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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게시물ID : history_1092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강화골드헐
추천 : 1
조회수 : 317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8/06 18:15:17


알렉산드로비치 니콜라이 II (Aleksandrovich Nikolai II)
출생-사망 연도: 1868.5.18 ~ 1918.7.16/17
재위 기간: 1894~1917


1.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가 즉위하다

 니콜라이 2세의 아버지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Aleksandr III) 입니다. 알렉산드르 3세는 러시아 차르들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인물 중의 한명으로, 러시아에 자본주의를 널리 퍼뜨리는데 공헌을 했지만 상류층에 특권을 부여하는 정책과는 반대로 농민, 노동자들과
같은 일반 러시아 국민들에게는 가혹한 억압 정책을 폈습니다. 또한 철저한 황제 국가를 유지하려고 했죠. 때문에 러시아 제국 자체는
점점 커가고 있었지만, 민중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혁명의 기운이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1894년 10월, 알렉산드르 3세가 죽고 그의 아들 니콜라이 2세가 황제가 됐습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도 극우 보수주의자로서 자신이
제정 러시아 차르 체제의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때문에 민주주의로 가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며 아버지의 가혹한 정책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무능하고 소심했습니다. 그는 혁명의 기운으로 위기에 처해있는 대제국을 이끌어갈만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일화 중에 하나로, 1896년 5월 대관식이 끝나고 모스크바 근교에서 축하 행사가 열렸는데 50만에 가까운 백성들이 선물 배급을 받고자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통제의 부재로 사람들이 뒤엉켜 대혼란이 벌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1,300여 명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하지만
그날 저녁에 황제와 황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프랑스 대사관에서 열린 무도회에 참석했습니다.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황실은 사회와 유리된 채 극심한 사치 속에 세월을 보냈습니다. 황제 부부는 흔히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에 비유되곤 합니다.


2. 혁명의 전조

 니콜라이 2세는 아버지와 같은 시대착오적인 반동정치를 계속 펼쳤습니다. 언론과 사상을 엄격히 통제하고 교육에 많은 제한을 뒀습니다.
지방 정부의 권한을 줄이고 황제의 권력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종교 박해도 심해져 러시아의 많은 교회와 종파들에게 많은 제약이
가해졌습니다. 유태인의 지위도 악화되어 우크라이나에서 대규모 유태인 약탈과 학살을 방조하기도 했습니다. 그외 여러 민족들을 권리를
제약하고 탄압하기도 했죠.
 경제적으로 강력한 산업화 정책으로 많은 성과를 낳긴 했지만 불균형한 경제 발전으로 인해 농민과 노동자들 같은 민중들의 삶은 더 
피폐해져 갔습니다. 덩치만 큰 모래성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차르 정부의 억압을 피해 지하활동을 계속해온 혁명가들이 차근차근 혁명 준비를 했습니다. 혁명가들 중에는 그 유명한 레닌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의 대규모 선전 활동 덕에 러시아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파업 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을 달래고자 차르 정부는
노동자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기도 했지만 혁명을 막기에는 너무 늦은 상태였습니다.


3. 무너지는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2세가 즉위한지 10년 후, 혁명의 위기를 안은 채 러시아는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러-일 전쟁이죠.
러시아의 극동 팽창 정책이 결국 동아시아의 신흥 강대국인 일본과의 충돌을 만들어냈습니다. 차르는 러시아가 손쉽게 이길 수 있다는
환상을 품고 전쟁을 통해 전제 권력의 위엄을 높여 혁명이 누그러지길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군대는 강했고 러시아의 군대는 장난감 병정이라는게 드러납니다. 러시아의 정예 부대마저 일본에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차르는 국민들의 참여를 호소했지만 먹혀들지 않았고 오히려 전쟁에 대한 불만이 더욱 커졌습니다. 더욱이 1905년 1월 9일에 발생한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인해 민심은 완전히 차르를 떠났습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은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들의
시위를 차르 정부가 잔혹하게 진압하면서 하루동안 1,000여 명이 죽고 3,000여 명이 부상당한 사건입니다. 결국 러시아는 패배하고 일본과
강화를 맺었습니다.
 전쟁에서 진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을뿐 진짜 문제는 러시아 민중들이 차르의 실체를 알고 그 분노가 러시아 전역으로 확산됐다는 것입니다.


4. 혁명의 확산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시위가 발발했고 심지어는 몇몇 군대마저 황제를 떠나 혁명에 가담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니콜라이 2세는 이러한
혁명에 대처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계속해서 잔혹하게 진압만 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차르 정부가 입헌군주제를 약속하기는 했지만, 빈껍데기와 같은 입헌군주제일 뿐 여전히 황제의 권한은 막강했습니다. 의회는 그저
차르의 꼭두각시일 뿐이었죠. 의회마저도 나중엔 차르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잔혹한 탄압과 보여주기식 입헌군주제 도입으로 혁명의 기운은 점차 사그라들었습니다. 하지만 민중의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계속 나빠지기만 했으므로, 언제 또 혁명이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계속됐습니다.


5. 제정 러시아의 붕괴와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

 혁명 운동이 침체되어 있는 가운데, 니콜라이 2세는 또다시 러시아를 1차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밀어넣습니다.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었지만 러시아는 전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물자부족으로 인해 러시아는 독일에 계속 밀리다가
전선이 교착화 됩니다. 차르는 또 국민들에게 전쟁 참여를 호소했지만 전혀 먹혀들지 않았고 민중들의 불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전쟁으로 러시아 경제는 파탄나고 민중들이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지만 무능한 차르는 이를 무시하기만 했습니다.
 어느 왕조나 그렇듯 무능한 왕 주변에는 어리석은 신하와 간신들 밖에 없습니다. 나약한 니콜라이 2세는 황실을 지배하지도 못했습니다.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사람은 황후와 그녀의 비호를 받고 있는 요승 라스푸틴이었습니다. 황제인 니콜라이 2세는 오히려 이들에게 의지했고
수도를 비우고 전선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황실을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사회의 불만과 철저히 유리된 채 생활하는 황실은 결국
라스푸틴이 암살당하고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퇴위당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퇴위 당한 뒤에도 니콜라이 2세는 가족들과 함께 별궁에서 지내면서 혁명을 외면했습니다. 결국 1년 뒤인 1917년 11월 혁명 후
시베리아의 감옥으로 이송되던 도중 마지막 황제는 온 가족과 함께 살해당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그들과 함께 러시아 제국은 운명을 다하고
로마노프 왕조도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황제와 민중들의 피를 바탕으로 러시아는 새로운 길을 가게 되죠.


 니콜라이 2세가 집권해서 나라를 망치고 자신들을 탄압함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민중들은 차르는 언제나 진실하다고 믿었습니다. 차르는
이러한 민중들의 기대와 희망을 스스로 짓밟았습니다. 결국 그 댓가를 잔인하게 받게되죠. 통치자가 무능하고 사회와 격리된 채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게 되면 거대한 제국도 한순간에 무너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 통치자는 심판을 받게된다는 것도 말이죠.
 최근 러시아에서 니콜라이 2세의 추모식이 열리고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추대했다는데...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니콜라이의 행적을 봤을 때 추모 받거나 성인으로 추대 받을 사람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러시아도 아이러니한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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