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에는 다윗과 골리앗과 같은 극적인 전투가 몇 개 있습니다.
예를들면 조조와 원소의 패권다툼인 ‘관도대전(官渡大戰)’ 주유+유비군과 조조와 다툼인 ‘적벽대전(赤壁大戰)’ 또는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남북조시대의 ‘비수대전(淝水大戰)’을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은 색다른 전투인 곤양대전(昆陽大戰)을 소개 해보려고 합니다.
왕망(王莽)과 신(新)나라
한나라 전체 역사를 보면 흔히 전한시대-신(新)나라-후한시대로 나뉘어 집니다. 저는 이때 신이라는 나라를 살펴볼게요.
전한시대 황제였던 평제가 죽습니다. 16살먹은 황제가 죽은 후 2살 먹은 유자영1)이 황위에 오르고 왕망(王莽)이라는 신하가 섭정하면서 쪼물딱 쪼물딱 하면서 결국 왕망이 황위에 오릅니다. 왕망이 황위에 오른뒤 유토피아를 꿈꾼 나머지 주(周)나라 시대치세를 갈망하면서 복고적인 정책을 내세우게 됩니다.
예를 들면 전국의 토지를 황실 소유로 귀속시키고 사사로이 매매를 금지했고 관직 제도는 주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오등작을 실시했으며 화폐 제도를 개혁하여 장안, 낙양, 한단, 임치, 완, 성도 등의 전국 6대 도시에 오균사시와 전부관을 설치하여 상공업을 통제하게 했으며 이 오균육관에서는 외상을 주는 것과 돈을 빌려주는 것을 시행하고 물가를 관리하게 했으며 술, 소금, 쇠붙이 등의 세금을 매기게 했습니다. 이건 오히려 물가가 폭등하고 제도가 복잡하여 기존 제도보다 훨씬 못하고 사회 혼란스러워 졌습니다.
장사왕의 후손
전한시대 경제(景帝)의 아들은 한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무제(武帝)였지만 후궁으로 얻은 아들중 ‘유발’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유발은 장사왕에 임명된 뒤 후손을 이었는데 그 후손중 ‘유수(劉秀)’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왕망의 폭정때문에 자신의 형 유연과 한나라 종친인 유현과 함께 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막장막장
왕망은 유능했지만 실효성 없는 정책으로 중국 모든 곳에서 반란이 일어납니다. 산동(山東)지방을 근거지해서 눈썹에 빨간칠한 적미군(赤眉軍), 호북 녹림산을 근거지로한 녹림병(綠林兵), 황하지역의 동마(銅馬),청독,대동,우래 등등 많은 반란이 생겨납니다. 이때 유수군은 녹림병과 함께하게 됩니다.
황제vs황제
유수와 유연은 유현을 황제로 옹립하게 됩니다. 그것을 본 왕망은 자신의 동생인 왕읍에게 42만명의 병사를 줘서 유수군을 치게 하는데 곤양에서 만나게 됩니다.
8천:42만
유수군은 처음에 곤양을 기점으로 낙양을 먹고 장안에 입성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왕읍의 42만의 군대가 곤양으로 쳐들어오게 됩니다. 곤양성이 있던 병력은 총8000명2) 곤양성은 더 이상 버틸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유수는 10기 남짓한 병사를 데리고 구원 요청하러 갑니다.
“이건 미친짓이야!” “This is Gonyang!!”
왕읍의 군대는 곤양성을 포위하고 있었지만 문제가 생깁니다. 휘하 장수들은 1만명도 되지 않는 곤양성을 버리고 본진으로 가는 주장도 있었고 곤양성을 공성하자는 주장이 서로 대립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점점 곤양성 공략이 망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구원요청하러간 유수가 약 3천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나옵니다. 왕읍의 군대는 42만명이라고하지만 지휘계통과 질서가 워낙 엉망이였고 유수의 3천명의 결사대의 적절한 격파와 타격으로 작살나고 곤양성의 병사들도 나와서 공격함으로 42만명의 군대가 대패를 하고 맙니다.
그 후와 결말
42만명이 폭망한 왕망은 술과 전복으로 지내다가 낭관 즉 잘우는 사람을 뽑아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도록 합니다.
결국 하늘이 제사를 보고 감명을 받았는지 유수군은 장안으로가서 왕망을 살해합니다. 하지만 어중이황제였던 유현은 불안을 느끼고 유수의 형인 유연을 사형합니다. 그리고 유수를 동쪽을 정벌하게 시킵니다. 유수는 동쪽군벌인 왕랑(王郞)을 격파합니다 하지만 유현은 굶주린 적미군에게 장안이 작살이 나고 유수가 적미군을 작살냅니다.
그리고 유수는 후한을 열었던 광무제(光武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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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통일 진나라시대 부소의 아들이었던 자영이 아님
2)8천~9천을 잡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