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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꽁냥대는 걸로 시간을 보냈다.
점장 누나, 나와 친했던 손님들은 하나 같이 보기 좋다며 너털 웃음을 터뜨리며 축하해줬고, 편의점에 처음 온 손님들은 우리의 꽁냥질에 '저것들은 뭐하는 족속인가'라는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나 위기는 꽤나 일찍 찾아오고 말았다.
사귀게 된 지 약 한 달이 지난 어느 평일 오후였다.
전 날의 과음으로 인해 늦잠을 자게 된 나는 해장을 위해 집 앞 편의점에 가서 숙취 해소 음료를 구입해 집으로 돌아왔다(일하는 편의점 아님).
음료를 원 샷 하고서 변기통을 부여잡고 수 분간 씨름을 한 후 거울을 봤는데, 내 꼴은 14박 15일 전술 훈련을 마치고 방금 복귀한 군인보다 더 추하면 추했지 덜하진 않았다.
거울 속 내 모습에 충격을 받은 나는 곧장 샤워를 하고 개운한 마음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는데, 부재 중 전화가 무려 7통이나 와있었다.
전화를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진짜 점장님'이었다. (1편 참고)
근무하는 요일도 아닌데 왜 전화를 했을까, 혹시 내가 근무하면서 실수한 게 있나? 등등 생각의 생각이 꼬리를 물고 해지면 소주병 나발을 불...기는 개뿔 전화를 한 이유를 생각하다가 문득 그동안의 꽁냥질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X됐다.....
그렇다. 아무래도 나는 X됐다. 그것이 내가 심사숙고하여 내린 결론이다. 나는 X됐다. (어떤 책의 도입부가 생각난다면, 네, 그 책 맞습니다.)
그래도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 전화를 했는데, 점장님은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고, 왜 슬픈 예감을 틀린 적이 없나 마음 속으로 울부짖었다.
-부재 중 전화 때문에 전화 드렸어요. 무슨 일 있나요?
'지금 바쁘니?'
-아뇨. 괜찮아요.
'그래, 그럼 일하는 편의점으로 좀 와줄래?'
-네, 알겠습니다.
항상 내게 웃으며 살갑게 얘기를 꺼내던 점장님의 목소리는 그 이상 차갑게 느껴질 수 없을 정도로 냉랭했다.
때문에 확신할 수 있었다.
들켰구나.
사실 생각해보면 안 들킬 수가 없었다.
매일매일 최소 6시간 이상을 편의점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점장님이 야간 근무 교대를 하러 올 때마다 편의점에는 근무 시간도 아닌 내가 카운터에서 점장 누나와 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키지 않았던 건 점장 누나가 괜찮은 변명 거리로 속여왔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걸린 걸까?
형장에 끌려가는 죄수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근무하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 공기는 싸늘했다.
카운터에서 점장 누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는데, 충혈된 눈으로 보아 운 듯했다.
점장님은 창고로 날 불렀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ㅇㅇ이랑 사귀니?'
-........
'말해.'
-네.
'얼마나 됐니?'
-한 달 조금 넘었어요.
'니가 일한지가 이제 한 달이 넘어가는데, 바로 사귀었다는 거야?'
-....네 그렇게 됐어요.
'허... 하하....'
점장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몇 분이 내겐 몇 시간처럼 느껴졌고, 주변 공기는 배로 무거워진 것처럼 어깨를 짓눌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점장님이 숨막히던 침묵을 깼다.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
-네....
'단골 손님들이 그러더라. 딸이 주말 알바랑 연애하는 거 같다고. 맨날 같이 있고, 무표정이던 애가 언제부터 계속 웃는다고 하면서.'
-아....
'그래서 생전 안 돌려보던 CCTV 돌려봤다. 사실이더라고.
-.......
'근데, 헤어지라고 해도 어차피 니들 안 헤어질 거잖아.'
-......네, 저는 헤어지기 싫어요 솔직히요.
'ㅇㅇ이도 싫다고 하더라.'
-.......
'만약에 내가 너를 자르면, 어떡할 거야?'
-그래도 만나겠죠.
'그래, 그럴 줄 알았지. 어째 너네 둘 대답이 똑같냐...'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고.'
-......?
'니들 마음대로 해.'
-.....네?
'대신, 제발 편의점 안에서 스킨십은 자제해라. 컴플레인 들어가면 골치 아프니까. 지금처럼 편의점 계속 오는 건 안 말릴게. 대신, 스킨십은 적어도 편의점에서 만큼은 하지 마. 알겠어?'
-네, 알겠습니다!
점장님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쿨하게 편의점을 벗어났지만 난 한동안 창고 안에서 정지된 사고 회로를 수습하느라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허락(?)을 받은 거네? 뭐야,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사귀는 건데 한 달 만에 여자친구 어머니를 만나서 허락을 받아? 뭐 이리 스펙타클한 연애가 다 있지?
궁금함을 참지 못한 점장 누나가 창고 안으로 들어와 간절한 눈빛으로 뭐라고 했는지 캐물었는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 양 볼을 감싸고 그대로 키스했다. 그 어떤 말보다 확실한 답일 테니까.
점장님과의 약속이 5분도 안 되서 깨지는 순간이었다(나중에 이걸로 또 혼나긴 했다).
-대답이 됐어요?
응. 잘 된 거네. 그치?
-네, 다 잘 됐어요.
고생했어...
-울지 마요. 눈 부었잖아요.
누나는 한동안 눈물을 멈추지 않았고, 난 그런 누나를 토닥이며 한참을 달래줘야 했다.
그렇게 한동안 우리는 서로를 껴앉고 놓지 않았다. (귀신 같이 그 시간 동안 손님이 안 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