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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일제시대의 악명높았던 "초등학교 입학시험"
게시물ID : history_1086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시나링고
추천 : 11
조회수 : 106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8/02 18:19:43


1)“개 다리가 몇 개냐?”


“우리 집에는 올봄 만 7세가 된 아이가 있습니다. 만 6세면 보통학교에 입학할 적령기라, 작년(1933년) 수송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시키려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 작년에 그만 낙제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어린 것이 낙제했다고 낙심하며 몹시 부끄러워했습니다. 부모 된 입장에서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원래 우리 애는 7살이라도 다소 어린 맛이 있고, 신체발육이 늦은데다가 체질이 허약합니다. 집의 할머님께서 늘 귀여워하셔서 그만 응석받이가 되었습니다. 머리도 그다지 총명한 편은 못됩니다. 그래서인지 작년 입학시험에 불합격되었습니다. 초등과정의 보통학교를 입학하는 데도 시험을 보게 한다는 것부터 우스운 일이지만, 그 시험에 떨어진 다음, 6살짜리 코흘리개가 언짢아하는 것도 부모 된 마음에 적잖이 서운한 일이었습니다.” (신경환, ‘입학준비의 고심담’, ‘중앙’ 1934년 4월호)



일곱 살배기 보통학교 재수생을 둔 학부형 신경환은 이태 동안의 마음고생을 생각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태어나서 한 번도 수업을 받아보지 않은 철부지 어린애한테 입학시험을 치르게 하는 교육 당국의 처사가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아이가 합격하기만 바란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정보도 수집하고 시험공부도 시켰다. 주위 사람에게 초등학교 입학시험에 무슨 문제가 나오나 알아보았더니, ‘국문’(일본어)으로 이름을 써보라거나 ‘아이우에오(あいうえお)’를 써보라는 문제가 나온다 했다.

신경환은 아이의 형과 누이를 동원해서 부지런히 가르치고 닦달해서 ‘국문’과 ‘조선어’를 깨치게 했다.

두 명 중 한 명은 떨어지는 시험이라 마음이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 준비했으면 아이가 너끈히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시험을 치르고 집에 온 아이는 시험에 아빠가 가르쳐 준 것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며 울먹였다.

간단한 ‘국문’과 ‘조선어’ 읽기 능력을 평가하던 예년과 달리, 그해 입학시험에는 취학아동의 상식과 인성을 묻는 문제가 출제된 것이었다.


“개 다리가 몇 개냐?”

“자동차가 어떻게 다니느냐?”

“밤 다섯 개가 있는데 세 개를 먹었다. 그러면 몇 개가 남니?”

(여러 가지 색의 색지를 내놓고) “어느 것이 붉은색이냐?” “어느 것이 노랑이냐?”

“다른 사람이 네 발등을 밟아 피가 나면 어떻게 할 테냐?”


입학희망자가 입학정원을 초과한 1920년부터 광복 직전까지, 조선에서는 보통학교(초등학교)에 들어가려 해도 입시전략이 필요했다.

세계유일 전대미문의 ‘초등학교 입학시험’은 조선의 명물이었다.


2) 초등학교 입학시험?


“보통학교 취학아동에게 입학시험을 보게 했다고요? 글쎄 나는 금시초문이올시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아마도 입학지원자는 많고 학교 교실은 좁으니까 임시변통으로 그렇게 한 것이지, 무슨 특별한 규정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닐 것이오.”


1920년 4월, 사이토 레이조(齊藤禮三) 경성부윤(京城府尹·서울시장)

초등학교 취학아동에게 입학시험을 치르게 한 이유를 따지는 기자에게 몹시 당혹해하며 해명했다.

경성 부민 모두가 다 아는 일을 부정(府政)을 책임진 부윤이 모른다고 발뺌했다.

기자가 날을 세워 되물었다.


“입학지원자 중 반수 이상이 입학허가를 받지 못했소.

장차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오? 방침은 세워두었소, 아니 세웠소?”


사이토 부윤이 난처한 듯 연신 머리를 어루만지며 얼버무렸다.


