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하게 아랫글의 댓글에서 언급한 바를 기반으로 작성해보겠습니다.
현조님은 청사고 조선 열전의 조선을 묘사하는 서두 부분의
오랍(烏拉)[註028]의 패륵(貝勒)[註029]인 포점태(布占泰)가 조선을 침공하였을 때,[註030] 황제와 포점태(布占泰)와는 친척간이어서[註031] 그들의 진군을 중지하도록 늑유(勒諭)하였건만 조선에서는 역시 감사의 뜻을 표하지 않았다. 또한 황제가 붕어(崩御)하였는데도 사신을 파견하여 조문(弔問)하지 않았다.[註032] 한편으로는 명(明)의 총병(總兵)인 모문룡(毛文龍)이 요동(遼東)의 백성 수만을 끌어 모아 피도(皮島)[註033]를 지키면서 조선과 합동으로 자주 군대를 내어 연해(沿海)의 성채(城寨)를 습격하였다.[註034]
이라는 부분의 일부를 발췌하여 오랍의 위치 를 비정하심과 동시에 황하강의 상류지역은 압록강이고 황하가 송하강이라는 주장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바로 조선 열전 그 자체에 의하여 말이 안된다는 것을 입증해볼수 있습니다.
일전에 이런 주장을 하셨지요, 강화도는 한반도라고 말입니다.
[숭덕(崇德) 2년(1637)정월] 계축일(癸丑日)에 이종(李倧)이 화의를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註146] 기미일(己未日)에 재차 화의를 요청하였다.[註147] 경신일(庚申日)에 항복하였다. 이에 칙령을 내려 성에서 나와 친히 알현하도록 하는 한편 맹약을 깨뜨릴 것을 주장한 대신(大臣)들을 결박하여 바치도록 하였다.[註148] 이 날 종(倧)은 주문(奏文)에서 처음으로 칭신(稱臣)하며 자신의 출성(出城)만은 면제해 달라고 빌었다.[註149] 황제가 다이곤(多爾袞)에게 소선(小船)을 바퀴로 끌어 육지에서 바다로 나가게 하였는데, 대포를 쏘아 그들의 큰 함선 30척을 격침시켰다. 소선(小船)은 곧장 바다를 건너 강화성으로 쳐들어 가, 왕비(王妃)· 왕자(王子)· 종친(宗親) 76명과 여러 신하들의 가속(家屬) 166명을 사로잡아 여러개의 별실(別室)에 안치하였다.[註150]
조선 열전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비정하신 바 라면 결코 나올수 없는 부분이지요, 생각해보시면 쉬운 문제입니다,
대체 무슨 수로 중국 대륙을 육지로 가로질러 해전을 벌일수 있겠습니까?
또한 말씀하신바대로라면 청나라는 내륙 국가입니다, 건조 시설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수군 훈련은 어디서 벌이겠습니까?
