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사람이 지구의 주인인양 행세하지만, 개미는 인간이 나타나기 무려 1억년 전부터 이 땅에 거주해왔다고 한다. 머릿수에서도 게임이 되지 않는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하나의 그릇에 담는다면 그 총량의 1/10 가량을 개미가 차지한다고 할 정도다. 다른 수많은 종들이 천적에 의해, 환경변화에 의해 멸종되어 갔을 때도 그들은 끊임 없이 진보를 거듭해왔다. 개미들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여러 학자들은 그들의 번영을 다양성에서 찾고 있다. 개체의 다양성, 능력의 다양성, 형태의 다양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고방식의 다양성이다. 천적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혁신적인 무기들에서 그들의 특출난 창의성을 엿볼 수 있다. 최근 마블을 보면 개미굴을 연상시킨다. 수많은 히어로들이 개미떼 처럼 쏟아져 나와 다양성을 뽐내고 있다. 하지만 왠지 그들은 가면과 코스춤만 바꿔 쓰고 나오는 비슷비슷한 동어반복 같은 느낌을 준다.
앤트맨은 진짜 개미들처럼 독창적이다. 이 영화는 헐크나 토르버스터 처럼 '점점 더 크게'를 추구하지 않는다. 거꾸로 크기를 줄임으로써 아무것도 아닌 카펫이 숲이 되고 욕조가 바다가 되는 기적을 보여준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공간들을 몸크기를 줄인다는 역발상을 통해 외계의 어느 혹성처럼 기묘하고 모험이 넘치는 곳으로 바꿔버린다.
행크 핌이 개발한 이 개미 수트는 '더 작고 더 단단하게' 라는 인류의 오랜 꿈이 만들어낸 도구다. 그는 육신을 원자단위까지 줄이려는 시도를 통해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나서야 그것이 매우 위험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과학만능주의적 사고방식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라는 2가지 키워드로 이 영화를 바라보면 위험을 무릅쓰고 원자수준의 세계로 들어가는 앤트맨과 딸을 구하기 위해 블랙홀 속으로 들어가야 했던 인터스텔라의 쿠퍼가 묘하게 겹쳐보인다.
하지만 앤트맨은 고뇌에 찬 군수업체 대표도 아니고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군인도 아니다. 전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 같은 거창한 사명을 걸고 싸우는 것도 아니다. 그는 단지 한명의 좀도둑이란 것을 잊지 않는다. 앤트맨은 마블 히어로들의 무거움과 비장함을 직접 디스(?)하며 기존 히어로 무비들에 지친 관객들에게 경쾌함을 어필한다.
늘었다 줄었다 화면에 리듬감을 부여하는 액션, 랩하듯 뱉아내는 루이스(마이클 페나)의 덜떨어진 개그, 흥겨운 라틴풍 음악 같은 소소한 재미에 중점을 두고 본다면 앤트맨은 팝콘무비로서 즐기기에 손색이 없는 영화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앞으로 앤트맨 같은 영웅들이 자주 나왔으면 좋겠다. 다양성은 그 자체만으로 훌륭한 무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