“글쎄 무슨 일이고 돈이 문제가 아니오. 지금 경성부내에는 13개소나 되는 보통학교가 있소. 모두 지은 지 10년 이상 되어서 시설이 몹시 낡고 협소하오. 이것만 개축하려 해도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오. 부(府)의 예산으로는 어림도 없고, 도청의 지방비로도 감당할 수가 없소. 국고 보조를 받을 수도 없는 형편이니, 아무래도 어느 곳에서든지 빚을 내어오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우선 빚을 내어 쓴다면 납세자인 부민이 분발하여 갚아야만 할 것이오. 취학아동에게 시험을 보게 한 것도 교실이 부족하여 별 수 없이 그리된 것이오. 부족한 교실을 늘리려면 아무래도 여러분이 분발하여 당국자와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보통학교 입학시험 문제’, ‘동아일보’ 1920년 4월11일)


수용할 교실이 없어 수천명의 아동이 학교에 못 가는 한심한 일이 벌어졌는데, 부윤은 한가하게 예산타령이었다.

세금 안 낸 부민 탓이지 자기 책임이 아니라며 오리발까지 내밀었다.


“당국이 성의만 보이면 조선 사람도 자기네 자식을 가르치는 일인데 외면하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현재 있는 학교의 개축도 이와 같이 막막하면, 앞으로 몇 배 이상이 늘 입학 아동을 장차 어떻게 수용할 터이오. 추가로 보통학교를 신축할 계획은 있소?”


정곡을 찌르는 기자의 질문에 사이토 부윤은 침묵을 지키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솔직히 아직은 보통학교를 더 설치할 능력이 없소.”


사이토 부윤에게는 호화판으로 관공서 짓고, 헌병과 고등계 형사 월급 줄 돈은 있어도 학교 짓는 데 쓸 돈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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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입시지옥의 탄생


19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각급 학교는 수업료를 면제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교과서와 학용품까지 무상으로 제공하면서 학생 유치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191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경향 각지의 학교에 입학지원자가 쇄도해 지원자를 모두 수

용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 구실을 하려면 모름지기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인식이 국민적 공감대를 얻은 까닭이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밥을 굶을지언정 어떻게든 자식 공부는 시키려 했다.


세계 유일, 전대미문의 초등학교 입학시험은 정원을 초과한 인원을 탈락시키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도입된 제도였다.

1910년대 후반 교육 환경이 열악한 지방에서 시작된 초등학교 입학시험은 1920년부터는 교육도시를 자부하던 서울에서도 실시됐다.

대학이나 중등학교에서 입학시험을 치르는 나라는 간혹 있었지만, 초등학교에서 입학시험을 치른 곳은 조선이 유일했다.

다른 나라의 입학시험이 우수 학생을 선발하는 데 목적이 있었음에 반해 조선의 입학시험은 오로지 정원을 초과한 지원자를 걸러내는 데 목적이 있었다.


입학난을 완화시키려는 교육 당국의 노력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여건이 되는대로 학교를 지은 결과,

1919년 517개소에 불과하던 보통학교는 1935년 2358개소로 늘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 4~5년마다 두 배씩 늘어나는 입학지원자를 모두 수용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연도와 학교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초등학교 입시 경쟁률은 대체로 2대 1 이상이었다. 심한 경우 6대 1을 넘는 학교도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난이 해가 갈수록 심해지자 “서울 시내에서 보통학교 들어가기가 다른 나라 대학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1936년 보통학교 입학시험은 전쟁을 방불케 했다.

그해 서울 시내 25개 공립보통학교 입학 정원이 4800명이었는데, 1만21명의 아동이 지원했다.

평균경쟁률은 2대 1이었지만, 지원자가 많이 몰린 학교는 3대 1을 넘었다.

‘멘탈 테스트(mental test)’라는 이름의 입학시험은 치졸하기 그지없었다.

아주 어려운 문제를 출제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나이가 너무 많다든지,

너무 적다든지 하는 갖은 이유를 갖다 붙여 정원을 초과한 인원을 탈락시켰다.


다행히 공립학교 입학에 실패한 5221명의 아동에게는 사립학교에 지원할 기회가 한 번 더 남아 있었다.

하지만 사립학교의 수용인원도 수요에는 턱없이 못 미치는 10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공립학교, 사립학교까지 연이어 낙제한 4000여 명은 험난한 재수의 길로 내몰렸다.