[강희(康熙)] 45년(A.D.1706; 朝鮮 肅宗 32) 10월, 대학사(大學士)에게 유시(諭示) 하기를, “조선국왕(朝鮮國王)은 우리 조정 을 받들어 섬김에 성심성의를 다해 공경하 며 정중하다. 그 나라에는 8도(道)가 있다고 하는데, 북도(北道)는 와이객(瓦爾喀) 지방 의 토문강(土門江)과 접하여 있고, 동도(東 道)는 왜자국(倭子國)[註278]과 접하여 있 으며, 서도(西道)는 우리나라의 봉황성(鳳 凰城)[註279]과 접하여 있고, 남도(南道)는 바다로 접하여 있으며 몇 개의 작은 섬이 있 다고 한다. 태종(太宗)께서 조선(朝鮮)을 평 정하신 뒤 그 나라에서 주군(駐軍)하였던 곳에 비(碑)를 세워 덕(德)을 지금까지 칭송 하고 있다. 명(明)나라의 말년(末年)에 이르 기까지 그들은 한결같이 잘 섬겨 배반을 하 였던 일이 일찍이 없었으니 실로 예의(禮 義)를 중시하는 나라이므로 더욱 취(取)할 만하다.” 라고 하였다.[註280]
[강희(康熙)] 50년(A.D.1711; 朝鮮 肅宗 37) 5월, 황제(皇帝)가 대학사(大學士)에게 유시하 기를, “장백산(長白山)의 서쪽은 중국(中國)과 조선(朝鮮)이 이미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삼고 있는데 토문강(土門江)[註283]은 장백산 (長白山) 동쪽 변방에서부터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니 토문강(土門江)의 서남쪽은 조선(朝鮮)에 속하고, 동북쪽은 중국(中國)에 속하여 역시 이 강(江)으로 경계를 삼도록 하 였다. 그러나 압록(鴨綠)과 토문(土門) 두 강 (江)사이의 지방(地方)은 그것이 어디에 속하 는지를 확실히 알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註 284]
조선열전에 나오는 조선의 묘사입니다, 말씀하시는 바와 합치하신다고 보십니까? 지리적 비정을 하시는 분께서 왜 이 부분은 청사고로 인정을 안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강희(康熙)] 49년(A.D.1710; 朝鮮 肅宗 36) 5월, 조선상인(朝鮮商人) 고도필(高道弼) 등이 풍랑을 만나 배가 파손되어 해주(海州)에 이르 기까지 표류되었다가 구호되었는데, 강소순무 (江蘇巡撫) 장백행(張伯行)[註281]이 이 사실 을 상주하였다. 이에 고도필(高道弼) 등에게 예부(禮部)에서 문서를 발급하여 역마(驛馬) 를 이용하여 귀국케 하도록 유시(諭示)하였다. [註282]
12월, 산동어민(山東漁民) 양삼(楊三) 등 14명 이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조선(朝鮮)에 들어 왔는데, 조사한 결과 신표(信票)가 없어 내지 (內地)로 회송(回送)되어 왔다. 황제(皇帝)는 이후에 바람으로 표류(漂流)하게 된 선박과 사 람은 조사하여 표문(票文)이 있는 자로써 실정 을 모르고 온 자는 구례(舊例)에 따라 돌려 보 내고, 표문(票文)이 없는 자로 다시 범법(犯法) 한 자는 왕(王)이 조사한 후에 제본(題本)을 갖 추어 예부(禮部)에 자문(咨文)하여 명령(命令) 을 기다려 문서조회가 완결되면 예부(禮部)에 보고하여 안건을 보존하라고 명하였다.[註 308]
역시 조선 열전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비정하신 서하라는 강은 대체 어떤 강이길래 풍랑을 만나 표류를 하나요?
비정하신 서하강은 중국 본토의 황하나 장강의 지류만도 못한게 현실인데, 현대의 통념으로는 해석 못할 문제가 무엇인가요?
이 것으로는 납득을 못하실지 모르니 중국 전도를 가져와 보지요,
민족 구성은 둘째치고 비정하신 서하강이 보이십니까? 이 크기에서도 잘 안보이는 강이 무슨 식량 생산과 물류 유통 등 바다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고지도의 대입 문제는 둘째치고 현실적으로도 전혀 가능성이 떨어지는게 '근세 조선까지의 한민족 중국 대륙 거주설'입니다.
[동치(同治) 4년(1865)]7월 초하룻날 유시(鍮示)하기를, “조선(朝鮮)이 2백여 년간 우리 대청(大淸)의 번병(藩屛)으로 해마다 직공(職貢)을 다하여 왔음은 중외(中外)가 다 알고 있는 바이다. 최근 10년동안 그 나라에 내란(內亂)이 자주 일어나니, 조정(朝廷)에서는 연약한 나라를 보호하고 사랑한다는 생각으로 여러 차례 군대를 파견하여 [내란(內亂)을] 평정하였다.
