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역사를 보면 재밌는 사실이 있습니다. 왕위에 두 번이나 오른 왕이 있는거죠
정통제(正統帝) 주기진입니다. 어떻게 왕위에 두 번이나 올랐을까요?
정통제
환관! 환관!! 환관!!!
한나라,당나라,명나라의 공통점이라고 하면 내관 즉 환관세력이 컸습니다. 한나라 시절에 십상지, 당나라는 고력사중심으로한 환관세력, 그리고 명나라는 왕진,유근,위충현등등 일명 막장환관들 많았습니다. 물론 영락제의 정화나 숭정제의 최후의 심복이였던 왕승은처럼 뛰어나거나 정상적인 환관들도 있었습니다만 TOP급 막장 환관들이 많았습니다.
아무튼 정통제 주기진은 선덕제가 일찍 죽는 바람에 8살에 황제에 즉위합니다. 그리고 할머니인 태장태후 장씨가 섭정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던 환관 왕진의 전횡이 심해지고 황제 눈을 감아줍니다.
명나라의 대외관계
명나라의 대외 상황을 보시면 북로남왜(北虜南倭)라고 하는데 남쪽지방은 왜구(倭寇)들이 설쳐되고 북쪽에는 몽골계 부족이였던 오이라트족이 강력해 집니다.
전에 영락제는 몽골 부족들에게 조공무역을 허락하였는데, 마시(馬市)라는 형태로 교역을 하여 영종까지 관례화되었습니다. 명나라는 이들로부터 말과 가축 등 그 부산물을 수입하고, 비단 등의 의류와 식량 등을 수출하였다. 처음에는 50명 정도의 사절단 규모가 에센 때에 이르러 3,000명까지 늘어났고, 주변 위구르의 상인들까지 가세하여 무역량이 늘어나고 밀무역도 성행하였습니다.
이에 심각한 문제를 겪던 명나라는 오이라트 부족에 대한 무역을 제한하였고 1448년 사례감 왕진은 실제 인원에 대한 조공무역만 허용했으며, 말 값도 오이라트가 제시한 가격의 20%만 지급하였습니다. 결국불만을 품은 오이라트는 정통제 14년(1449년) 명나라 변방인 산시 성 다퉁(大同)으로 침입하였습니다.1)
환관 왕진은 정통제의 친정(親征)을 간청했고 여러 신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히 5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이라트를 정벌하러 가게 됩니다.
토목보의 변(土木湺之變)
토목보(土木湺)는 요새입니다.
산시성 대동에서 베이징까지 대략 250km 내외정도 되고
대충 색칠한곳이 비교해본봐 예상위치로 생각됩니다만
참 좋은 요새인데 근처에 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이라트족 장인 에센이 명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게 됩니다. 결국 보급로가 차단 당한 명군은 대패하게 되고 왕진은 호위무사에게 살해당하고 정통제는 잡혀가게 됩니다.
VIva la Vida
왕이 잡혀가자 북경에서는 난리가 납니다. 수도를 옮겨야한다라는 이야기 까지 나왔지만 우겸이라는 자가 북경 방어를 지시하고 정통제의 동생이였던 주기옥이 황제 즉 경태제가 황제를 이어 받게 됩니다.
다음해 명나라 군사는 오이라트를 격파하고 화의를 하는데 오이라트쪽에서는 결국 협상의 가치가 없던 정통제를 다시 명나라로 보냅니다
숨겨왔던 나의 수줍은 황제의 자리
정통제가 돌아오자 동생 경태제는 분란이 없도록 형을 태상황에 임명하고 남궁에 가둬둡니다. 또한 태자를 정통제의 아들이 아닌 자신의 아들 주견제를 태자로 삼습니다. 조정에서는 정통제파와 경태제파로 나눠지고 태자는 일찍 죽고 경태제 자신도 병에 걸립니다. 이틈을 이용해 정통제는 정변을 일으켜서 황제의 자리를 얻는 다음 천순제로 바꾼 후 경태제를 독살시킵니다. 이것을 탈문의변(奪門之變)하고 자신은 황제가 되고자신의 아들은 태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천순제로 복귀한 후 정통제때보단 정상적인 활동을 하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후궁,궁녀의 순장금지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환관 양진을 평생 그리워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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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키 인용
사진:중국웹,엔하위키