그러나 다음해에도 입시경쟁이 치열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무작정 1년을 기다린다고 입학이 허가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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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입학 기회는 재수, 삼수, 사수 식으로 무한정 주어지지 않았다.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10세 이상 아동에게는 ‘학령(學齡) 초과’를 이유로 시험 치를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입학시험에 두세 번만 떨어지면, 영원히 배울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만화가 최영수는 몇 분 동안의 ‘멘탈 테스트’로 아동의 장래를 결정하는 터무니없는 제도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명태 알 테스트’인지 ‘멘탈 테스트’인지 천진난만한 유아를 앞에다 놓고 사십 넘은 선생들이 마주 앉아 질문하는 게 20세기 문명한 시대에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아동심리에 대해 얼마나 연구를 철저히 했다고 그 몇 분 동안에 묻는 말로 구만리 같은 인생의 앞날을 내다본단 말인가. 보통학교에 입학 못한 아이들은 모두 저능아란 말인가. (최영수, ‘학교는 눈물인가? 한숨일런가?’, ‘신동아’ 1936년 6월호)


당국자들이 한가하게 예산 타령을 하는 사이, 수많은 철부지 아이의 가슴에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새겨지고 있었다.


4) 코흘리개들의 ‘눈물시위’

1922년 해주공립보통학교의 입학정원은 180여 명이었는데, 입학지원자는 600여 명에 달했다.

3명 중 2명을 탈락시키겠다는 단 하나의 목적에서 학교 당국은 예년과 같이 입학시험을 실시했다.

합격자 발표일인 3월25일, 학부형들은 7~8세 코흘리개 ‘수험생’의 손을 잡고 운동장에 모여들었다.

발표 몇 시간 전부터 게시판 앞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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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자 명단이 적힌 방이 붙자 희비가 엇갈렸다.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돌아가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지만, 태반은 얼굴을 붉히며 분노를 터뜨렸다.

어느 집 아이가 합격했고 어느 집 아이가 떨어졌는지 부형의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낙제한 아이를 둔 부형들은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운동장에 그대로 남아 삼삼오오 모여 대책을 강구했다. 잠시 후 학교 교무실에 성난 부형들이 들이닥쳤다.

부형들은 교장을 불러놓고 선발기준을 따져 물었다.

교장은 아동의 처지는 딱하나 시설이 부족하여 더 수용할 여력이 없다며 땅에 코를 박고 사죄했다.


성난 부형들은 교문 밖을 나와서도 헤어지지 않고 청년회관에 모여 난상토의를 벌였다. 장시간에 걸친 숙의 끝에 만장일치로 진정서를 채택하고 군청에 제출했다.
“400여 명의 불합격 아동에 대한 대책이 무엇인가.”
“금년에 입학하지 못하면 학령 초과로 내년에 입학이 불가능한 아동은 전부 입학시키라.”
“금번 신입생의 선발 방법과 채점 결과를 공개하라.”
(‘낙선 부형의 진정’, ‘동아일보’ 1922년 3월31일자)


하지만 낙제 아동을 둔 부형의 애끊는 요구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입학시험을 둘러싼 진통은 해주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같은 해 3월29일, 광주공립보통학교에서는 예닐곱 살 먹은 아동 400여 명이 운동장을 점거하고 하염없이 우는 ‘눈물시위’를 벌였다.


지난달 29일 하오 1시경 광주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는 나이 예닐곱 살가량 된 어린아이 400여 명의 울음소리가 낭자하여 일장의 비극이 일어났다. 이번 학기에 그 학교에 입학하려고 지원서를 제출했다가 학교의 수용력 부족으로 입학 허가를 얻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는 아이들의 울음소리였다. (‘교정의 곡성’, ‘동아일보’ 1922년 4월2일자)


1924년 인천공립보통학교 입학시험은 3월26일부터 28일까지 사흘에 걸쳐 실시됐다.

가슴에 큼지막한 수험표를 붙인 6~7세 수험생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면서 차례가 오기를 초조히 기다렸다.

코흘리개 수험생들은 교사 앞에 한 명씩 불려나가 차례로 구술고사를 치렀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학교 수업을 들어보지 않은 아이에게 교사는 초등학교 3~4학년생도 답하기 곤란한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부모가 선행학습을 시킨 아동은 그럭저럭 대답했지만, 그렇지 않은 아동은 눈만 껌벅거렸다.

