서 경제성장과 국정운영을 주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민주화의 진전과 사회의 다원화에 따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 언론자유가 확장되고 민간부문의 역량이 대폭 강화되면서 더 이상 대통령의 카리스마가 형성될 수 없는 환경으로 바뀌었다. 카리스마가 없는 대통령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비밀이 있어야 매력도 있는 법인데 더 이상 비밀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제왕적 대통령제가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인권침해 등 독재와 권위주의 통치라는 부정적 유산을 남긴 것도 사실이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
무엇보다 제왕적 대통령제는 우리 정치에서 대립과 투쟁이라는 극단적인 정치문화를 키웠다.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는 대통령을 당선시키면 모든 전리품을 독차지하는 승자독식의 All or Nothing 게임이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실종시켰다.
모든 정치 행위의 궁극적 목적이 권력의 획득이나 연장을 위한 대통령 당선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대통령 당선에 도움이 되면 선(善)이요, 지장이 되면 악(惡)이라는 공식이 형성되었다. 그러다보니 민생현안 해결, 남북관계 개선 등 국가경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정책과제도 대선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우선순위에서 밀리곤 했다.
제왕적 대통령은 사회적 공감과 합의라는 ‘민주적 절차’보다는 속도와 효율이라는 ‘결과 우선’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대통령이 여당을 거수기로, 국회를 통법부로 인식하게 됨에 따라 날치기와 몸싸움의 정치가 판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뿌리내릴 수 없게 만들었다.
차기 권력 질서에 대한 큰틀의 합의가 경제회복 촉진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개헌이 경제를 삼키는 블랙홀”이라며 개헌에 관한 논의 자체를 봉쇄하고 있지만, 차기 권력 질서에 관하여 여야가 큰 방향의 공감과 합의를 이룬다면, 대화와 타협의 분위기가 조성됨으로써 경제회복의 걸림돌 역할을 해왔던 정치가 경제회복을 촉진할 수 있는 입법 현안을 해결하는데 오히려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승자독식의 문화는 필연적으로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를 수반한다. 정권의 끝자락마다 측근과 친인척 비리 때문에 ‘불행한 대통령’이 정형화된 패턴처럼 반복되는 것도 제왕적 대통령제가 갖고 있는 구조적인 원인에 기인한다.
또한 제왕적 대통령제는 플라톤이 말한 ‘철인 통치’의 실현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대통령이 국정을 독선적으로 운영함으로써 언제든지 국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결함을 내포하고 있다.
이같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로 인해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실종된 자리에서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실망이 싹텄고, 이는 기존 정당정치에 대한 총체적 불신으로 이어져 ‘안철수 현상’을 가져왔다. 최근 안철수 개인에 대한 지지 거품이 급격히 빠지고 있지만, 지금도 ‘반기문 대권설’ 등 외연이 바뀌는 형태로 안철수 현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대학생이 중학생 옷 입고 있는 꼴
결론적으로 87년 헌법체제는 성년이 된 대학생이 아직도 중학생 교복을 입고 있는 꼴이기 때문에 이제는 시대적 역할을 다했다고 평가한다. 6월항쟁의 소산인 현행헌법은 대통령 1인 장기독재 예방, 절차적 민주주의 실현, 기본권 보장 강화라는 사명을 다했다.
한국사회는 1987년 이후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겪으면서 외환위기 이후 장기 저성장의 덪에 걸려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작금의 위기를 극복하고 선진 복지국가로 가기 위해서는 대립과 갈등의 정치문화를 청산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민생 문제를 구체적으로 풀어낼 생활정치로의 탈바꿈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대립과 갈등을 증폭시켜온 제왕적 대통령제를 청산하고 분권형 권력구조로의 개편이 시급하다.
최근 국민 여론조사(한길리서치 17~18일, 전국 1천명 대상)를 봐도 개헌에 대해 찬성하는 국민이 57.8%로 반대 29%보다 월등히 높은 것도 이러한 민심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분권형 권력구조로의 개편
개헌에 찬성하는 여야 의원 다수가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분권령 권력구조로의 개편이 정치개혁의 핵심이라고 공감하고 있다. 대통령이 국방 외교 통일 안보 등 외치를 맡고 총리가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내치를 맡는 이원집정부제 등이 대안으로 제기되고 있다.
개헌은 권력구조 개편뿐만 아니라 백년대계인 교육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지 않도록 학제 개편, 공교육투자 확대, 대학개혁 등을 다룰 가칭 ‘범국민미래교육위원회’에 관한 내용이 담겨야 한다.
지방자치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교통 통신의 발달로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된 상황에서 불필요하게 세분화되고 과도하게 중첩된 행정구역 개편에 관한 헌법적 근거도 마련해야 한다.
이밖에도 경제체제, 영토조항, 기본권 등 이념 세대 계층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다양한 주제들이 개헌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한된 시간 내에 가시적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개헌 논의 자체는 계속해가되, 정치적 합의가 이루어지는 수준에 따라 권력구조, 교육, 지방자치 등 공감대가 높은 부분부터 우선 개헌 대상으로 삼고, 나머지 과제들은 뒤로 미루는 순차적 개헌 방식이 효율적이고 순리적일 것이다.
2016년 총선과 함께 국민투표 실시
지금까지 개헌에 대한 논의는 주로 정권의 중후반에 제기되면서 유야무야 되곤 했다. 우리는 여권의 강력한 차기 주자가 가시화되는 순간 개헌논의가 동력을 상실한다는 점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이번 정기국회가 끝나고 내년까지가 현실적으로 개헌 논의의 적기라고 생각한다.
권력구조 개편 등 개헌에 관한 ‘최소한의 합의’를 먼저 이뤄낸 다음 2016년 총선에 국민투표를 함께 실시하는 것이 정치적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총선을 정책선거로 치룰 수 있게 하는 긍정적 효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대한민국 헌법 - 제10장 헌법개정
제128조 ① 헌법개정은 국회재적의원 과반수 또는 대통령의 발의로 제안된다.
② 대통령의 임기연장 또는 중임변경을 위한 헌법개정은 그 헌법개정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효력이 없다.
제129조 제안된 헌법개정안은 대통령이 20일 이상의 기간 이를 공고하여야 한다.
제130조 ① 국회는 헌법개정안이 공고된 날로부터 60일 이내에 의결하여야 하며, 국회의 의결은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② 헌법개정안은 국회가 의결한 후 30일 이내에 국민투표에 붙여 국회의원선거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③ 헌법개정안이 제2항의 찬성을 얻은 때에는 헌법개정은 확정되며, 대통령은 즉시 이를 공포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