또한 관원(官員)을 파견하여 그 나라의 도성(都城)에 주재케 하여 그때 그때마다 형편에 맞추어 보호하도록 하였다. 금년 4월경 조선(朝鮮)에서 또다시 토비(土匪)의 반란이 일어나니, [조선(朝鮮)]국왕(國王)이 군사를 보내 평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말이 너무나 절박하기에 이홍장(李鴻章)에게 즉시 유령(諭令)하여 군대를 보내 원조해 주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의 군대가] 아산(牙山)에 도착하자 비도(匪徒)들은 벌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일본(日本)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군대를 증가시켜 갑자기 한성(漢城)으로 난입하였으며, 이후에도 계속 병사(兵士)를 1만여 명으로 늘려 조선(朝鮮)으로 하여금 국정(國政)을 개혁(改革)하도록 압박하였다. 우리나라는 번복(藩服)을 무수(撫綏)하면서 그 나라의 내정(內政)은 그들 스스로 처리하도록 하였다. 일본이 조선(朝鮮)과 더불어 조약(條約)을 체결하여 그 나라와 더불어 관계를 맺고 있긴 하지만, 다시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강제로 [그 나라로] 하여금 정치(政治)를 개혁케 할 이유가 없다.
각국의 공론(公論)도 모두 일본(日本)의 군사동원은 명분도 없고 실정(實情)에도 맞지 않다고 하면서 철병(撤兵)하도록 권하며 평화적(平和的)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日本)은] 끝까지 완강하게 이 말을 듣지 않았으며 화의를 성립시킬 생각도 없었다. 오히려 군대를 끊임없이 증가시키니 조선(朝鮮)백성 및 중국 상민(中國 商民)들이 갈수록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이에 [조정(朝廷)에서는] 군대를 증가시켜 파견하여 보호토록 하였다. [군대가] 얼마 가지 못하고 중도에서 갑자기 많은 적선(敵船)이 나타나 우리의 무방비 상태를 틈타 아산만(牙山灣) 밖의 바다에서 포격을 해왔다.
그리하여 우리의 수송선이 손상을 입었으니, 이는 불의의 공격에 의해서 당한 것이다. 일본(日本)이 조약(條約)을 지키지도 않고 공법(公法)도 준수하지 아니하여 그들 스스로 분쟁을 일으켰음은 공론(公論)에서도 명백하다. 이제 특별히 천하(天下)에 이를 포고(布告)하는 것은 조정(朝廷)이 명백히 이 일을 처리함에 진실로 인(仁)을 다하고 의(義)를 다하였지만 형세는 다시 잠시라도 용납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이홍장(李鴻章)에게 각군(各軍)을 파견하여 신속히 나아가 적을 무찌르고, 씩씩한 군사를 널리 모집하여 계속 진격시킴으로써 도탄에 빠진 한민(韓民)을 구하도록 엄중히 명령하였다.” 라고 하였다.[註652] 대체로 중국(中國)은 이 때에 이르러 비로소 선전포고(宣戰布告)한 것이다.[註653]
일본의 위치는 아실겁니다,
그럼 대체 어디서 무슨수로 일본의 군선이 조선 서해에 위치한 아산까지 출몰해서 기습할수 있었습니까?,
분명 비정하신 서해는 강일터, 기습의 묘리를 살리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사실이고, 조선과 중국의 영토를 접하며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이게 비밀리에 될 일이라고 보십니까?
서하강은 근대의 군선이 활동할 깊이나 넒이도 아닐뿐더러 아산이 위치할 지역도 없고 만이라는 칭호가 붙을 지형도 아닙니다.
당장 양자강이나 황하강도 거슬러 올라가는게 무리인 상황에서 가능할 문제는 아니지요,
결론적으로 청사고 조선 열전을 인용하시어서 주장의 논거로 삼으셨으나 정작 그 조선 열전은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댓글로 언급하신 모순이나 오류를 남에게 돌릴 문제도 아닐뿐더러 현대의 통념과 고정관념을 비판할 문제도 아닙니다.
현조님의 주장이 잘못된것 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