교사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 아동은 대부분 가난한 집 자녀였다.

가난한 집 자녀를 걸러내기 위한 교사의 노력은 집요했다.


학력 검정을 마친 교사는 가정 형편을 물었다.

“부모가 학교에 기부를 많이 하였느냐?”

“가산은 넉넉하냐?”


거듭 확인한 덕분에 학교 당국은 ‘학교에 꼭 필요한 학생’을 얻을 수 있었다.

합격자 발표 결과 예상대로 재산도 넉넉하고 학교에 기부도 많이 한 집 자녀는 무난히 합격했고, 가난한 집 자녀는 낙제의 고배를 들었다.

터무니없는 시험 문제와 불공정한 선발 기준을 두고 항의가 빗발쳤다.

비난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관할 인천부 내무과장은 용감히 ‘소신’을 밝혀 또 한 번 구설에 올랐다.


“돈 없는 사람의 자제를 공부시켜 무엇 하느냐?”


‘학교에 꼭 필요한 학생’을 얻기 위해 학교 당국은 문제 개발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대표적인 것이 ‘100원권 지폐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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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서울 시내 한 공립보통학교는 입학시험에서 100원권 지폐를 꺼내놓고 “이것은 얼마짜리 지폐냐?”고 물었다.

당시 보통학교 교사 월급이 50원 내외였다.

교사조차 자주 구경하기 힘든 100원권 지폐를 중산층 이하의 가정에서 자라난 6~7세 아동이 보았을 리 만무했다.

100원권 지폐를 쌓아놓고 사는 부잣집 자녀는 땅 짚고 헤엄치기만큼 쉬운 문제였지만,

가난한 집 자녀는 ‘신기한 물건’을 멀뚱멀뚱 쳐다만 보았다.


“하고 많은 시험 문제 중에 하필 돈으로 시험을 보이느냐?”

“100원권 지폐를 늘 만지는 집에서 자라난 아이가 아니면 알아맞힐 수 없는 문제다. 돈 모르는 아이는 그대로 돌아가란 말인가?”


비난이 쏟아졌지만, 100원권 지폐 문제는 확실한 ‘변별력’을 인정받아 다음해에도 출제됐다.


가난한 집 자녀는 입학시험에 통과했다고 안심할 수 없었다.


1935년 부산의 한 보통학교에선 신입생에게 교사 한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50원을 ‘비공식 입학금’으로 걷었다.

당시 보통학교는 수업료는 받을 수 있었지만, 입학금은 받을 수 없었다.

학교 당국은 ‘비공식 입학금’에 ‘학부형회비’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갖다 붙이고, 이를 내지 않은 아동에게는 입학을 허가하지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입학시험에 통과한 가난한 집 자녀는 ‘비공식 입학금’ 장벽에 막혀 배움의 꿈을 접어야 했다.

비난이 쏟아지자 학교 당국은 교실 증설을 위해 학부형회에서 자발적으로 징수한 것이지

강제로 징수하진 않았다고 군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학했어도 10~20%는 중도에 학업을 포기했다.

매달 70~80전씩 징수하는 수업료를 내지 못한 탓이었다.

서울 시내 균일제 택시비 정도에 불과한 금액이었지만, 도시빈민이나 소작민은 그 정도 금액도 마련하지 못해 체납하기 일쑤였다.

수업료를 체납하는 비율은 평소 20% 정도였고, 불황 시에는 60%에 달했다.

교장은 교사에게 체납 수업료 징수를 독려했고, 실적이 부진한 교사에게는 가차 없이 징계처분을 내렸다.

1927년 군산공립보통학교는 수업료 징수 성적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교사 20여 명에게 월급을 주지 않는 극단적인 처분까지 내렸다.

교사는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구타, 욕설, 가정방문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해 수업료를 징수했다.

수업료를 장기간 체납한 아동에게는 정학, 퇴학 조치가 취해졌다.

수업료를 낼 때까지 성적표를 발급하지 않거나 졸업장을 주지 않는 것은 물론 세무서가 직접 나서 학부형의 재산을 압류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극을 사전에 예방하려면 신입생을 ‘신중히’ 가려 뽑는 수밖에 없었다.



출처:신동아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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